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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2,10ㄴ-16
형제 여러분,
10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1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권위 있는 말씀>
'희년 선포'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이 전하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어촌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 일컬어지는 시작 부분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루카복음에 나오는 21개의 이적 중 첫 번째의 이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이미 앞에서 ‘예수님 탄생 예고 장면’(1,32.35)과 ‘세례 방면’(3,22)에서 선포되었는데, 여기서는 마귀들의 입을 통해 선포됩니다(4,34.41).
그런데 목격자들이 놀란 것은 구마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권위 있는 한 마디 말씀,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는 말씀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쳤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습니다(루카 4,35).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고,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인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곧 희년 선포와 마찬가지로 원죄 이전의 에덴으로의 복귀를 보여줍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은 해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몹시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
(루카 4,36)
'권위(exusia)'란 ‘힘’이란 뜻으로, 발설된 말씀이 말씀한대로 이루어지는 힘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 곧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구마자들과는 달리,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루카 4,34)
주님!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으로 새로 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소서.
하여,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현세적 인간과 영적인 인간>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두 부류의 인간을 얘기합니다.
현세적 인간과 영적인 인간을.
현세적 인간과 영적인 인간은 보통 이렇게 구분합니다.
현세적인 인간은 말 그대로 현세를 지향하고, 영적인 인간은 현세를 초월하여 저 위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현세를 삽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현세적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마땅히 현세를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현세를 열심히 살지 않으면서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예를 들어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처자식 먹여 살리는 데 소홀히 하면서 온종일 기도하는 사람을 우리는 현실도피자나 건달이나 한량이라고 하고, 재산을 몽땅 교회에 갖다 바치고 가족을 팽개친 사람을 광신도라고 하지, 그런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착과 추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실과 이상이 있는데,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고 이상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상에 집착하는 사람은 이상에 매달려 있으며 현실은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1층에 있는데 100층을 보며 자기는 100층에 있어야 한다고 이렇게 안달만 하고 있으면 이것은 집착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1층에 있음을 인정하고 차근차근, 그러니까 한 계단 한 계단 100층을 향해 오르면 그것은 추구입니다.
반대로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에 집착하여 이상은 추구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현실을 열심히 살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정도 얘기하면 현세적 인간과 영적인 인간의 차이점이 나왔습니다.
영적인 인간은 현세를 열심히 살지만 현세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고, 늘 하늘나라를 그리워하고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갑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땅에서 하늘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세적 인간은 하늘은 안 보고 땅만 보는 사람이겠습니다.
너무 열심히 살다가 보니 하늘이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바오로 사도가 영적인 인간이라고 함은 성령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현세적 인간은 그 반대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오늘 이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하늘도 못 보고 사는 나는 아닌지.
아니, 의도적으로 하늘을 안 보고 사는 나, 그러니까 일부러 하늘을 외면하고 사는 나는 아닌지.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심을 극구 거부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루카 4,34)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지 자기의 주님이 아니고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그러니 주님의 오심은 자기에게 멸망일 뿐이니 당신이 아무리 하느님의 아들이어도 제발 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니, 주님께서 나를 멸망시키러 오셨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튼 더러운 영은 더럽게 현세를 집착하는 영입니다.
혹시 성령이 아니라 이 영이 내게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빛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어느 날 ‘방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 이리 어둡지? 안 그랬는데… 그리고는 그만이었습니다.
전구 두 개가 켜져야 하는데 한 개가 켜지지 않았습니다.
전구가 하나였다면 어둠이 짙어서 금방 전구를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준비할 수 있었으니 곧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라도 얼른 전구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빛을 지니지 못하였으니 문제입니다.
물론 희미한 빛을 지니고 있어서 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주 큰 어둠이라면 빨리 손을 쓸 텐데 희미한 빛이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어두울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4. 35) 명령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 10장 17 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 관리하고 키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악마의 괴롭힘을 받으셨지만 절대로 휘말려 들어가지도 않으셨고 패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으로 무장하여 악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 4,7-8) 하고 말합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6-8)
예수님께서 악령을 꾸짖으시니 사람을 내동댕이치고 떠나갔습니다.
더러운 마귀는 나갈 때도 못된 짓을 하고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여 더러운 영들을 쫓아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누가 가장 마귀 같은 사람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귀가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은 마귀의 정체를 알아보려 합니다.
마귀는 일단 예수님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능력에 휘둘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들이 느끼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이기는 쾌감’입니다.
이는 모든 죄에 다 들어있고 모든 죄의 밑바탕입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은 자연을 보고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양심을 보고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핑계로 믿지 않습니다.
벌써 여기에는 하느님을 이기는 즐거움이 스며 있습니다.
그런데 더 마귀와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이기려는 존재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팔아넘겨 죽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쾌감은 얼마나 클까요?
물론 그 쾌감이 자기를 마귀로 만든다는 것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진짜 마귀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으면서 교회를 이기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정통 가르침인 지옥과 연옥 등을 부정합니다.
하느님이 자녀를 만들고 불지옥에 보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2,000년 동안 믿어오던 것보다 자기 혼자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깁니다.
여기서 느끼는 승리의 쾌감은 매우 클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처럼 결국엔 교회 전체를 분열시키는 악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심을 알면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이 변하기를 원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느님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마치 내 뜻이 하느님의 뜻보다 더 나를 위해 옳다고 믿는 것처럼.
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이신 김학배 안젤로 신부가 PBC 강의에서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임신한 자매가 기도해 달라고 오셨다고 합니다.
무슨 기도를 해 드려야 하느냐고 묻자 자기가 딸이 여섯인데 꼭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청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이 안 믿는 사람들인데 이번에도 딸이면 자신까지 아예 성당에 못 나오게 될 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성별을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어쨌건 신부님은 기도해 주었는데 다행히 아들을 출산해서 온 시댁 식구들도 아기의 세례식 때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20년이 지나 신부님이 피정의 집에 있을 때, 그 자매님이 순례자들과 함께 오셔서 너무 반가웠는데, 그 자매님은 슬픈 표정으로 면담을 요청하였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부님이 기도해서 낳은 아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큰 사고들을 많이 쳐서 이제는 그 아이가 온 집안의 걱정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것도 청하지 말라는 말인가요?
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결정은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악마가 아니라 천사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 한 자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매일 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났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뚜껑이 열렸을 텐데 참아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하게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도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주님께서 뜻을 바꾸기를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힘에 내가 변화되기 위해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악마의 성향에서 천사의 성향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궁에서는 그분 뜻에 의해 내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이지 부모가 내 뜻대로 변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일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던 사랑스러운 교황님>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얼마나 탁월하고 출중한 인물이었던지 이름 앞에 대(大)자를 붙입니다.
성인 중의 대 성인, 교황님 중에 대 교황님으로 불릴 만큼 교회사 안에 그분이 남긴 족적이 정말 탁월합니다.
그는 얼마나 명석했던지 서방교회 4대 교부 가운데 한분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540년경 로마에서 출생합니다.
그의 가문은 정말 대단한 귀족가문인 동시에 부유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혈통만 훌륭한 귀족가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측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훌륭한 가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었던지 교황님을 두 명(펠리체 3세 교황, 아가피토 교황)이나 배출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일찌감치 법학공부를 시작한 그레고리오는 572년 공부를 끝내고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로마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당시 시국은 어수선하기가 극에 달했고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로마 총독 시절 그레고리오가 직면했던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해나가기 위해 흘렸던 땀은 그가 나중에 교황직을 수행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로마 총독이라는 직책은 그레고리오를 결코 만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첼리오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레고리오가 체험했던 짧은 수도생활은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깊은 묵상 중에 선물로 받았던 소중한 하느님 체험,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던 가운데 얻었던 충만한 기쁨과 희열, 열정적인 기도 분위기는 그가 나중에 수많은 사목적 걱정거리들을 껴안고 살아야 했던 교황 시절 영원한 향수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꿈결같이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였습니다.
펠라지오 교황님은 그를 부제로 서품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교황대사로 파견합니다.
그곳에서 로마와는 사뭇 다른 비잔틴 문화를 이해해가면서 열정적 사목체험을 해나가던 그레고리오였는데,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교황님은 그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 당신의 비서로 임명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모셨던 펠라지오 교황님이 당시 창궐했던 페스트에 걸려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러자 즉시 그레고리오를 후임 교황으로 임명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레고리오는 이리저리 도망까지 다니며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백성들의 요구를 마냥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교황직을 수락하고 590년 교황좌에 오릅니다.
착좌하자마자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즉시 사목에 뛰어듭니다.
사회 일이건 교회 일이건 상관하지 않고 탁월한 능력을 선보이며 수많은 일들을 척척 해나가셨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쇄신을 위해 800여 통이나 되는 사목서한을 썼습니다.
각 교구 주교들이나 사제들, 아빠스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수시로 전문가적 자문을 구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교황님께 편지를 썼고, 교황님은 매일 수많은 질문들과 산적한 고민거리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지혜로운 평화의 전도사였습니다.
당시 비잔틴 제국과 롬바르디아, 이탈리아 사이 미묘한 신경전, 실제적 국지전이 벌어지곤 했는데,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그들을 착한 목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 사이에 형제적 친교, 평온한 동거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의 회개, 여러 유럽 국가들, 하느님을 믿지 않은 수많은 이교도 백성들은 교황님에게 있어 끊임없는 기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사목적, 신앙적, 영적 측면에서의 아버지이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사회 변화, 사회 개혁의 주인공이셨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까 하는 걱정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지나친 일과 일상적 과로로 인해 교황님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갔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하느님 안에 푹 잠긴 인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언제나 그의 영혼과 내면 안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힘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던 절망의 시대 그는 평화를 건설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백성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던 사랑스러운 교황님이셨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믿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1)
오늘 복음에서 ‘권위’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힘’에 자신들이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율법학자들과 달리’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22).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고, 자기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로 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고, 당신 자신의 말씀으로만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복종하고 떠나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래서 자신들이 느낀 그 힘이 실제로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또는 자신들이 느낀 것이 그냥 느낌이 아니라 실제 힘을 체험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한 일은, 예수님 말씀의 힘은 곧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몹시 놀랐다는 말만 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놀라기는 했는데, 아직은 예수님을 믿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어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안 믿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믿게 됩니다.
3)
여기서 마귀가 하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그것들은 원래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마귀가 사용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호칭을 흉내 낸 것인데, “당신은 나자렛 출신인 ‘사람’일 뿐이다.” 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우리가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은 상관할 권한이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 상관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고, 특히 마귀들을 인간 세상에서 쫓아내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는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이고, 이 말도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데, 당신은 나를 쫓아낼 수 없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고, 이 말도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이 아니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게 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 존재입니다.
그 점에서도 예수님을 안다는 마귀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이 말도 역시 “당신은 사람일 뿐이다.” 라는 의도로 한 말이고, 그래서 거짓말입니다.
4)
“조용히 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귀의 입을 아예 막아버리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선포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고, 섬기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또는 마귀에게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만일에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그러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원래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이고, 마귀들은 그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합니다(루카 8,31).
마귀들도 두려워할 정도로 무서운 곳이니, 인간들에게는...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착한 목자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 '종과 섬김의 영성'>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시편 23,1)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각별한 인연의 중요성 때문에 ‘기념일’이 아닌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축일’로 지냅니다.
베네딕도 성인을 만난 적은 없지만 동시대 분으로 성인을 참으로 흠모하여 ‘베네딕도 전기’도 썼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 하느님과 이웃을 섬김’에 있어 이분들을 능가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갈망의 사람, 배움의 사람, 섬김의 사람으로,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느님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걸작품에 속하는 분들입니다.
두 분이 바로 중세초 혼란기에 있던 유럽을 구했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누구보다도 수도생활을 사랑하여 자기 집을 수도원으로 만들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평생 수도원에서 하느님만 섬기며 살려했던 분인데, 교회에 순종하여 섬김의 교황직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두 분을 길러낸 하느님 솜씨에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마음입니다.
교황님이 참으로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천재인지 그 업적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황직만 해도 벅찼을 텐데 영국에 선교사들 파견, 야만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로마 수호, 그리고 방대한 저술활동을 보면 도대체 어느 시간에 저렇게 많은 일을 하셨는지 정말 불가사의의 르네상스적 인물입니다.
다음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는 최상에 속하는 분같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는 자는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다.
곤경에서 배우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고 곤경에서 배우지 않는 자는 최하등이다.”
<논어>
최상의 타고난 것에다 부지런한 노력까지 더하니 천하에 당해낼 자 없을 것입니다.
전례 개혁도 독보적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물론, 미사 중 빵 나눔 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교황님의 창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정말 질그릇 속에 엄청난 하느님의 보물을 지니신 분입니다.
이 성인 교황뿐 아니라 우리 역시 질그릇들 속에 엄청난 보물을 지니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선 안됩니다.
성 예로니모,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큰 대(大)자가 붙는 교황은 대 레오 교황과 더불어 둘뿐입니다.
교황 재위 14년 동안이지만, 교회 발전과 중세 교황직의 발전에 영향은 멀리멀리 미치기에 대 교황이라 불립니다.
그 옛날 분이 흡사 현대인처럼 느껴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늘 현존하는 분처럼 느껴지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교황님입니다.
성녀 모니카의 아들이 성 아우구스티노였듯이, 성녀 실비아의 아들이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요, 또 생각나는 성녀 헬레나의 아들, 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얼마나 하느님을 잘 섬기며 돌봐드렸는지, 선종하자 얼마 안되어 신자들의 쇄도하는 요구에 시성되었고, 묘비명도 '하느님의 집정관(Consul Dei)'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대로 일치되는 참으로 ‘종과 섬김의 영성’의 표본이 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흡사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문서에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라는 칭호를 사용한 분입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으로 이해한 참 멋진 교황이며, 후임 교황들 역시 이 칭호를 즐겨 사용하게 됩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같은 어원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에는 바로 섬김의 모범인 주님이 계심을 깨닫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려고 오신 분이요, 이런 주님을 섬길 목적으로 생긴 것이 베네딕도 수도 공동체이기에,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들뿐 아니라 종과 섬김의 영성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복음적 영성이요, 우리에게 직무가, 권위가, 여정이 있다면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여정이 있을 뿐이겠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섬김을 배워가며 살아가는,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의 삶입니다.
순교자 성월이 시작되자마자 9.2-9.13일까지 제45차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4개국(인도네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동티모르, 싱가포르) 해외 사목 순방길에 오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섬김의 직무에 열정을 다하시는 충실하신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저보다 무려 13세 연상의 88세 고령이나 영성은 '영원한 청춘'이요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분발하게 합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그의 생애 대부분 수도생활 초기 지나친 고행 생활로 통풍과 소화장애로 고통을 겪었지만 지적으로는 끝까지 활력넘치는 삶이었으나, 선종 몇 년 동안은 침대에 누워 극도의 병고중에 지냈습니다.
604년 선종전 교황님의 일기에 나와 있는 기록의 상황도 눈에 선합니다.
599년 일기에는 “열 한달 동안 나는 거의 침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통풍과 고통과 근심들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매일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다.” 라 썼고, 600년에 일기에는 “나는 근 2년 동안 침상 위에 매여 있었다. 통증이 너무 괴로워서 축일에서 조차 세시간 동안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가 버겁다. 나는 매일 죽음의 문턱에 서고, 매일 그 앞에서 내쳐진다.”고 적었으며, 601년 일기에는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 썼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한 교황님의 마지막 고통의 생애가 순교자 성월 9월에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전구가 우리 모두 9월 순교자 성월,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이 이 몸을 따르리니,
오래오래 주님 궁에서 사오리다."
(시편 23,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일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성령께서 함께 하는 것>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로 간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너희에게 ‘협조자’이신 진리의 영이 함께 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께는 새로운 계획이 있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육체’의 옷을 입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영인 ‘협조자’이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더욱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강림의 생생한 현장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굳셈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지혜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면서 제자들은 말씀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저도 성령의 은사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1992년입니다.
새벽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교우분이 아프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준비해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자매님은 하혈을 많이 하셨고, 의사 선생님은 힘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드리면서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자매님은 사랑하는 딸의 첫 영성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32년이 지났지만, 저는 그날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1994년입니다.
패혈증으로 입원한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기 전에 저는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형제님의 가슴에는 패혈증보다 더 심각한 원망과 분노가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원망과 분노도 사라졌습니다.
용서와 사랑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드리면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형제님은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주일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부족한 제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도, 허물 많은 제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모두 성령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고, 보살펴 주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주변을 보면 성령과 함께 지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생각이 바른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봉성체를 하려고 나서는데 자매님 두 분이 제게 부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장 투석하는 어르신이 있는데 함께 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이 생일이라, 간단한 음식을 준비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봉성체 가는 어르신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마음이 통하니 뜻도 통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르신에게 같이 갔습니다.
저는 성체를 모셔 드렸고, 자매님들은 어르신의 생일잔치를 해 드렸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교우들이 따뜻한 마음을 모았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간병하는 자매님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서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병원비를 돕고 싶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작은 정성을 모아서 전달해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을 뛰어넘는 협조자이신 성령은 따듯한 사람들의 마음에 함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면, 내가 양심의 부끄러움을 알고 뉘우치고 있다면, 욕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고 있다면, 사람의 일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성령께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말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주의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말실수를 해서 상대에게 아픔을 줄 때가 많습니다.
나쁜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말실수는 너무나 자주 이루어집니다.
마트에서 우연히 아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성당에 오랫동안 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청년이었는데 결혼했다고 신앙생활을 멈춘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당 나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이 청년도 알겠다면서 이제 열심히 다니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얼마 뒤, 이 청년의 친한 친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의 아이가 아파서 너무 힘들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시로 병원 응급실을 갈 정도로 아프고 약해서 그렇게 좋아하는 성당도 제대로 못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성당에 나오라는 말만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싶었습니다.
이 청년을 위한 말이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저의 말실수였습니다.
곧바로 전화 걸어서 사과했지만 저를 만난 이후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은 과연 어떤 말이 되어야 할까요?
‘말실수’에 해당하는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랑의 말이 되어야 할까요?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 죽이는 말이 아닙니다.
대신 구원으로 이끄는 살리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가장 유익한 말이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데 이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을 없애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어떤 타협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말씀은 악을 멸망시키고, 사람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악을 따르면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죽이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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