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가 발굴 현장에 나가서 일하는 관계로, 평일에는 도저히 긴 글을 쓸 여력이 없게 되더군요. 그래서 토론을 지속하기도 어렵고 해서, 짤막하게 2가지 측면만 지적하겠습니다.
1. 역사학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
야스페르츠님의 주장을 보면, 실증'주의'('실증'과는 구분)적인 생각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제가 역사학을 공부하는 전공 과정 학생이지만, 역사학의 최근 동향에 대해 비전공자들이 잘 모르면서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9세기에 랑케류의 역사주의(실증주의)를 배태시켰던 유럽에서는 정작 실증주의(위에 적었듯이 단순 '실증'과는 반드시 구분할 것)가 이미 부정된지 오래입니다. 역사학은 사료를 갖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사료에는 반드시 그 사료를 기록한 자의 주관이 깔려있고, 그것을 사관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서는 그 사료가 누구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인지 파악해야하고, 그 시각과는 다른(혹은 반대되는)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래야 역사 연구인 것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제기된 이러한 조류를 상대주의 역사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익히 배운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바로 이런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책입니다.
김선생님이 자세한 설명은 않으셨지만, 사료를 맹신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겁니다. 예컨대 현대 역사학은 지배받던 백성들의 관점, 차별받던 여성들의 관점, 상인의 관점 등등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기존의 사료는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지배층들(특히 글쟁이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열거한 하층민들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도리어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뒤집어 해석할 필요도 있는 겁니다.
예컨대 최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5.18 기록물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나마 현대이고 한글이 국가적으로 도입된 시대이기 때문에 광주시민들이 남긴 기록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시민들이 기록을 하나도 못하고, 당시 군사독재정권측에서 남긴 기록만이 남아있다고 가정할 때, 후대인들이 과연 그 정부측 기록물만 갖고서 실증주의적으로 판단해야하는 것일까요? 그 기록에는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한결같이 쓰고 있을 것이고, 그 폭동을 제압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대가 투입되었다고 되어있을 것인데, 이를 비판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해석을 두고 '추론에 불과하다', '실증적이지 못하다'고 운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전연-후연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도 마찬가집니다. 이 기록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어떤 관점에서 쓰여졌고 이것이 정말 타당한지를 따져보는게 역사학입니다. 그 기록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것이 역사학이라면, 역사학 누구나 할 수 있는거죠. 역사학자 자체가 쓸모없는 집단이 되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2. 5호16국-남북조시대의 국제관계에 대해서
사실 이 문제는 대단히 큰 문제라서 짧은 글에 담기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그래도 제 나름대로 적어보겠습니다.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 중에 하나가, 전근대 동아시아에는 언제나 조공-책봉체제가 한결같이 관철되었다는 관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 각 시대별로 들어가보면 안 맞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예컨대 고려시대의 경우에도, 고려가 송이나 요나라에 조선과 같은 정도의 조공-책봉체제에 편입되었다고 볼 여지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휘님께서 오래 전에 올리신 '몽골 이전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관계' 글 참조)
자세한 내용은 저 글에 있으니 생략하고, 왜 저런 국제관계의 양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당시 송나라가 명실상부한 중화(中華)로 자리매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5호16국-남북조시대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스페르츠님께서는 고구려가 전연-후연에 조공-책봉체제로 편입되었다고 말씀하시지만, 고구려는 초반에 후조의 석호와 함께 모용선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더구나 전연이 멸망할 때에는 전연의 적국 전진과 우호관계를 맺고서 전연에서 망명 온 모용평을 전진에 보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조공을 바칠 대상이 수시로 바뀔 때마다 그에 맞추어서 조공했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요?
김선생님께서 전연-후연이 한족이 아니라 모용선비라는 이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지적하신 것은 결코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원래 중화를 자처하던 진(晉)은 과거의 '오랑캐' 출신 복속자들에게 중심지역인 화북을 내주고 남쪽의 '만지(蠻地)'로 도망갔습니다. 즉 다시 말해 중화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시대인 겁니다. 모용선비 자체도 동진을 명목상의 황제국으로 인정해주는 척하면서 성장하였고 끝내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유독 고구려만 수시로 바뀌는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쳤다... 만약 고구려가 이들과 비교가 안 되는 약소국이라면 가능한 얘기이겠지만, 글쎄요.
그런데다 모용선비가 어떤 대상인고 하면, 전연을 세우기 오래 전부터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던 상대입니다. 고구려에게 모용선비가 세운 나라를 상국으로 인정할 마인드가 없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후조와 연합작전 계획을 세우기도 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전연-후연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 김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이 정확합니다. 고구려가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한 직후 미천왕의 시신과 주씨태후를 돌려받기 위해 조공을 바쳤지만, 돌려받은 이후에는 사신을 일절 보내지 않습니다. 이 조공 자체가 와신상담의 1회성 조공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더군다나 후연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던 와중에 후연에 사신을 보냈고 이게 중국측 기록에는 조공이라고 되어 있지만, 후연측에서는 도리어 고구려 사신이 거만하다고 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상황상 과연 고구려가 정말 신속을 위해서 조공을 바쳤을까요?
본래 북연이 고구려의 제후국이냐 아니냐의 논쟁이지만, 그에 앞서 이런 문제들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에 적어보았습니다.
첫댓글 글을 적고 나서 보니 남북조시대 고구려의 위상에 대해서 적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카페에서도 거론된 적이 많습니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미주가효님의 '조공(?)을 잘 바친 장수왕이 기특하여 상복까지 입어 준 효문제' 글도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를 조공-책봉체제로만 보는 기존의 관념을 깨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후대의 고려시대처럼.
지금 제 글이 나온 상황에 대해 부언을 좀 하자면, 야스페르츠님의 주장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전연-후연은 고구려와 조공-책봉 관계였다'(전제) -> '고로 전연-후연의 계승국인 북연이 고구려에 예속되었을리가 없다'(주장) // 이에 대해 저는 전제가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심지어 고구려-북위도 단순 조공-책봉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카페에서도 여러 차례 거론된 바가 있습니다. 바로 위에 제시한 미주가효님의 글을 포함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