그릇 (외 2편)
안도현
1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담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당하
길을 잘못 들어 당하, 들어갈 뻔하였다
어느 집 처마 아래로 햇볕이 싸묵싸묵 드나드는 게 보였다
차를 멈추고 마을 안쪽이 어디일까 잠깐 살펴보았다 당하, 그 순간이 내게는 꽤나 진지한 응시라고 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나의 바깥일 뿐이었지
딩아 돌하 가는 모래 벼랑에, 너는 벼랑처럼 막아섰고, 구운 밤 다섯되를 심어서, 나는 호미로 땅을 팠고,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터야만, 눈 내리는 밤이 살갗으로 지나가야만 너에게 닿으려니 하였다
당하에서도 누구나 생일상을 받고 부의 봉투를 쓰고 교미를 하고 가보고 싶은 곳 다 못 가보고 살았겠지 가려니 생각지도 않은 곳을 가볼 때도 있었겠지
차창을 닫고 당하, 당하, 혼자서 소리를 내보았다 집 아래, 집 아래, 빗물이 모이는 골짜기와 하체가 서늘한 고랑들
너에게 아주 오래된 거울 하나를 쥐여줄까 당하, 그 거울 속으로 들어가 석삼년 녹슬면서 기다릴 거라고 말할까 당하, 내처 달릴까 당하,
물까치들이 울음소리를 찍어 바르던 풀숲 가에서 따라 울던 바람
우리는 서로를 통과할 수 없는 바깥이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쉽게 내릴 수 없어서
아무것도 몰라도 다 아는 것 같아서
한가운데가 아니고 내가 너의 변두리쯤이어서 들어가지 못해서 좋았던 당하
식물도감
*
벼룩나물 뜯어 밥 비벼 먹으면
며칠 뒤에 봄이 온다지
*
당신 잇몸에
껍질 벗긴 찔레 새순 닿으면
당신 치아에 찔레가 길어 올린 연둣빛 물줄기가 감기면
참 좋겠다
*
펼친 꽃잎
접기 아까워
작약은 종일 작약작약 비를 맞네
*
천안에서 전주를 가려면
차령터널을 통과하면서부터
밤꽃냄새군대의 저지선을 돌파해야 한다
*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철둑길 강아지풀
기차 타러 나왔다
박용래 시인의 마을까지 가는
기차가 끊겼다
*
전주향교 은행나무 밑둥치에
은행나무도 보습학원을 차렸다
*
오동나무가 던져주니 감나무가 받는다
감나무가 던져주니 가죽나무가 받는다
가죽나무가 던져주니 또 살구나무가 받는다
까치 한 마리를
받는다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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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우체국』『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간절하게 참 철없이』『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산문집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백석 평전』외.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