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26-31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8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9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31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5,1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신 분을 신뢰하는 일>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탈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의 표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선물’이요,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명’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선물은 말씀처럼 ‘씨앗’(마태 13,1-23)으로, 곧 ‘종자돈’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 셈을 할 때는 그 선물을 활용하여 맺은 열매에 따라 대가를 지불합니다.
결국 ‘선물에 따른 응답 실행’이 바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경기의 규칙인 셈입니다.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23)
그리고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 25,26)
사실 은총의 선물은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주는 대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만큼만 받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임은 비워진 만큼만 받을 수 있고,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기에, 결국 베풀수록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선물을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충실하게 열매 맺는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깨어 준비하는 삶'은 맡겨진 일에 충실함이요, 맡겨진 일에 충실함은 일을 ‘맡긴 분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충실함’,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셨습니다.
바로 이 ‘은총’과 ‘십자가’야말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규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은총 그 자체보다도, 은총을 실현하는 데 따르는 십자가 그 자체보다도, 먼저 그것을 ‘주신 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자랑하지 않기>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은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1코린 1,26)
독서와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저는 저의 출신과 처지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복음에 비춰 저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아니니 다행입니다.
저는 그야말로 Positive Thinking(긍정적-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고 특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에 그 일을 하는 데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이요 사랑이시라고 하느님을 믿고 모진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며, 사람들에 대해서도 믿기로 선택하였기 때문인지 잘 믿는 편입니다.
그런데 제가 믿기로 선택한 것에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옛날 이발소에서 머리 깎으면 면도사가 면도해줄 때의 일입니다.
얼굴을 면도하고 나면 턱을 거쳐 목까지 면도해주는데, 하루는 목 부분을 면도할 때 문득 저분이 면도하다가 제 목을 확 따버리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그동안 사람을 믿어왔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는데, 계속 믿고 면도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으며 그리고 그때 선택했습니다.
계속 믿기로, 그리고 모두 믿기로.
그리고 독서에 비춰 저는 유력한 가문 출신이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잠언이 얘기하듯 우리는 세속적인 것에 영향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인간이 영적으로 얼마나 약한지 정확히 꿰뚫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잠언 30,8-9)
그런데 좋은 가문 출신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것은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옛날에는 그러니까 세속적인 생각이 있었을 때는 열등감이 없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열등감이 있었다는 것이 바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의 반작용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가장 천박한 자랑은 명품 자랑입니다.
머리(아이큐) 자랑도 못지않습니다.
재능(달란트) 자랑도 꽤 많이 합니다.
가문이나 자식 자랑도 많이 하고 손주 자랑은 노골적입니다.
더 꼴불견인 것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이것을 신랄하게 꼬집으신 적 있지요.
바리사이와 세리가 하느님 앞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며 머리를 쳐들지 못하는데, 바리사이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루카 18,11)
기도하러 갔다지만 실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랑한 것이요, 그것도 인간에게 자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랑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래,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느님 앞에서 자랑합니까?
우리 가운데는 이런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분이 있다면 그분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코린 1,28-29)
그러니 우리는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데, 적어도 하느님 앞에서까지 자랑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인과 함께 기쁨을>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그릇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바탕으로 나의 정성을 더 하여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합니다.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고백하면 될 것을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 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 불능입니다.
주인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안에 가둬놓은 안다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뭔가를 기대만 하는 사람은 불평불만, 합리화를 꾀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투덜댈 여유가 없습니다.
노를 젓는 사람은 배를 흔들 시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씀은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면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며, 적게 받은 사람에게서는 적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증가시킬 소명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탈렌트가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많고 적고는 물론 크고 작음에도 상관치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유용하게 쓸 뿐입니다.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쓸 뿐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눈만 뜨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이 하루는 너무나 은혜로운 탈렌트입니다!>
탈렌트 비유를 묵상하면서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저는 우울한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내면서 주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주님, 저 사람들에게는 저리 좋은 탈렌트를 주셨으면서, 어찌 제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나요? 백번 천번 생각해도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니, 어찌 이리 사람을 차별대우 하시나요?” 하면서 많이도 따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공동선을 위해 사용할 탈렌트를 분명히 주셨다는 것을.
관건은 우리 인간 측의 노력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주셨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고 캐내고 갈고 닦고 엎그레이드 시키려는 우리 측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늦었지만 주님께서 제게 주신 탈렌트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해봅니다.
제게 선물로 주신 재능, 장점, 오랜 기간 쌓아올린 전문성, 스펙 등도 탈렌트이겠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지니고있는 이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이 둘도 없는 탈렌트입니다.
아직 내게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이 좋은 탈렌트입니다.
조금 나이든 중년의 원숙함과 균형감각도 좋은 탈렌트입니다.
크게 뒤로 물러설 줄 아는 노년의 지혜로움도 멋진 탈렌트입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새 아침과 24시간이라는 하루가 너무나 은혜로운 탈렌트입니다.
하루 온종일 빈둥빈둥 영양가 제로의 하루를 보낸 날이 있습니다.
하루의 끝자락에 서면 무의미한 하루를 허송세월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하고 우울해집니다.
반대로 하루 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헌신한 날이 있습니다.
몸은 파김치처럼 녹초가 되고 너무나 고되어 자동으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마음은 뿌듯해지고 영혼은 맑아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잘 사용했기 때문에 기쁨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이렇게 칭찬하실 것입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 21)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탈렌트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1)
‘탈렌트’를 ‘주님의 것, 주님께서 주신 은총, 주님의 선물’이라는 생각만 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탈렌트를 주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내가 구원받기를 원해서’, ‘내가 살고 싶어서’, 즉 ‘나 자신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인데, 내가 나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은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은 종들에게 나누어 준 탈렌트를 돌려받지 않았고, 종들이 탈렌트로 돈벌이를 해서 더 벌어들인 탈렌트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종들은 처음에 받은 탈렌트와 더 벌어들인 탈렌트를 모두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준 것은 자신이 무슨 이득을 얻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 ‘종들을 위해서’입니다.
비유에서는 “종들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기 위해서”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21절, 23절).
‘많은 일’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다면, 그것은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처럼 되어버리는 일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것이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고, 그래서 받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했는데, 비유를 보면 주인은 세 번째 종에게 준 탈렌트를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갑니다(28절).
돌려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주인은 주인의 것이니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종을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씨’를 주시는 분이고, 우리가 그 씨를 심고 가꾸고 잘 돌보아서 ‘구원’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도 그냥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2)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를 받는 것에 대해서, 비유에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탈렌트의 차이는 ‘은총의 양의 차이’도 아니고, ‘능력의 차이’도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다양성’을 나타냅니다.
그 다양성은 보통 ‘옹기장이와 진흙’으로 설명됩니다.
"옹기장이가 제 손에 있는 진흙을 제 마음대로 빚듯, 인간은 자신을 만드신 분의 손안에 있고, 그분께서는 당신 결정에 따라 인간에게 되갚으신다."
(집회 33,13)
3)
세 번째 종이 주인에게 한 말,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은다.” 라는 말은 “주는 것 없이 빼앗아 가기만 한다.” 라는 비난입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 바치는 것이 많은데도 받는 은총이 별로 없다.” 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
주인이 세 번째 종을 꾸짖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는 큰 죄에 속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어쩌면 그 두 사람은 “우리는 최소한 악행을 행하지는 않았다.” 라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살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큰 죄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지 않은 것도 큰 죄이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 것이 큰 죄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에서 산상설교의 ‘소금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마태 5,13)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도, 또 이웃들에게도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나에게 맡겨진 탈렌트 - '날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시편 33,12)
제 유일한 소망은 '있는 듯 없는 듯', '보일 듯 말 듯', 조용히, 묵묵히, 가을단풍처럼, 저녁노을처럼, 곱고 품위있게 살아 가는 것입니다.
외관에는 초연하고 자유로우니, 안이 맑고 밝으면 밖도 저절로 그러하리란 믿음 때문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볼 때 마다 되뇌는 오래된 자작시가 있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여전히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 시입니다.
“문열면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
하느님의 사랑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도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뵙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삶의 좋은 지혜가 됩니다.
매사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깨닫습니다.
“선은 아무리 쌓아도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악은 아주 작은 불씨일지라도 집을 태울 수 있다.”
<다산>
“선은 반드시 쌓인 후에 이뤄지고 악은 비록 사소하더라도 경계해야 한다.”
<주자>
어제 교리문답같은 말마디도 고마웠습니다.
“예수님이 30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사셨고, 그로써 우리의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루하루 맡겨진 사명에 최선의 노력을 다함으로 거룩한 일상을 사는 게 참으로 중요하며 잘 사는 일입니다.
어제 마산 배기현 주교님이 수도공동체에 선물한 <거제도 가는 길, 피델리스> 책을 보는 중입니다.
서문 대신 쓰여진 말마디가 마음을 끕니다.
“귀한 순례기가 있어 보내드립니다. 배기현 주교, 2024년 성녀 모니카 축일에”
오늘 제1독서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게 합니다.
겸손한 마음에서 샘솟는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샘솟은 겸손이요 감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살아가기에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각자 맡겨진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감사는 저절로 자기가 받은 탈렌트의 활용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몇 분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번역에 초인적인 활동을 펼치는 분들입니다.
성염 대사, 안실비아 수녀, 윤주현 신부입니다.
자기가 받은 탈렌트를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온전히 활용하는 분들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 묵상을 보면 안실비아 수녀의 진솔한 고백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받은 탈렌트를 활용하고 나누는 마음으로 날마다 평생 매일 강론을 씁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결 둘입니다.
어제 열처녀의 비유에서처럼 늘 깨어 있는 삶이요, 오늘 탈렌트의 비유에서처럼 능력에 따라 맡겨진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는 삶, 바로 이것이 지상에서의 참 행복한 하늘나라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남이 받은 탈렌트와 비교할 것도 없고 추호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각자 활용하라 각자의 능력에 따라 맡기신 탈렌트니 자랑할 것도 아니고, 다만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책임감을 지니고 최대한 활용하면 됩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닌, 잘 살았느냐의 ‘삶의 질’입니다.
오늘 다섯 탈렌트를 받아 다섯 탈렌트를, 두 탈렌트를 받아 두 탈렌트를 남긴 이의 삶의 질은 5/5, 2/2, 똑같은 1입니다.
둘 다 주인이신 주님께 격찬을 받습니다.
둘 다 삶의 아마추어가 아닌 삶의 프로가 되어 산 이들입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 경구(警句)와 더불어 가나안 여자에 대한 다음 주님의 격찬도 내 삶의 경구로 삼아 마음에 담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종아! 여인아!' 대신 내 이름을 넣고 되뇌어 보세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마태 15,28)
반면 한 탈렌트 받은 자는 주인의 뜻을 완전히 착각했고 오해했습니다.
잘 활용하라 맡기신 한 탈렌트를 전혀 활용하지 않고 무사안일, 안전일변도의 삶을 선택하여 한 탈렌트 그대로 보관했다가 그대로 바칩니다.
한 탈렌트만 더 남겨도 충분한 것을 그냥 사장시켜 버리고 말았고 주인의 격렬한 반응과 더불어 한 탈렌트도 회수당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영적 현실에도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각자 맡겨진 탈렌트를 잘 활용했는가 주님께 셈바치는 시간입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시편 33,1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습니다>
본당에 새로운 단체가 조직되었습니다.
이름을 정하는데 몇 가지 제안이 있었습니다.
‘망치회, 요셉회, 목수회’ 중에서 목수회로 정했습니다.
이분들은 본당 ‘창고’를 만들었던 분입니다.
의기투합해서 앞으로 본당 시설의 관리와 수리를 담당하는 부서를 만들자고 했고, 그렇게 해서 목수회가 탄생했습니다.
요셉 성인도 목수였고, 예수님도 목수였습니다.
그래서 단체 이름을 목수회로 정했습니다.
목수회의 첫 번째 과제는 사제관 ‘에어컨’ 문제였습니다.
사제관 에어컨의 온도 조절이 안 되었습니다.
몇 가지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필터’였습니다.
에어컨의 필터를 6개월에 한번은 교체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 한분이 에어컨 필터를 교체하였고, 온도 조절이 잘 되었습니다.
앞으로 목수회는 본당의 시설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단체가 될 것입니다.
기꺼이 굳은 일을 맡아서 해 주기로 한 ‘목수회’ 형제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나누었으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뉴욕에서 지낼 때입니다.
저의 직책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 지사장’이었습니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임무였습니다.
주된 임무는 ‘신문홍보’였습니다.
직원들이 원고를 작성하면 교정하였고, 가끔씩 필진과의 만남도 가졌고, 광고주와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팬데믹이 왔고, 뉴욕에 온지 6개월 만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노력하면서 신문사를 운영하였습니다.
덕분에 신문사는 팬데믹의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동북부 ME 담당신부입니다.
저는 엠이 봉자들과 함께 피정을 준비했고, 가을 소풍도 함께 했습니다.
주말 봉사도 함께 했습니다.
엠이 봉사자들은 저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엠이 봉사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처음에 3개월만 도와주기로 했는데 뉴욕을 떠날 때까지 3년 6개월을 함께 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는 저의 서품 30주년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공동체와 함께 야외미사를 하였고, 작년에는 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의 경험은 지금 댈러스 성 김대건 성당에서 지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나눌 것이 없어서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이 부활로 열매를 맺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할 일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은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늘 마음에 담고 살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의 밀림은 늘 푸르고 많은 생명이 살아갑니다.
이는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모래에는 생명이 살기 어렵습니다.
이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곁에서 듣는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늘 생기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사람은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작은 부분도 소중하게 여기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요즘 물가가 많이 올라서 백 원 단위의 돈은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천 원 단위의 돈 역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크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 돈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새벽에 묵주기도를 하며 동네 공원을 걷습니다.
6~7km를 걸으며 묵주기도 20단을 바칩니다.
그날도 묵주를 들고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성당까지 오려면 아직도 꽤 먼 거리를 가야만 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편의점이 있어서 얼른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글쎄 지갑이 없었고, 여기에 휴대전화도 없으니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혹시 몰라서 바지 주머니를 뒤지니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다시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일 싼 우산의 가격이 7천 원으로, 2천 원이 부족합니다.
평소에 크지 않은 돈이라 생각했는데, 그 2천 원은 우산을 살 수 없는 너무나 큰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어느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뜻밖의 사고로 자녀가 먼저 하느님 나라로 가게 된 것이지요.
가족 중의 한 명일 뿐이지만, 그 빈자리는 너무나 컸습니다.
슬픔이 떠나지 않았고,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부분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작은 부분이 전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작은 것은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특히 다른 이와 비교하면서 자기가 가진 것이 너무 적다면서 불평불만을 가집니다.
하지만 작은 부분도 소중하게 여기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탈렌트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주고 주인이 떠나지요.
다섯 텔렌트 받은 이는 그 돈을 활용해서 다섯 탈렌트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는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길 뿐이었습니다.
결과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 한 탈렌트를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게 되었고,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고 맙니다.
한 탈렌트는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닙니다.
노동자가 16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를 받은 이보다 적게 받았다는 불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한 탈렌트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이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게 받았다면서 불평 불만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받아들이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충실한 사람만이 주님께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