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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3,1-9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8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꾸짖으시어' 몰아내십니다.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실 때는 '손을 얹으시고'(루카 4,40), 마귀를 쫓아내실 때는 '꾸짖으셨다'(루카 4,41)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병자들에게는 측은히 여기시지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은 꾸짖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막은 이유를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됩니다.
곧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솟아오르게 하시고,
당신이 주신 사명이 제 삶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린토1 3,1)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의견이 같은 사람하고만 친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과는 원수지간인.
그래서 원수 사랑은 꿈도 못 꾸고, 내 편과 네 편으로 파당을 만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당신에게 오라는 주님은 좋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과 나누고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은 싫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시는 주님은 더 싫은.
그렇다면 영적인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어른은 이 반대이겠지!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해야 하지만 현실은 녹녹지 않습니다.
사랑과 좋아하는 감정을 착각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기에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때야말로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때가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칭찬을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습니다.(루카 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33) 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
(이현주)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 파악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미사 끝나고 갈 때의 기분은 어때야 할까?>
며칠 전에 노숙자를 위한 성남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김하종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를 통해서였는데, 저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 봉사할 기회가 없었기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봉사를 몇 번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노숙자들에게 밥을 준다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분들이 다 고마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사제로서 봉사하면서 영광을 추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이 봉사하는 분들이 오래되었다고 자기 자리에서 텃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숙달되지 못한 저는 약간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봉사가 금방 지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하종 신부는 어떻게 40년 가까이 그런 봉사를 이어가며 “나는 봉사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노숙자들이 싸워서 말리다가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았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노숙자에게 손을 물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여덟 번 그들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합니다.
‘내가 몇 년 동안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저와 김하종 신부님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저는 봉사하는 목적을 제가 정한 것이었지만, 김하종 신부님은 사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그 사명을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다가 새벽에는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군중이 찾아와서 떠나지 말고 더 머물러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파견’입니다.
기도는 파견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파견받으면 봉사와 사랑에 지치지 않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한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아무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하였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 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받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미사 끝나고 성당 밖으로 나갈 때의 기분은 이래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후에 “자 일어나, 가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아야 합니다.
미사 후에 ‘오늘은 무엇을 하도록 주님께서 파견하실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미사는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의 상징입니다.
모든 기도는 그렇게 끝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휴식이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병고를 통해서도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병고가 찾아와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분들, 얼마나 고통이 크십니까?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때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 크게 한번 아파봐서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선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내가 약해졌다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열외가 잦아집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자주 위급상황에 빠지다 보니 자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병고를 하루하루 상해가는 내 몰골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합니다.
투병하느라 내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이 올스톱 됩니다.
가장 괴로운 일은 아무래도 세상과 인간으로부터의 점점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우들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치유일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자들, 불치병 환자들에게 치유란 단어처럼 반가운 단어가 또 있을까요?
이런 이유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신경 쓰셨던 부분이 바로 치유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시급한 필요성에 우선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수제자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의 장모!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몬의 장모 입장에서 예수님은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시몬을 빼앗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딸을 생과부가 되게 한 원인 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위 시몬과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장모 입장에서 열불나게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특별한 작업을 하십니다.
열을 꾸짖으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던 펄펄 끓는 열까지 호통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조금 전까지 꼴 보기조차 싫은 예수님이었는데 즉시 태도가 바뀝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모의 열병뿐만 아니라 억울했던 마음까지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 열병 치유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정성껏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오랜 병고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환부를 가감 없이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오랜 병고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아가면 좋겠습니다.
끔찍한 병고 한가운데에서 매일 부르짖고 견뎌내면서, 개인적으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병고를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고, 단단한 각오를 하고, 죽기 살기로 병고와 맞서 싸워 이겨내면서, 그 병고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더 이상 어찌할 바 없는 상황 앞에서 그런 힘겨운 상황 앞에서, 그런 끔찍한 현실조차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부단히 주님 자비와 섭리의 손길에 하루하루를 맡기는 것, 그것 역시 하느님을 증거하는 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몸의 건강’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1)
'예수님께서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만물’이라는 말에는 당연히 ‘병’도 포함됩니다.
이 말은 어떤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루카 7,7-8)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에도, 마귀를 쫓아내실 때에도,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실 때에도, ‘말씀만으로’ 하셨습니다.
그 일들은 모두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2)
41절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마귀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주님으로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마귀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특히 마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뿐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아예 말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마귀들의 말은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서 그것을 고백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마귀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려고 그 말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이지, 하느님은 아니다.” 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의도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3)
사람들이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예수님을 붙든 것은 그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면서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해 주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붙든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라는 말씀의 ‘다른 고을에도’ 라는 말은 "이곳에서 한 것처럼 다른 고을에서도 해야 한다." 라는 뜻이고, ‘이곳에서’(카파르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곧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복음 선포를 하려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 자체가 복음 선포였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에게 ‘몸의 건강’만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온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몸의 건강’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일 뿐이고, 그것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몸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의 치유’는 ‘영혼 구원’을 더 잘 받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병고에서 해방된 뒤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된 사람도 많지만, 병을 고친 뒤에 그냥 떠나버린 사람도 많습니다.
몸의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예수님을 떠나버린다면, 그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뿐입니다.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7-19)
4)
44절의 ‘유다의 여러 회당’은 북부 갈릴래아 지역과 구분되는 남부 유다 지역의 회당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의 회당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중심의 삶 - '하느님 나라의 비전, 치유, 분별의 지혜'>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 보신다.”
(시편 33,12-13)
세월 흘러 세속화 되어 갈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새벽 유투브 동영상 뉴스를 얼핏 보니 3대 사찰 중 하나인 가야산의 해인사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들었다 하며 대부분 사찰이 그렇다 합니다.
종교가 본연의 사명을 잃고 속화되어갈 때의 자업자득이겠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 공통적 현상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하느님 중심의 삶'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팔십억 명의 손가락질은 피할 수 있어도, 내면에 있는 부끄러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다산>
그 누구도 가장 가까이 내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어디로 가도 나보다 먼저 와 기다리시는 하느님입니다.
“열 눈이 보고 열 손이 가리키니 무섭구나.”
<대학>
열 눈이, 열 손이 상징하는 바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입니다.
새벽 수도원 숙소의 문을 열면 전개되는 풍경은 늘 새로워 흡사 하느님을 뵙는 듯 저절로 나오는, 며칠전 인용했던 고백시입니다.
“문 열면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
물론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이 가리키는 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모시고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입니다.
삶의 중심에, 치유의 중심에 하느님이,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 자체가 힐링이자 치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힐링의 집이라 부릅니다.
주님을 만나는 미사보다 더 좋은 힐링의 치유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치유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심을 보여줍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중요한 사실은 치유된 시몬의 장모는 즉시 주님의 일행을 섬기는 시중드는 일에 몰입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이웃을 섬기라 있는 치유의 건강임을 배웁니다.
이어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니 예수님은 명실공히 치유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시니 마귀들도 소리치며 도망갑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왕성한 치유 활동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예수님 삶 중심에 늘 자리하고 있던 ‘외딴곳’입니다.
제 외딴곳은 성전에 붙어있는 집무실입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예수님의 외딴곳은 아버지와의 만남인 기도터이자 쉼터요, 삶의 중심이자 전체를 멀리 깊이 내다보는 초월적 거점입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은 삶의 중심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자신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새롭게 확인했음이 분명합니다.
자기에 집착하는 군중들을 홀연히 떠나 전도 여행에 복음 선포의 순례길에 오른 주님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모두의 근원적 갈망이, 목마름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만이 참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되어 살 수 있고, 이런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코린토 신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질책이 참 적절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분별의 지혜는 바로 주님 중심의 삶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편인가 아폴로 편인가 편가르기 하는 육적이며 속된 신자들을 향한 현자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아폴로와 나 바오로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이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이처럼 상호보완의 조화롭고 평화로운 질서의 교회공동체요, 주님 중심의 삶에서 바오로 사도의 이런 참 좋은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치유와 분별의 지혜 은총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시편 33,20)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확실한 방향 설정>
자동차에는 많은 기능이 있습니다.
비가 오면 유리창을 닦아주는 와이퍼가 있고, 유리창의 먼지를 벗겨주는 워셔액 분사기가 있습니다.
냉난방을 조절하는 에어컨도 있고, 시트의 온도를 조절하는 열선도 있습니다.
내비게이션도 있고, 속도를 조절하는 쿠르즈 컨트롤도 있습니다.
방향을 유지하는 자율 주행 장치도 있고, 차량의 상태를 알려주는 계기판도 있습니다.
차선을 변경하는 깜빡이가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대부분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입니다.
그런데 깜빡이는 운전자는 물론 주위에 있는 차를 위한 기능입니다.
옆 차선의 차가 나의 차선으로 오겠다고 신호하면 나는 속도를 줄여서 올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내가 옆 차선으로 가고 싶을 때 신호하면 뒤에 오는 차도 속도를 줄여서 배려해 줍니다.
비상등도 있습니다.
양쪽 깜빡이가 모두 켜지는 상황입니다.
앞의 차가 비상등을 켜고 있으면 속도를 줄이고, 뒤에 오는 차를 위해서 똑같이 비상등을 켭니다.
그렇게 하면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뒤에 차가 있든 없던 상관없이 방향을 바꾸려면 깜빡이를 켜는 습관을 익히면 좋습니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면 위험하기도 하고 짜증이 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깜빡이는 중요합니다.
깜빡이가 필요한데 지켜지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저는 국회에서 그런 모습을 종종 봅니다.
증인을 불러놓고 질문하면서 증인의 답변을 잘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증인이 답변하는데, 큰 소리로 윽박지르기도 하고 야단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원이 질의하는데 상대 당의 의원이 끼어들기도 합니다.
차가 엉켜서 교통의 흐름이 엉망이 되는 것처럼 국회의 운영이 난장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학급회의 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회의할 때도 가끔 깜빡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목소리가 큰 분들이 있습니다.
오랜 경험과 연륜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회의 중에 가끔 안타까운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예전에 해 보았는데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힘만 들고 효과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분위기가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진행자는 방향을 정해 주면 좋습니다.
먼저 충분히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 좋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방향을 정해주고 있습니다.
코린토인들 사이에 차가 엉켜서 오도 갈 수 없는 것처럼 분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방향 설정은 없습니다.
이런 방향을 망각하면 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곤 합니다.
성직자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등대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파수꾼은 악의 세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씀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천상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수도자의 침묵과 기도에서 믿음의 향기, 희망의 향기, 사랑의 향기가 나와야 합니다.
교우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교우들은 말과 행동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키우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늘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사랑 실천을 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에 갑곶성지에 있을 때의 겨울이 생각납니다.
갑곶성지는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너무 추웠습니다.
그래서 숙소의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꼼꼼하게 살펴보니 문틈으로 또 창문 틈을 통해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풍지를 붙이고 비어있는 틈들을 모두 막았습니다.
그런데도 추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을 쓰자 집이 따뜻해지고 아늑해졌습니다.
무엇일까요?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난방비 걱정에 얼지 않을 정도로만 온도를 낮춰서 살았거든요.
그래서 그토록 추웠던 것입니다.
보일러 온도 높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들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른 시일 안에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관계 회복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랑이 없다면 근본적인 회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을 뿐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 것과 동일해 보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실천을 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계 회복을 위해, 또 각종 문제를 풀 수 있는 직접적 방법은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질병을 앓는 이들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기 위해서는 시몬의 집에 가서 장모에게 직접 가까이 가셨습니다.
또 다른 질병을 앓는 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왜 이렇게 불편하게 행동하셨을까요?
그냥 말씀만으로도 편하게 고쳐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사랑해”라고 말한다고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말에 따른 행동이 있을 때, 그 사랑에 비로소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장모와 병자들이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만이 사랑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 안에서 당신의 따뜻한 사랑을 계속 주고 계십니다.
나의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사랑의 온도를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평불만을 줄이고 만족의 삶, 기쁨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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