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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교구에서는 ‘사제성화의 날’이면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피정 중에 강의를 듣고, 함께 기도하고,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교구장님과 함께 미사로 피정을 마쳤습니다. 20년 전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저에게 ‘사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하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본당신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선배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제가 생각하는 사목에 대해서 발표하였습니다. 오늘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면서 20년 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사목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산보를 하고 있지만 20년 전에도 산보는 제게 유일한 운동이었습니다. 산보 중에 있었던 기억입니다. 점심을 먹고 산보를 가려고 사제관을 나서는데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서는데 초등학교 2학년인 진성이가 성당으로 왔습니다. 진성이는 성당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어린이인데 달리기를 아주 잘합니다. "진성아! 산보갈래!"하니까 진성이는 가방을 교육관에 벗어놓고 곧 저를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큰 찻길을 건너, 비가 온 뒤에 물이 많아진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을 지나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장날이 아니라서 시장은 한산했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는 진성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다시 큰길을 건너 진성이가 다니는 학교엘 갔습니다. 진성이가 우산을 교실에 놓고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개울을 건너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놀다가, 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평소보다 길게 산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진성이가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 저는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시 산보를 가자는 말인가! 진성이는 "산보"라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 줄 알았나 봅니다. 문득, 하느님 앞에 저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진성이처럼 하느님은 어디계시냐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고,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고,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목이라는 것도, 어쩌면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미 사제가 되었으면 어떤 사목자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사목자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꼭 많은 이야길 해야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꼭 먼가를 가르쳐야만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천하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둘째, 사목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들어서 죄인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규정을 따져서 죄를 범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잘못을 비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도록,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과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가라지의 삶이었을지라도 밀이 되는 것입니다.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은 밀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은 밀과 가라지의 경계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옳고 그름을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목이란 용서와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셋째, 사목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분들과 인사도 나누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는데 건회와 진성이가 성당 문으로 뛰어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왜 뛰어올까 생각하면서 물어 보았습니다. 두 친구는 집에서 성당까지 뛰어왔답니다. 두 아이의 집은 장현리이고, 장현리는 차로도 15분은 가야되는 거리입니다. 아이들은 성당 버스를 놓쳤고, 그래서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3시간 30분을 뛰어서 성당에 도착한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찡해집니다. 뛰다 넘어지고, 그리고 또 뛰고 그렇게 성당엘 온 아이들을 생각하니,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을 내는 저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졌습니다. 건회는 현지라는 동생이 있고, 진성이는 민정이라는 누나가 있습니다. 현지와 민정이는 뛸 수가 없어서 장현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건회와 진성이와 성당차로 장현리 건회의 집으로 갔습니다. 두 아이들을 이 저를 보고 너무 반가워합니다. 우리는 함께 성당으로 왔고, 아이들은 2시 30분 군종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그렇게 저에게 감동을 줍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성지 주일의 참 의미를 알려줍니다.
어느덧 주님께 모욕을 주고, 어느덧 주님을 모른 체하고, 어느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목이란 한 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목이란 논에 모를 심는 것과 같이 모를 심었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 그리고 반성을 통해서 결실을 맺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 조재형신부
2021년 06월 11일 금요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대영광송신경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며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사제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찾고자 애쓰시는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입당송
시편 33(32),11.19 참조
주님의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지네.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시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성심을 통하여
저희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기리며 기뻐하오니
이 사랑의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은총을
언제나 가득히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또는>
하느님,
저희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신 아드님의 성심을 보시고
저희에게 무한한 사랑을 인자로이 베푸시니
저희가 그 성심을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며
마땅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르시어, 타오르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신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성도들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빈다(제2독서). 군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온다(복음).
제1독서<내 마음이 미어진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1,1.3-4.8ㅁ-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8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이사 12,2-3.4ㄴㄷㄹ.5-6(◎ 3)
◎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 “보라, 내 구원의 하느님. 나는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해 주셨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리고, 높으신 그 이름을 선포하여라. ◎
○ 위업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이 하신 일 온 세상에 알려라. 시온 사람들아,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
제2독서<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3,8-12.14-19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8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은총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다른 민족들에게 전하고,
9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권력들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1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1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14 이 때문에,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마태 11,29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 알렐루야.
복음<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37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무한한 사랑의 성심을 굽어보시고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속죄의 제사로 받아 주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주님의 축일과 신비 감사송 4 :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예수 성심 대축일)>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7,37-38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또는>
요한 19,34 참조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영성체 후 묵상
▦ 하느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를 위하여 피와 물을 쏟으신 예수 성심의 한없는 사랑을 깨달읍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큰 사랑의 성사로 저희에게 거룩한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저희가 언제나 성자를 사랑하며
형제들 가운데서 그분을 알아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무서운 하느님을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그들에게 수시로 벌을 내리시고 심판하십니다. 금송아지를 보고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느님이시다.’라고 외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시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도 하십니다(탈출 32,25-29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광야에서 불평을 늘어놓는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게도 만드십니다(민수 21,4-9 참조).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시지만 질투하시는 하느님이기도 하셨습니다(탈출 20,5; 34,14 참조). 그리고 하느님 분노의 절정은 왕국의 멸망으로 구체화됩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분,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구약의 역사 안에서 자비와 분노의 감정을 모두 표현하셨습니다.
그럼 어떤 하느님의 모습이 진짜일까요? 하느님의 진짜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당신의 외아드님을 인간의 손에 맡기십니다. 아울러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그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면, 신약에서 분노와 심판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그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을 바치시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쏟으십니다. 그분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언어로 담기에는 너무나도 크신 사랑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전해지는 따뜻한 축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