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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
이번 프랑스 전권대신은 불인불의(不仁不義)한 나라인 조선을 징벌하기로 정하였으니 만약 귀를 기울여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전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 세 사람이 관청을 부추겨 우리나라 전교사를 살해한 것에 대해 엄정히 분별할 것이다.
1. 너희 관청에서는 조속히 전권(全權)을 지닌 관원이 조속히 이곳에 와서 직접 면대하여 영구적인 장정(章程)을 확정하라.
재해(災害)와 흉환(凶患)이 지금 가까이 닥쳤으니 너희가 재난을 피하려고 한다면 조속히 회답하고 명령을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본 대신이 기일을 앞당겨 너희들에게 환난(患難)을 줄 것이니, 너희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그 때 가서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말라.
기원 1866년 양력 10월 18일”
이에 이경하는 다음의 서신으로 답장한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국법(國法)을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하늘이 백성들을 세상에 내려 보냄에 이치로써 순(順)하게 하고, 나라의 봉강(封疆)을 나눔에 다스리어 지키게 하는 것이다. 순(順)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질면서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라는 것은 무엇인가? 침범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너그럽게 대하여 이름도 알 수 없고, 도리(道里)도 알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이 매번 우리나라 경내에 표류해오면, 수토지신(守土之臣)에게 명하여 영접하고 사정을 물어보면서 마치 오랜 우호관계를 수행하듯이 하였다. 굶주렸다고 하면 먹을 것을 주고, 춥다고 하면 옷을 주었고, 병들었다고 말하면 약을 지어서 치료해 주기도 하였으며, 돌아가겠다고 하면 식량까지 싸서 보내주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대대로 지켜오는 법으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온 천하가 우리를 일컬어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우리 사람들을 인연(夤緣)하여 몰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의 옷으로 바꿔입고 우리 말을 배워가지고 우리 백성과 나라를 속인다든지 우리의 예의와 풍속을 어지럽힌다면,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 만큼 발각되는 대로 반드시 죽인다. 이는 세상 모든 나라들의 한결같은 법인데 우리가 상법(常法)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성내는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지금 너희들이 이것을 트집 잡아 말하는 것은 이미 도리에 몹시 어긋나는 것이다.
일전에 너희 배가 우리 경강(京江)에 들어왔을 때는 배는 불과 2척이었고 사람도 1,000명이 못되었으니 만약 도륙(屠戮)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방법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몰래 침입한 자들과는 구별되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대해주는 의리에서 차마 병력을 가하여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경내를 지나며 소나 닭 같은 것을 요구하면 그때마다 주었다. 작은 배가 왕래할 때에 말로써 물으면 먹을 것은 받으면서 돌아가라는 말은 따르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배반한 것이지 우리가 어찌 너희를 배반한 것인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갈수록 행패를 부려서 지금 우리 성부(城府)를 침범하고, 우리 백성들을 살해하고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는 행위가 한이 없으니 실로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나라 법을 어기는 자들로서 이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다. 그러니 하늘이 이미 그들을 미워하고 사람들도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너희들이 우리 나라에 전교(傳敎)를 행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수레와 서책이 같지 않으며 각기 숭상하는 것이 있으니 정사곡직(正邪曲直)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학문을 숭상하고 너희는 너희의 학문을 행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남에게 자기 조상을 버리고 남의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약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하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희를 은(殷) 탕(湯) 임금이 갈백(葛伯)에게 하듯이 대해 주었는데, 너희는 우리를 험윤(玁狁)이 주(周) 나라 선왕(宣王)를 배반하듯이 포악하게 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지인지덕(至仁至德)하더라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만(千萬)의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지금 바닷가에 나와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토벌의 뜻을 펴려고 한다. 우선 내일 이른 아침에 서로 대면하자는 약속을 급히 보내니 군사의 곡직(曲直)과 승패(勝敗)가 결정되리라. 너희들은 퇴각하여 달아나지 말고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들어라.
병인년(1866년) 10월 19일【술시(戌時)】 조선국 순무영(巡撫營)
한편 흥선대원군은 의정부에 군사들을 독려하는 격문을 내린다.
“사람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다. 양이(洋夷)들이 여러 나라들을 침략한 것은 본래 있었지만 지금까지 몇백 년간 이적들은 감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중국이 화친을 허락한 다음부터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곱절이나 더해져서 도처에서 포악한 행동을 감행하여 모두 그들의 해를 입게 되었다.
오직 우리나라에 대해서만 감행하지 못한 것은 실로 옛 성인이 하늘에서 음덕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예의(禮義)이고 우리가 의지할 바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굳게 뭉치는 것이다.
지금 상하(上下)의 사람들이 만약 의심하거나 겁을 먹는다면 모든 일은 와해(瓦解)되고 국사(國事)는 그르치게 된다. 나에게 마음 속으로 굳게 정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이 굳은 맹세를 알고 나의 뒤를 따르라.
첫째, 고통을 참지 못하고서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둘째, 그들의 해악을 참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위이다.
셋째, 적들이 도성에 쳐들어왔다고 해서 만약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다.”
9월 18일엔 프랑스 측이 2척의 함정과 해군 육전대원들로 한성근과 지홍관이 150명의 병사로 지키던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프랑스 해군의 빠른 사격에 조선군은 3명의 전사자와 2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에 조선 군대는 전술적 후퇴를 감행, 프랑스 해군은 문수산성을 불살라버렸다. 조선군은 프랑스 해군에게 사격을 퍼부어 50명 ~ 60명의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했으나, 본인들 스스로도 그들이 자신들이 총을 쏘자 그냥 엄폐한 것인지 부상당한 것인지 죽은 것인지도 가늠 못하는 처지였다. 이 패배로 사실상 강화도는 프랑스 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분노한 이시원과 이지원 형제가 음독 자살하기도 했다.
이어 9월 22일에 광성진과 갑곶진을 점령해 불태웠고 조선 배를 보이는 대로 포격해 격침시켰다. 조정은 급히 4천명의 지원군을 급파했지만 조선군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만 사수하며 강화도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조정은 강화도를 무력하게 내준 장수들을 처벌하며 분풀이를 했다. 기고만장해진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강화도 곳곳의 민가를 비롯한 주요 방어진지를 무너트리고 방화로 무력화 시켰다. 또한 용진진, 갑곳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철곳보, 월곳진을 비롯한 성곽과 요새, 돈대, 관청, 창고, 장대. 심지어 국왕이 머무는 강화행궁에도 불사르고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의 약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10월 3일 프랑스 해군은 60명의 장병을 보내 정족산성을 정찰한 다음에 점거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는데 매복하고 있던 양헌수가 기습을 가해 동문에서 2명, 남문에서 4명의 수병을 사살했다고 기록했다. 조선군 전사자는 1명이었고 촌민들이 40명 가량의 프랑스군 전사자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양헌수의 병인일기에 따르면 진시(8시)에서 미시(14시)까지 계속된 전투에 조선군의 탄약이 바닥났을 무렵 때마침 프랑스 해군이 물러났다고 한다. 계속된 승리에 방심한 프랑스 해군은 당나귀에 술과 음식을 잔뜩 싣고 거의 나들이를 가듯이 정족산성에 진입했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패하고 말았다. 결국 조선이 협상할 의사가 없음만 확인한 로즈 제독의 군은 패배 이후 10월 9일부터 축차적으로 퇴각했고, 10월 13일에 완전히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조선과 프랑스의 전쟁은 예상을 벗어나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때 프랑스 해군의 사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들 입장에선 대국 프랑스의 군대가 아시아 변방 깡촌의 소국에게 패배했다는 점에 참가했던 프랑스 해군 병졸들은 격분해 로즈 제독에게 설욕전을 하자고 청했으며,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속국에서 여러 차례 쌓은 실전 경험으로 정예 부대로 꼽히는 편이었기에 프랑스 해군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복수에 적극적이었지만, 제독은 퇴각을 고집했다. 이후 로즈 제독은 "프랑스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며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지만, 로즈 제독은 전쟁 이후 잘만 승진했다.
4. 의의
프랑스 원정함대의 목표를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조선의 전략적 승리다. 그렇기에 교과서에서도 조선이 프랑스를 물리쳤다는 점을 명백히 서술하고 있다.
조선은 이 승리로 당분간은 주변 이웃처럼 덩치만 큰 호구로전락하는 신세는 면하고 국가적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조선 입장에선 부당한 서구의 요구나 불리한 조건의 통상을 차단함으로써 국익을 지킬 수 있었고, 한동안 외세의 큰 간섭없이 독립과 자주를 누릴 수 있었다. 멀리서 드리우던 그림자와 별개로 서구에 대한 공포와 압박에 흔들리던 당시 조선 입장에선 여러모로 대내외적인 안정에 도움을 준 승리였다.
저들의 화포는 사거리가 20리나 되었고 포의 앙각에 따라 장단을 조절했다. (중략) 적의 총은 사거리가 500보에 화승 없이 쏘는데, 쏘는 속도도 귀신처럼 빨랐다.
양헌수, 병인일기
그러나 이 승리를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프랑스군이 동원한 군대는 600여 명에 불과한 원정함대였다. 프랑스가 소규모의 분견대만을 보낸 것은 넓게 퍼진 식민지 대비 부족한 원정함대로 공세종말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극동함대만으론 조선정벌이 어렵다고 판단한 로즈 제독이 국위 실추를 감수하고도 뱃머리를 과감히 돌린 것은 추가 증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전술적으로 봤을 때도 양헌수의 기습전으로 반격에 성공하기 전까진 패전을 거듭했다는 점에서 결코 완전한 승리라고 하긴 어렵다. 쇄국으로 일관하던 조선에게 처음으로 근대화된 서양 국가의 무력을 실감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의 소총은 전장식 강선총인 '미니에 라이플'이었는데, 연사력 자체는 조선의 화승총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사거리는 4배에 달했고 명중률 및 살상력도 훨씬 높았다. 또한 조준사격이 가능하고 위력도 좋은 서양식 대포는 조선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때문에 병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서양 군대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된다.
간혹 사극에서는 프랑스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무너진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 실제론 그런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였다. 오히려 불과 수백명의 프랑스군에게 문수산성이 함락되고 성 내 누각과 관아의 건물들 그리고 강화행궁이 모조리 불타버리는 등 재산피해가 심했다. 다만 수백 명의 병력이 섬멸되고 지휘관 어재연까지 전사한 신미양요와는 달리 병인양요에서는 조선군도 그다지 큰 인명피해는 없었고 전사자도 5명 정도를 넘지 않은 것으로 보고됐다.
즉, 양측 다 인명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조선군의 정확한 피해 집계는 전해지지 않으나 확실한 사상자는 14명 정도에 추가로 부상자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며, 프랑스 해군의 피해도 정확하진 않은데 양헌수는 최소 수병 6명을 죽였고 퇴각하는 프랑스 해군을 구경한 촌민들이 죽은 프랑스 병졸들을 40명은 족히 보았다고 증언한다며 보고했다. 하지만 로즈 제독은 문수산성에선 전사자 3명, 정족산성에선 전사자는 없고 부상자는 30여명이라고 보고했다.
결론적으로 동남아는 물론 압도적 인구와 긴 역사를 가진 중국조차 추풍낙엽으로 털려나가던 당시 극동정세에서 전근대적 무기와 체제를 가지고 당시 잘나가기로 손에 꼽던 서구 열강 원정함대를 저지해내며 전략적 승리를 거둔 것의 의미는 결코 적지않다. 그러나 조선은 명확한 기술격차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위치와 현장 지휘관의 전술에 힘입어 신승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며 서양세력을 기존의 병기와 현재의 체제로도 막아낼 수 있다는 오판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개혁개방의 적시를 놓치고 결국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병인양요를 조선의 승리라고 서술하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전투를 치른 프랑스 측이 이를 자신들의 패배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쥐베르의 글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의사였던 마르탱이 1883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병인양요를 명백히 "패배"로 규정하고 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철수를 야반 도주라고 불렀으며, 원정 함대의 장병들이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승전이 가졌던 의의나 가치의 정도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겠으나, 조선이 승전했다는 것 자체는 양국이 인정한 사실이므로 부정할 수 없다. 영국의 잡지인 이코노미스트에서도 1870년 9월 24일 기사에서, "프랑스가 조선에서 겪은 패배는 서구 열강들의 약화의 증거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로즈 제독이 철수를 계획한 이유도 정족산성을 점령하려면 최소한 500명의 보병과 1개 포대가 필요한데, 원정 함대에서 이들을 더 조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더 이상의 작전도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프랑스가 조선의 개항을 관철시키지 못했고 약탈품 외엔 얻은 것이 없으니 결국은 전략적인 패배. 실제 접전에서는 조선을 정복할 수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본인들이 이루려는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전반적인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1870년에 일어난 중국의 텐진 교안도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H.쥐베르라는 프랑스 군인의 종군일기에 나오는데, 당시 프랑스군의 실패가 프랑스인들이 고려인들에게 패배하여 도망갔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무적이 아니다!라는 소문으로 청나라 전국에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청국의 고관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이를 통쾌해하며 조선에게 당한 프랑스의 패배를 과장해서 소문을 퍼뜨렸고, 이런 분위기에 큰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 1870년의 폭동의 시발점이라 해석한다.
프랑스가 병력의 운용 한계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군사적 능력의 부족보단 이를 동원할 정치적 의지 부족이 더 큰 원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군은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제국주의 열강 중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3개국 중 하나였다. 프랑스는 이 당시 바다와 접한 땅을 영국과 다 갈라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전성기였다. 무장이나 훈련도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여러 속국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 때문에 실전 경험도 무척 많았다.
프랑스가 조선을 빨리 포기한 이유는 군사적 좌절과 더불어 정세적인 것으로, 당시 속국화에 힘을 쓰던 인도차이나 방면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원정대의 주력은 베트남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방면 등의 인도차이나에서 원정 중이었고,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던 응우옌 왕조의 산발적인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에 조선에 다시 전장을 벌이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에도 개입하고 멕시코 제2제국을 세우는 등 전 세계적으로 여러 사업을 벌여놓은데 그 결과가 신통치 않은 상황이라 조선에 개입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속국화는 1880년대 돼서야 마무리되며,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저항 세력 뿐만 아니라 베트남을 그동안 식민지로 지배하던 청나라와도 전쟁(청불전쟁)을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의 미국도 전후 복구와 서부 개발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신미양요 이후로 딱히 조선에 진출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할양받은 영국조차도 1870년대에 아프가니스탄 및 인도의 토착세력의 반란으로 서남아시아에 신경쓰는 형편이라 조선에 개입하기가 힘들었다.
즉, 당시 서구열강들은 조선에 아예 무관심한 건 아니였으나 크게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적당히 툭쳐서 넘어가면 좋고 안되면 말고 같은 느낌이였고 그래서 빌미가 잡히자 원정함대를 보내 간을 본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저항이 완강하고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자 곧바로 포기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을 먹자고 대대적인 군사력을 투사하기엔 이득이 불명확하고 다른 손볼 곳도 많았기 때문이였다. 이런 열강의 공백 상황을 노려 조선을 포함외교로 강제 개항한 것은 근대화를 마무리해가던 일본이었다.
프랑스 측 지휘관 피에르 - 귀스타브 로즈 제독은, 이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군소장(contre-admiral : 영미의 rear-admiral에 해당)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여 보불전쟁에도 참가했으며, 1875년에는 지중해 분함대(Escadre de la Méditerranée) 사령관을 맡았다. 로즈가 중장으로 승진한 것이나 지중해 분함대의 위상을 따져본다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좌천설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서양 함대에 비하면 좀 한직이지만, 그래도 프랑스 해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나쁜 자리까진 아니다.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쇄국 정책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근대화는 더욱 더 멀어졌다. 그리고 약탈해 간 각종 문화재 및 서적들은 서양의 동양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93년 방한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도서관 사서들의 반대를 누르고 반환을 약속하기도 했다.
딱 한 권 정상 회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반환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 대여 방식으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한국으로의 반환이 양국 정상 간에 합의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외규장각 도서 전체의 반환에 대한 세부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측이 외규장각과 한국의 다른 문화재를 맞교환하자는 요구를 했고, 당연히 한국 측에선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인지라 김대중 정부 당시 비준 거부 및 협상 중단 선언으로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프랑스 측에 협상 재개를 요청해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후임인 이명박 대통령은 프랑스와 교섭에 성공해 G20 회의 기간 중 외규장각 서적들을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았다. 프랑스 국내법상 '반환'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못했으며, '영구 임대' 표현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반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영구히 돌려받았다. 이에 '실리를 택한 것이다', '소유권을 명확하게 우리 쪽으로 돌리지 못했다'라는 논쟁이 일었다. 어찌되었든 외규장각 서적들은 10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병인양요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의 침략에 대한 공포심이 크게 확산되었다. 강화도가 프랑스 군대에게 함락당하자, 이 소식을 듣고 아편전쟁 때처럼 프랑스 군대가 도성에까지 쳐들어올까봐 겁에 질린 한양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산속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공포와 불안이 크게 번진 사회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세상을 뒤엎으려는 엉뚱한 야심가도 나타났으니, 바로 이필제(李弼濟 1825~1871년)였다. 이필제는 병인양요가 터지고 조선 사회에 서양에 대한 공포심이 퍼지자, 이를 악용하여 "앞으로 조선이 서양에 망하지 않으려면, 먼저 나를 따라 이 나라 조선을 뒤엎고 새로운 조정을 만든 다음, 청나라와 일본을 정복하여 힘을 키우고, 그 다음 서양 나라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주장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필제의 난(1869~1871)'을 일으켰다. 이 이필제의 난은 1869년부터 1871년까지 2년 동안 5번이나 계속 발생할 만큼, 조선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여러 번 드라마에서 다룬 신미양요와 달리, 1980년대 MBC 사극드라마인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서 다룬 게 그나마 상세하게 다룬 정도다. 여기서도 프랑스 군에게 조선군이 마구 털렸다. 그런데, 드라마에선 청나라 옷을 입긴 해도 상투를 쓴 조선인이 나와 프랑스 군 장교와 같이 와 항복하라는 말을 하는 게 나왔다. 조선군 장수가 조선인이면서도 이 배신자!라고 사격을 명하지만 그 조선인과 프랑스 군 장교는 얼른 피하고 프랑스군 포격이 이어진다. 이후 조선군이 반격하네 뭐네 영상도 없이 내레이션으로 프랑스군이 알아서 철군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나온다.
일본 만화 타임슬립 닥터 JIN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JIN'의 한국판 리메이크작인 닥터 진에서도 병인양요를 다룬다.
찬란한 여명은 그나마 프랑스 해군의 당시 복제를 최대한 따라해보려고 시도한 흔적이 있는 등 고증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임을 고려할 때 그럭저럭 노력한 편이다. 다만 함 승조원들 외 육전대원들은 육군의 복식을 흉내낸 피복을 착용한 점이 아쉬우며,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군민도, 프랑스군도 수십 명씩 마구 죽어나가는 걸로 나오는 고증 오류가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북한 사진집인 북녘 사람들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측 기록을 언급하면서 서문을 열고 있다. 다만 프랑스와 조선 간의 관계 때문에 언급했을 뿐이지 전반적인 스탠스는 비판적이다. 마르케가 알아주는 사회주의자이자 좌파이기 때문. 그리고 북녘 사람들 책에서는 작가 이름을 크리스 마르케가 아니라 크리스 마커라 적고 있다.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원 역사의 조선의 승리에는 변함이 없지만 민국인들의 개입으로 역사가 바뀌어 프랑스의 피해가 더 커져 판저파우스트3와 조선의 화약 수송선에 기선 두척이 격침, 문수산 공략하던 프랑스 병력들은 크레모아와 C4에 피떡이 되버리고 총사령관 로즈 제독 이하 지휘부 전원이 포로로 잡히며 조선군 해안포대 사격에 손상된 기선을 예인할 능력이 없어 자침시키는 유래없는 대패전으로 바뀐다. 이후 프랑스의 권위는 이후 벌어진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이후 처리 과정에서의 벨로네의 망발로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이후 프랑스의 신미양요 참전에도 영향을 끼친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 아주 자세하게 다뤄져 있다. 배경부터 파견 병력, 전투와 현지 반응 모두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개그 장면으로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가져온 도시락을 화기애애하게 먹으면서 '우리 동네 파바가 더 맜있구만!' 와인도 요즘은 캘리포니아산이 더 나은 듯'이라며 프랑스 요리를 묘하게 디스하는 장면이 있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원역사보다도 이른 을축년에 발발했으며 원인도 천주교인 박해가 아닌 조선을 깔본 벨로네의 무력 시위로 시작되었다. 여기서는 프랑스가 온갖 도의적 감점을 당하게 되는데 문수산을 포격했는데 하필 그곳에 철종의 능이 있어 외국 왕릉을 공격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했고 이후 좌초된 프랑스 군함의 승조원들을 돕기 위해 오던 천주교인들을 프랑스 군이 적으로 오판해 발포하며 프랑스인인 베르뇌 주교가 그 총에 맞아 죽는 사태가 발발한다. 이런 일들을 저질렀으니 프랑스는 조선에 약점을 제대로 잡히게 되었고 결국 이 모든 걸 덮어주는 조건으로 평등 조약이나 다름 없게 조불수호조규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벨로네와 로즈 제독이 책임 회피를 위해 조선을 말이 통하는 준문명국, 반문명국치곤 생각보다 군사력도 강한 국가라고 보고하며 이후 조선에 있어 무형의 자산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