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남자와 여자가 만났을 때)
(6) 날라리닷컴
회의의 안건은 "날라리 PC 공부방"의 운영에 관한 것이었다. 날라리닷컴의 유료회원들은 PC 공부방을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부방에 오면 사이버 선생들의 실물을 접할 수가 있다. 사이버 세계와 현실
세계의 오버랩이 그곳에서 이루어진다......대충 이런 요지의 사업 설명이었다. 설명을 들은 뒤 가장 먼
저 입을 연 사람은 차영주 이사다.
"좋으네요. 온라인만 가지고는 다른 서비스들과 차별화가 안 될 것 같았거든."
별로 이견이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때 느리게 잡아끄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 좋은데......"
류정균이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류정균이라는 것 때문에 회의석상의 다섯 명은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애들 연애질하는 걸 어떻게 막습니까?"
황당했지만 달리 할 말들이 없었다.
"그런 데다 모아 놓으면, 애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이나 하고 그런 거 뻔하지 않습니까?
사장님, 안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다 "대표"라고 불러도 규정균만은 언제나 송재선을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당황한 사람들의 눈이 사장, 아니 대표의 얼굴에 집중됐다. 그러나 대표 성재선만은 하나도 당
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칠 만 원만...꼭 갚을게'하며 붉어지던 연희의 코끝과 눈가. 그것이 추워서였을까 슬퍼서였을까? 왜 하
필이면 7만원이람? 뭐에 쓰려는 7만원일까? 70만원을 빌려 달라고 할 수는 없었을까? 아니 70만원을
빌려 주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7) 재선과 연희가 만났을 때 3
밤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집에 가려는데 자꾸 비디오 가게로 발길이 이끌렸다. 딱이 볼 영화가 있었던 것
도 아니고, 게다가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디오 가게에 볼 일일 없는데도
어느덧 재선은 "비디오의 바다" 앞에 서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버르장머리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
다.
" 아, 나 진짜, 주민등록 띠아 와요? 아니면 꼰대 도장을 받아 오란 말이야 뭐야, 진짜."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십대 티가 났다. 그 십대는 벗은 여자의 사진이 덕지덕지 붙은 비디오테이프 두어
개를 들고 카운터 앞에서 목청을 돋우고 있다. 연희는 한 손에 수화기를 든 채 혈기왕성한 십대의 횡포
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연다.
"잠깐만요."
그리곤 수화기에 대고 거의 징징거리며 울었다.
"잠깐만 더 봐 주시면 안 돼요? 미안해요."
연희가 징징거리는 동안 십대는 십대대로 아우성을 그치지 않는다.
"대한민국 땅에선 비디오 하나 볼 자유도 없어, 시발, 왕짜증!"
그러면서 벗은 여자들의 사진을 앞세우고 나가려 한다. 연희는 또다시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그 십대를
상대한다. 순식간에 연희의 덕양은 닳고 닳은 비디오 아줌마로 바뀐다.
"잠깐만요, 잘못 걸리면 우리가 큰일나요, 그러니까...."
연희는 테이블 서랍에서 검정색 비닐봉투를 하나 꺼내 십대에게 준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에 대고 징징
거린다.
"그렇게 많이 우나요? 아, 걔가 왜 그러지? 안 그랬었는데....정말 미안해요."
그러나 그 십대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검정 비닐봉투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비디오를
날로 들고 돌아선다. 연희는 수화기를 막고 있던 손으로 검벙 비닐봉투를 집어들고 흔들어댄다.
"학생!"
그러나 십대는 인정사정 없이 문을 열고 나가버렸고 연희의 시선이 닿은 가게 문 앞에는 재선이 말없이
서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1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연희는 초인적인 순
발력을 발휘한다.
"금방, 금방 데리러 갈게요!"
하며 전화를 끊고, 그와 동시에 카운터에서 튀어나간다. 연희가 문 앞에 서 있는 재선을 스치며 남긴 말
은 이랬다.
"가게 좀 봐 줘, 금방 올게."
재선이 비디오 가게 점원 노릇을 시작한지 약 45분 만에 연희가 돌아왔다. 다섯 살 먹은 딸 윤미의 손을
잡고. 재선은 그리고도 약 두 시간 가량 더 그 곳에 머물려 연희를 도왔고 열 두 시가 되어 손님이 끊어
지자 매장에 대걸레질을 시작했다. 추천작 진열대부터 신작 진열대까지 일자 도로를 대걸레로 밀고 달
려가며 재선은 소리를 질렀다.
"와하, 이거 재밌다. 운동되는데!"
연희는 재선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손가락 하나로 띄엄띄엄 컴퓨터
자판을 찍는 일에 열중하고, 어린 아이 윤미는 카운터 뒤쪽에 이어 놓은 의자 위에서 자고 있었다. 마지
막 입력을 마친 연희가 벽의 스위치를 누르자 비디오 가게의 반쪽이 어두워졌다. 영업이 끝났다는 표시
이다. 실내가 갑자기 어두워지자 재선이 연희를 바라봤다.
"끝났어?"
"응."
연희가 매가기 없이 대답하며 재선을 바라보았다. 재선은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대걸레를 밀며 이리저
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기......"
연희가 입을 열었다. 재선이 멈춰 서서 연희를 바라봤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연희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상가의 불빛이 다 꺼지고, 빨갛고 노란색의 간판 멸 채만 반짝이고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빛 속으로 비
디오 가게의 셔터를 내리는 연희와, 그 옆에 아이를 안고 선 재선의 모습이 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간간이 연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