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저주인가, 축복인가? 비장애인으로서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직접 장애를 입어 보지 않은 자는 장애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시각장애인인 강영우 박사의 유고작,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를 읽으며 받은 감동을 글로 쓰면서 장애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강영우 박사는 “나의 장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리신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중학생 때 망막박리로 인하여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3대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성공한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의 글을 읽다가 오래 전 일이 생각났다. 1988년 혹은 1989년이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전주에서 사마리탄 한몸교회를 다녔다. 그 교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반반씩 섞인 통합교회였다. 성도 수는 그리 많지 않아서 30여명 정도 되었다. 개척한 지 3년쯤 되었다. 그 교회의 장애인 식구로는 시각장애, 청각장애, 뇌성마비, 다운증후군, 소아마비, 사고장애 등 갖가지 장애를 입은 교우들이 있었다. 어느 날 침술과 안마로 자립한 어느 시각장애인 교우가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초대를 하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즈음에 출발을 했다.
주소를 보고 물어물어 그 집에 찾아갔더니 도착할 때에는 캄캄한 초저녁이 되었다. 집은 적막했다. 사람 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대문은 열려있었다. 조심조심 대문을 지나 현관 쪽으로 다가갔더니 사람의 기척을 듣고 그 형제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의 집에서 그를 만나니 반갑기도 해서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무심코 말했다. “형제님, 이렇게 캄캄한데 왜 불도 안 켜시고 계세요?” 그제야 그가 스위치를 올렸다.
그가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나는 얼핏 그의 어두운 표정을 본 듯했다.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차, 실수했구나. 시각장애인인 그는 캄캄한지 밝은지 알 필요도 없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물론 가끔은 밤이 되면 불을 켰을 것이다.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불을 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때 가장 막막한 것이 어둠의 장애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강영우 박사는 2년 동안의 거듭된 수술에도 눈이 고쳐지질 않아 결국 실명하게 되었다. 의사의 최종적인 실명 선고를 듣고 그가 다음으로 한 일이 기도였다. 치유 집회 부흥회를 몇 개월 동안 찾아다니며 안수 기도도 받고 본인이 직접 간절히 하나님께 눈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고쳐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소치임을 깨닫고 고뇌했다. 그 때 그 고민을 상담하러 갔던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두 곳의 성경 말씀을 읽어주셨다. 하나는 요한복음 9장 1~3절이고, 또 하나는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이었다. 전자는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인 어떤 거지를 보며 제자들이 주님께 물은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신 내용이다. 제자들은 그가 저주의 장애를 입은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대답하셨다. 후자는 사도바울의 육체의 가시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도 바울에게도 장애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세 번이나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No!’라고 대답하셨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깨달았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하려고 하심이며 자기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는 그 일로 기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두 말씀이 강영우 박사에게는 신앙적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일하시고자 함을 알고 감사했다. 그러므로 그 이후의 그의 삶은 하나님을 의뢰하며 오직 자신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했다.
그는 그 후 공부를 열심히 하여 비장애인이었을지라도 하지 못할 만큼의 성과를 이루었으며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평생을 장애인을 위하여, 장애인들의 인권과 교육, 처우 등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그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을 일들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장애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부흥회 때 강사가 물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는가, 때로는 안 좋은 것도 주시는가?” 모든 성도들이 즉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속에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안 좋은 것을 허락하셔서 우리를 연단하거나 자고하지 않도록 견제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었으니까. 대표로 앞에 앉은 장로님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대표자가 되어 대답을 해야 했다. “가끔은 안 좋은 것도 주시지요.” 거의 모든 성도들이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실 그 때는 헷갈렸다.
그러나 강사가 그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을 해줬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 주십니다.” 이 말이 선포되었을 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과 갸웃거린 사람으로 나뉘어졌다. 우리의 분위기를 살핀 후에 강사는 이어서 말했다. “어떤 분들은 고난이나 질병, 또는 장애가 우리에게 힘들고 무거운 짐이 되니까 우리 수준에서 생각하여 이것은 하나님께서 안 좋은 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라고 말하지요? 허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 주십니다.
고난이나 장애, 질병도 우리에게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주셔서 우리를 연단시키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성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 주십니다.”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은혜가 되어 가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새록새록 그 말씀이 생각나곤 한다.
장애, 고난, 질병을 당한 사람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원망을 한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하며 화가 나서 묻는다. 그 다음에는 죄책감에 빠진다. “나의 어떤 죄 때문일까?”하면서 그간의 자기의 삶을 반추하면서 징벌을 당할만한 죄를 찾는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아. 내가 못마땅하신 거야”하면서 절망의 늪에 빠진다. 여기까지에서 멈추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 다음 단계에 가서야 비로소 “이건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서일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나를 크게 쓰시고자 하심이야”라고 말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기에 이르게 된다.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한국인의 장애를 향한 문화는 ‘수치의 문화’라고 강영우 박사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주변에서 그러한 예를 많이 목격했다. 자기 가문에 장애인이 태어나거나 생기면 가문의 수치라고 여겨 그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가문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그를 골방에 가둔다.
나의 친구를 통해서 장로님 한 분을 알게 되었다. 내 친구가 목회를 하는 우리 부부에게 오래 전부터 자기 교회 장로님인데 우리와 만나게 해주려고 몇 번 시도했다. 작년 여름에 드디어 세 부부, 여섯 명이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형제들인지라 처음 만났는데도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그 장로님은 어릴 때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어 두 목발을 짚고 다니신다.
금은방을 운영하여 세 자식들을 잘 길렀으며 지금은 운전도 하셔서 기동력도 있었다. 식당으로 갈 때에는 우리 부부가 장로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다. 남편이 말했다. “장로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게 되어 감사합니다.” 장로님도 말했다. “저는 훌륭하신 목사님 내외를 제 차에 태울 수 있어서 영광인 걸요.” 내 친구가 그에게 목사님 자랑을 많이 했던 모양이었다.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 넷이 돌아올 때 친구 남편이 얘기해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소학교 교사였는데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학교도 가기 전에 소아마비에 걸려 목숨은 건졌으나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장애인이 되자 그를 뒷방에 가둬두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동생들이 태어났다. 그의 또래들은 학교에 다녔고, 동생들도 학교를 다녔다.
그는 날마다 방에 들어앉아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많고 많은 시간에 그는 독학으로 글을 익히고 책을 읽었다. 아버지가 교사이니 집에 책들은 많았다. 언제부턴가 동네 아이들이 그가 책을 읽고 독학으로 공부를 꽤나 했음을 알게 되었다. 방과 후에 마을 광장에서 놀고 싶은 아이들이 하나 둘 그에게 숙제를 맡겼다. 그는 공부가 너무 좋은 나머지 싫어하지 않고 그 일을 즐거움으로 했다. 아이들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동네 아이들의 숙제를 그가 도맡아 해주었다.
그는 학교 문턱에 들어가 보지 못했어도 실력으로는 중졸 실력이었다. 아니,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 후 당시 소아마비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로 금은세공기술을 익혀 금은방을 차리는 것이 있었다. 그도 그 수순을 밟아 청년이 되자 자기 집 앞 쪽에 가게를 내어 금은방을 운영했는데 한 때는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신앙을 가져 장애의 고뇌도 극복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며 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은 무척 맑고 밝았다. 키도 크고 예쁜 아내도 얻었다.
지금은 ○○교회의 수석 장로님이라고 한다. 자기를 장애인이라고 뒷방에 가두고 학교도 안 보내준 아버지를 지금 모시고 사는 아들이 바로 그다. 당시에 소학교 교사가 장애아들에 대한 편견이 그러했다면 다른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이 없을 만큼 그 당시에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의 생각은 막혀 있었다. 하긴, 지금도 한국인들이 장애인을 대하는 무례함과 차가움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옛날부터 유전되어온 ‘장애인을 향한 수치의 문화’가 쉽사리 바뀌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내가 몇 년 전에 근무했던 중학교에서는 장애인 신입생을 두 명 받았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의 통합교육을 받아들여 초중고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교육을 실시했다. 그 이전에는 장애인은 해당 장애인 학교로 보내 특수교육을 받게 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격리되어 학창시절을 보내면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할 때 서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같은 교실에서, 같은 학교에서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나는 그 취지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 해에 나는 1학년 담임을 맡았다. 담임교사로서 장애인 학생 한 명을 지도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긴 했다. 장애인 학생에게 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지도를 해야 했다. 그러므로 비장애인 학생에게는 상대적으로 지도 시간이 적게 할당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쉬는 시간에 비장애인 학생 중 어떤 학생은 장애인 학생을 놀리고, 울리고,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날 나머지 시간에는 그 비장애인 학생을 지도하느라 진이 빠졌다. 1년 내내 실랑이를 했지만 사람의 품성은 잘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이지, 사람의 악한 본성에 대하여 때로는 절망감이 들 때도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깨닫는다. 어쨌든,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야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스스로 강한 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에서, 실제 삶 속에서 많이 보아왔다. 우리의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아닌가 생각해본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