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김혜경
푹푹 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평상에 둘러앉아 먹는 수박은 꿀물보다 더 달콤하
게 갈증을 해소 시켜줬었다. 다른 형제들이 더 먹을세라 어적어적 배가 불룩하도록 베
어 먹고도 항상 아쉬움이 남았었다. 동생과 수박씨를 추려 화단 귀퉁이에 심어 놓고는
어서 새싹을 틔워 탐스런 수박이 주렁주렁 열리길 기다렸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뻐꾸기 울음소리가 창을 넘어와 구슬픈 여운을 남겨 주더니 지금
은 극성스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만 한 여름의 정적을 깨고 집안으로 파고든다. 쨍쨍
땅을 갈라놓는 뙤약볕에 놀이터에는 빈 그네만 멀뚱히 아이들을 기다리고 베란다의 화
초들은 축 늘어져 낮잠을 잔다. 빈둥빈둥 방구석을 뒹굴다 웃자란 화초의 순을 잘라줘
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지가위를 찾다가 비닐봉투 속에 쌓여있는 단풍나무 씨앗을 발
견했다.
지난해에 항상 붉게 물들어 있는 단풍이 너무 고와서 산에 심을 요량으로 공원에서 주
워 온 것이다. 바람이 부는 데로 부메랑이 빙빙 허공을 도는 것처럼 날아가는 씨앗의 팔
랑거림도 어린 날의 추억을 되살려준다. 학교 운동장가에서 바람 부는 날 우수수 흩어
져 내리던 눈꽃 같은 아름다움. 씨앗을 잡으려 뛰어다니던 아련한 추억이 묻어난다.
봄이 되면 촉을 틔워 잘 길러 보고 싶었지만 올 봄에 심지 않았다. 어린시절 화단에
묻어 두었던 수박씨는 새 순이 나긴 했지만 끝내 수박이 열리지 않았다. 철이 지났기 때
문이기도 하지만 더위가 사그라질 무렵이 되면 나는 수박씨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봄이 되면 아름답게 꽃이 핀 새 화분을 사들이고 꽃이 질 무렵이면 천덕꾸러기 화분이
되어 베란다 구석으로 치워두기 일쑤이다. 식물이 새 순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
는 것도 모두 소중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함인데 나는 자주 식물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꽃 화분이 내게 오기까지도 어쩌면 전생의 긴 인연이 있었을 것이
다 인간과 화초로 만났지만 전생에서는 가족이었을지도 아니면 내가 화초였고 화초는
나를 지극히 아껴주던 섬섬옥수의 귀부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뿐만 아니라 동물과 사람, 식물과 사람의 인연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으리라 이승에서의 찰나의 인연이 전생에서는 억겁의 인연이라는 말을 들먹이
지 않아도 하찮은 만남이라도 깊은 연이 닿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변사람들과
의 인연이 부담이 될 때가 많이 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악연인 것 같은
사람과 오랫동안 부대껴야하고 평생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을 사람을 평생 보며 살아
야 할 때가 있는가하면 곁에 두고 늘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고 사는 인연도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은 인연을 만들며 살아온 것 같다. 가족을 만들고 이웃과 친구
를 만나고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고 강아지를 기르고 아름다운 화초를 기르고 무수히 많
은 인연을 만나며 살았다. 그러나 인연이란 꼭 곁에 두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세가 들어 갈수록 어머니는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나누어 주며 사신다 이제 더 이상
욕심을 부려 소유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소유하고 있던 것들도 정리를 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신다. 갖고 싶은 것도 없고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들을 부둥켜안고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어머니가 소중히 간직하셨던 우리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도 다 나누어
주시고 더러는 불태워 버리신다 會者定離를 이름이신가 더 이상의 소유도 추억도 만
들지 않으리라 하신다.
단풍나무 씨앗을 심지 않은 것은 어쩌면 더 이상의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정성들여 발아를 시키고 옮겨 심고 가물면 물을 줘야하고 칡을 걷어내야 하고 애정을 기
울여야하는 인연들을 이제는 만들고 싶지 않다. 단풍나무에게 내가 생명을 주었다면 잘
살아 갈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하겠지만 그럴만한 여력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다. 이제사
친구를 사귀어 그를 알아가야 하고 좋은 벗이 되기까지 이해하고 때론 부딪쳐야하는 과
정을 겪어나갈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처럼 단풍나무와 나와의 인연은 만들지 않는 편이
좋을 성 싶었다.
요즘은 나도 지난 일들을 지워가며 산다 일기장도 태우고 수북한 편지도 태우고 사
진첩도 대충 정리를 한다. 내게는 아름답고 소중한 과거의 추억이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의미 없는 것들인 것이다 10년 앞을 보는 사람은 나무를 심고 100
년 앞을 보는 사람은 글을 쓰고 1000년을 내다보는 사람은 낮잠을 잔다고 한다. 애착이
나 연민의 끈을 놓고 모든 만남을 놓아줄지 아는 인연으로 여기라는 뜻일 것이다. 한 때
는 네 마리씩이나 기르던 강아지도 이제는 기르지 않는다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
던 아사녀(강아지 이름)의 발버둥이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차라리 나와 만나지
않았으면 헤어짐의 고통도 없었으리라. 섣불리 인연을 만들고 소중함을 알지 못한 채
버리는 경솔함을 더 이상 범하고 싶지 않다. 진정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벗도 만
들지 말아야 하고, 끝내 거두어주지 못한다면 화초나 나무와의 인연도 만들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인연이란 만남의 소중함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의 소중함이니까.
단풍나무 씨앗을 베란다 밖으로 후루룩 풀어 놓았다. 흩어져 나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제 몸 뉘일 곳을 찾아 날아간다. 어디선가 나보다 더 좋은 인연을 만나 붉디붉은 아름다
운 단풍나무로 자라리라.
2005/21집
첫댓글 섣불리 인연을 만들고 소중함을 알지 못한 채
버리는 경솔함을 더 이상 범하고 싶지 않다. 진정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벗도 만
들지 말아야 하고, 끝내 거두어주지 못한다면 화초나 나무와의 인연도 만들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인연이란 만남의 소중함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의 소중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