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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신명기의 말씀 4,1-2.6-8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6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7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8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제2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 1,17-18.21ㄴ-22.27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21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7,1-8.14-15.21-2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율법의 올바른 실천>
그 무덥던 찜통더위도 물러가고, 그 세찬 바람과 매섭게 퍼붓던 비도 그치고, 9월의 드높은 하늘의 가을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율법의 올바른 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율법을 주면서 보여주신 사랑과 지혜를 생각하라는 모세의 따뜻한 권고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그것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신명 4,5-6)
모세는 이스라엘은 주님의 법을 지켜 다른 민족에게 하느님 사랑과 지혜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법을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과 축복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실천이 참된 실천이 되기 위한 식별기준을 밝혀줍니다.
첫째 기준은 그것이 '위에서, 곧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야고 1,17)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인간애를 포함하면서도 초월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민주주의가 인류를 구원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둘째 기준은 그것이 말씀의 원리를 따르고 있는지, 곧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야고 1,21)
왜냐하면 바로 “그 말씀에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21) 그러니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라고 말하며,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율법과 말씀의 올바른 실행’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정결법 논쟁을 통해 말해줍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나이 율법을 십계명의 성문율법 외에도 구두율법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613개로 확대하여 지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조상들의 전통’을 겉으로는 지키면서 자신들을 거룩하게 여기는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 곧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을 '저주받은 사람들'(요한 7, 49)이라고까지 하면서 족쇄를 씌워 짐 지우고,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척하면서 다른 이들이 그분을 따르는 것마저 막았습니다(마태 23, 1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마르 7,8)
그러고 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이 나온다.”
(마르 7, 14-2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올바른 실천’을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참된 실천은 법의 원칙에 대한 외면적 준수가 아니라, 법의 근본 정신에 맞게 사는 내면적 삶과 추종입니다.
곧 마음과 행실의 상관관계를 말해줍니다.
이를 흔히 우리는 ‘수행’이란 말로 사용합니다.
행위를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위를 닦는 일은 그 행위를 유발시키는 뿌리인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행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입니다.
바로 그 나쁜 생각이 사람을 더럽히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 ‘겉이 아니라 속을 사랑으로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10)
그렇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실천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실천하더라도 ‘참된 실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아무 것이나 실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각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전통’을 따라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중요한 것은 실천하더라도 ‘빛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요, 사랑하더라도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요한 3,18)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두려워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는 우리>
'직장 상사가 하라는 것은 군소리 없이 하지만, 엄마에게는 함부로 말하면서 엄마의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조폭의 막말은 꼼짝못하고 들으면서, 아버지의 말은 가볍게 넘긴다.'
우리가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왜 이럽니까?
그것은 사랑으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더 풀이하면 사랑으로 하는 말을 사랑으로 듣기보다 강압으로 하는 말을 두려움 때문에 듣기 때문입니다.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고 흔히 말하는데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걸 뒤집으면 법은 주먹보다 멀며, 사랑은 법보다 멀고 주먹보다는 더 더 멉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신명 4,7-8)
그렇다면 하느님은 다른 누구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 하느님보다 주먹을 더 가까이 느끼고 법이 더 가까이 있는 것이며, 사랑의 말보다 주먹의 말을 더 잘 듣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모이고 하느님이십니다.
조폭은 결코 우리에게 가까이 있지 않고 우리에 관한 관심이 도무지 없습니다.
사실 관심이 없다면 관계도 없는 것이고 관계가 없다면 그것이 제일 먼 것이지요.
이렇게 조폭은 우리에게 관심도 없고 멀리 있지만, 우리는 되레 두려움 때문에 주먹을 가까이 느끼며, 그의 말을 듣는데, 이것이 다 우리의 미성숙과 약함 때문입니다.
사실 미성숙하고 약한 사람이 사랑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요한의 서간은 충고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8)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중요시한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마르 7,8)
들은 얘기이기도 하고 저도 경험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오래된 본당 그래서 전통이 있고 뼈대가 있는 본당에 사제가 새로 가면 그 본당 신자들은 본당 사제보다도 본당 원로들 눈치를 더 본답니다.
그래서 신부가 새로운 사목을 펼쳐도 그리고 사목회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원로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자들이 달리하기에 신부들이 애를 먹고, 심지어 교무금을 더 내고 싶어도 원로가 적게 내면 그보다 적게 낸다고 합니다.
아무튼 미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만만히 보고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인 우리는 두려워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을 다스려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며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언했던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고 또 그들의 영성을 살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언젠가 영화의 한 장면을 보았는데 손 잘린 사람이 발가락으로 노름을 하더라고요.
그것은 손이 도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도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 비춰지는 죄짓고 벌 받으러 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끄럽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죄를 지었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죄지은 마음이 가려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손버릇 나쁘다’, ‘손 크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고운 손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손은 고운 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친 손이라도 좋은 일을 하는 손은 고운 손입니다.
사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마음 관리를 잘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잠언에 보면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14,30)라고 적고 있습니다.
속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무엘 상권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주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왕으로 성별한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때 이사이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6,7)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마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하고 질문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7)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당시 조상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사 온 음식, 시장에 다녀온 몸, 그리고 그릇들을 씻었습니다.
위생상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밖에서 부정탈 수 있었던 것을 씻기 위한 정결례였습니다.
돼지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에 손을 대거나 부정한 사람, 즉 나병환자를 만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고, 이런 부정은 물로 씻으면 없어진다고 알고 있었으며, 거룩한 신에게 잘 보이려면 그에 합당한 정결함을 지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성당에 들어올 때 성수를 찍어 기도합니다.
거룩한 하느님 대전에 들어서면서 온갖 악한 생각을 빼어 버리고 거룩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그리고 나갈 때는 거룩해져 나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수를 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아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레위기나 민수기를 보면 피해야 할 금기사항, 부정 탓을 때 회복하기 위한 속죄 절차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민수기 5장,9장,19장), 바빌론 유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고 자신들을 반성했습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던 부정,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부정,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부정을 저질러서 재앙을 겪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부정한 죄를 없애기 위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레위 20,7)는 율법의 요구에 따른 정결법은 점점 확산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정화는 소홀히 하고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 형식에 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화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외적인 형식에 연연해하지 말고 내면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근본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화장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고 멋지게 하느님 앞에 나왔지만, 마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정말 아름답고 예쁜 모습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을 용서받고 주님의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성무일도 시편에 보면 "겉꾸민 우리 위선 흉측하오니 당신의 은총으로 벗겨 주소서. …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 하고 노래합니다.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지만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의 자비가 있기에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얼짱’,‘몸짱’이라는 외면을 가꾸는 데 온갖 노력을 다 쏟습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짱’, 속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아니 방치합니다.
정말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혹 도금이 되었거든 하루라도 빨리 벗겨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로마 1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예수님께서는 전통을 무시하시지 않았고, 다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에 마음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마음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하는 지혜안에 머물기를 희망하며, 주님 앞에서 마음속을 환히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을 빼앗기는 법>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꿔야 거룩해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음은 원하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자기가 신이라 믿고 소유하고 먹고 이기는 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 마음을 없애고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는 일이 구원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
(에제 36,26)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에서도 개구리처럼 착해지고 싶었던 전갈이었지만, 정작 수영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기를 태워주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습니다.
마음으로 자신이 전갈이라 믿고 있으면 아무리 개구리처럼 살려고 하더라도 전갈의 본성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믿는 대로 이뤄집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믿으면 마음이 고쳐집니다.
영화 <김씨 표류기>(2009)는 어떻게 자기 마음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잘리고 애인과도 헤어졌는데 빚 독촉도 심해지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런데 한강 밤섬에 표류합니다.
표류한 김에 사는데 다른 사람 간섭 안 받고 혼자 사는 삶이 즐겁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마음이라는 섬에서 자신이 왕입니다.
그리고 생존에 집중합니다.
김 씨는 짜파게티 봉지를 보고 그것을 만들어 먹고자 합니다.
그를 지켜보던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방 안에서만 살아가는 김정연이라는 여자가 김 씨를 사진기로 보고는 그 섬까지 짜장면을 시켜줍니다.
김 씨는 짜장면을 거부합니다.
그것을 받으면 간섭받아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지어서 결국엔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허무함과 그 달콤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는 중에 여자 김 씨와 소통하며 조금씩 관계를 쌓아갑니다.
결국 섬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는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 김 씨도 집 밖으로 나와 남자 김 씨에게 달려옵니다.
이제 둘은 서로의 섬이 되어줍니다.
갈 곳이 생기자 이제 이전의 자기를 지배하던 섬, 곧 마음을 버리고 탈출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방법은 피를 받음으로써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줍니다.
자녀는 마음으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마음 안에서 살지 않고 부모의 마음으로 삽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려 하고 마음 아픈 일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세계로 성장하며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고 조금씩 하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께 계속 마음을 빼앗깁시다.
그분의 마음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는 나무꾼에게 자기 옷을 빼앗겨 아기까지 낳습니다.
미안한 선녀에게 옷을 내어줍니다.
선녀도 아기 둘을 데리고 올라와 나무꾼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안하여 나무꾼을 하늘로 불러올립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 마음을 빼앗기는 관계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교회 행사를 주도해 나가다 보면 가끔 크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례나 미사의 가장 중심, 핵심, 본질, 주체는 당연히 하느님이시지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강렬한 표현인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언젠가 제법 큰 행사를 한번 주관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할 일이 많더군요.
기획안을 제출했습니다.
승인을 받자마자 행사를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각 분야의 실무자를 선정해 즉시 실무에 착수했습니다.
제 성격상 적당히 하는 것,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됩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행사는 아주 경건하고 아름답게 진행됩니다.
1부 전야제, 2부 미사, 3부 친교의 마당... 행사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피드백을 받아보니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만족이었습니다.
다들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그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이 깊은 하느님 체험을 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 자신은?
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사 내내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행사가 완벽하고 정확하게 끝나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저 일만 죽으라고 했던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정작 제 안에는 아무 변화도 감동도 없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 안에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저 과로에 찌든 한 영혼이 힘겨워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주객이 전도됩니다.
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개인적, 사적, 이기적 욕구나 기대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보다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만 잔뜩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백성의 인도자들이었던 그들은 하느님 보다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율법에, 지극히 세밀한 생활규칙에 더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수도회나 교회 안에도 많은 규칙들, 법조항들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을까요?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을 들으면 보다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규칙들이 왜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규칙들은 사랑 안에서 모든 문제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한 수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하게 질타 당하는 가장 큰 이유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외양은 무서웠습니다.
어딜 가든 율법이란 잣대를 들고 다녔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율법을 어기면 여지없이 율법서를 들이대었습니다.
싸늘한 눈초리, 냉랭한 얼굴, 엄격한 잣대, 호시탐탐 이웃의 실수를 노리는 표정...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1)
예수님의 말씀은 ‘겉만 깨끗하고 속은 깨끗하지 않은’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정결 예식’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 실행한 것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거룩하다’ 라는 말과 ‘깨끗하다’ 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깨끗이 씻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는데, 그게 위선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고, ‘삶’을 깨끗이 해야 한다.”
몸을(몸만) 깨끗이 씻는다고 해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11장을 보면,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37-41)
우리는 다음 말씀도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2,38-40)
‘긴 겉옷’을, 즉 사제복과 수도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온 삶으로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3)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라는 말씀에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일이 연상됩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창세 3,6)
하느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창세 2,16-17).
그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는 선악과 탓일까?
‘먹음직하고 소담스럽고 탐스럽게’ 보인 그 열매의 잘못일까?
만일에 정말로 맛없게 보이는 열매였다면, 하와가 안 따 먹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명령을 어기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런 명령을 하신 하느님 탓일까?
아담과 하와의 죄는 그들 자신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그들 자신들이 지은 죄입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창세 3,12)
이 말은 열매를 준 하와 탓을 하는 말이고, 또 하와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 탓을 하는 말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남 탓’만 하고, ‘외부 탓’만 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과 온 삶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참 좋은 사람들 - '경청, 실천, 순수'>
“주여, 당신 장막에 묵을 이 누구오리까?
거룩한 당신 산에 살을 이 누구오리까?
허물 없이 살아가며 의를 하는 이,
마음 속에 진리를 품은 사람이외다.”
(시편 15,1-2)
오늘 화답송 시편이 누가 주님 장막에 묵을 수 있을지, 주님 거룩한 산에서 지낼수 있을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합니다.
“왜 전부 일본만 가노. 제발 좀 오세요. 심지어 동해도 폭망, 거품이 빠져도 이정도까지!”
새벽 열어본 한 동영상 제목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구호로가 아닌 실력을 키워 일본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건 국수적인 사고가 아니라 애국심의 발로입니다.
우리의 관광지를 이용해 주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일본은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일본관광을 선호하는 까닭은 우리가 불친절한데 저들은 친절하고, 우리가 바가지 요금인데 저들은 정찰제이고, 우리가 불결한데 저들은 청결하다 하니 반성해야 합니다.
고려, 조선 역사를 보면 왜구의 침입은 일상적이었습니다.
임진왜란시 성웅 이순신 장군이 버텨주지 못했다면 조선은 물론 명나라의 중국도 위태했을 것이며, 2차 대전시 중국이 버텨주지 못했다면 미국도 큰 곤경에 처했을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는 청나라를, 러일전쟁에서는 러시아를 이긴 일본은 지금도 늘 경계 대상 1호입니다.
참고로 일본 국적 노벨상 수상자는 무려 31명입니다.
작금의 의료대란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호소도 절절합니다.
“어느 여당 인사의 말이다.
국가를 이루는 3요소가 ‘국민, 주권, 영토’인데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주권이 없었기에 나라가 없었으므로, 8월15일은 건국절이란다.
인용하기에도 민망한 말이라 잠시 주저해 보지만 그럼 지금은 국민이 있는가 묻고 싶다.
국민이 없는 의료정책을 펼치는 이 시국에 과연 나라가 존재하는가?”
오늘은 9월 첫날, 달력을 넘기는 순간 참 많은 과제를 부여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참사람되어 사는 보람과 기쁨을 충만히 느끼는 9월의 시작입니다.
무엇보다 바야흐로 9월은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에 이어지는 대림시기, 참으로 풍요로운 영적수확을 위해 부지런히 성실히 치열히 살아야 할 날들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순교 성인 103위와 순교 복자 124위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굳은 믿음을 본받고자 하는 달이요, 특히 순교 성지 순례를 권하고 싶습니다.
순교적 삶에 항구하는 것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자랑스런 의무이기도 합니다.
제 고향집 충남 예산의 구암리 카페 인근의 솔뫼성지, 해미성지, 신리성지, 그리고 수덕사와 윤봉길 의사 생가와 추사 김정희 생가가 볼만합니다.
교황님의 9월의 기도지향도 절박합니다.
“우리 각자는 지구와 환경재해와 기후변화의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을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세상의 보호를 위해 온갖 개인적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취지의 기도지향입니다.
또 오늘 9월 1일 첫날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기도 합니다.
열정에 넘치는 교황님의 담화문 극히 일부만 소개합니다.
“피조물과 함께 희망하고 행동하십시오.
피조물이 진통을 겪으며 탄식하는 가운데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우리 지상의 삶만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주인이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사랑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우리의 미래, 지극히 복된 종말, 평화 가득한 낙원인 지구가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자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성부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삶을 삽시다.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에, 우리 삶은 하느님을 위한, 인류를 위한,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을 위한 사랑의 시가, 노래가 될 수 있고, 거룩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우리에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과제가 부여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시로, 사랑의 노래로 사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랑하는 하느님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부를 때 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 있느냐?”
그대로 오늘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이 더욱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도록 우리를 북돋웁니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되고 빼서도 안된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모세에 이어 야고보 사도의 거듭된 경청과 실천의 충고가 참 은혜롭습니다.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단숨에 읽혀지는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의 아버지께서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본질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하나될 때 참사람이 될 수 있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을 지니고 살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도 이런 신심의 은총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오늘 몇 현자의 말씀입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기보다 남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도록 마음을 지키라.”
<다산>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그 이유를 살피고, 그가 만족하는 바를 관찰하라.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수 있겠는가?
어떻게 숨길수 있겠는가?”
<논어>
“‘존재하는 것은 나타내는 것이다.’ 히브리 철학자이자 신비가 아브라함 헤쉘의 말이다.
한 인간의 존재는 본인이 알든 모르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그의 언행이 그대로 어김없는 자기증언인 것이다.”
<어느 현자>
답은 단 하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만든 조상들의 전통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이요 말씀입니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오물통과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다음 어리석은 무지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위선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하느님을 참되이 섬기는 것은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심어진 진리의 말씀을 공손이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부단한 말씀을 통한 정화은총이, 성화은총이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주님의 오늘 복음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들에 대해 번호도 달아봤습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오물통같은 마음이요 이런 오물들이 배설될 때 세상은 악취 진동하는 오물통같은 세상이 됩니다.
이런 주님의 진리 말씀을 깨달아 실천해 가면서 날로 정화되어 순수해지는 마음에, 자유로워지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우리 마음의 축소판입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영어 말마디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나를 탓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그만큼 변합니다.
참으로 부단한 하느님 중심의 말씀공부와 실천의 생활화가 절박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오물통 세상을 탓할게 아니라 오물통 마음의 정화와 성화가 우선이요,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마음의 정화와 성화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
부부싸움에서 가장 큰 원인은 “당신은 왜 변하지 않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이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물으니, 결혼과 동시에 그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신 지 40년이 넘으셨으니, 40년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소연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쭤보았습니다.
“40년 넘게 변하지 않으셨는데, 과연 남편분께서 변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불만족은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커집니다.
상대의 변화를 바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자기 배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히 이기적인 감정이지만 피하기 어려운 마음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하면 자기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그래서 이기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이 변화로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40년 넘게 유지했던 자기 모습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변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불행이라는 틀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당신 삶으로 직접 사랑을 보여주셨던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행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변화를 요구합니다.
제발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서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단순히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행위보다 깨끗하고 흠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의 전통과 관습 위에 있습니다.
당연히 하느님 섬기는 행위가 손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자기와 다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다름 아닌 바로 일의 계획과 방향을 세우는 인간의 의식에서 나온다고 하시면서 진정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1독서 신명기 말씀처럼, 오로지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자기의 진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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