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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기자 [조선닷컴]
입력 : 2013.03.15 03:01 | 수정 : 2013.03.15 06:46
지난 13일 청와대 인왕실.
나이 지긋한 한 여성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꽤 긴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대통령과 국가 원로 12명이 만나 오찬을 나누는 자리에서다.
발언의 주인공은 이인호 전 러시아대사.
또렷한 목소리였고 조금은 답답한 듯 목소리가 좀 높아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깡통진보] 성향 좌파단체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유튜브를 통해 퍼뜨린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순 악당](惡黨)으로 그린 동영상이다.
[깡통진보] 국가전복세력에 대한 [문화-사상전쟁]의 불을 붙인 계기가 된 것이기도 하다.
자리에 참석한 원로급 인사들은 대부분 이 동영상의 정체를 아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보셨느냐’는 이 전 대사의 질문에 박 대통령은 “못봤다. 그런 동영상이 있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의외]라는 표정을 보인 이 전 대사는 총 동영상의 내용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곳에서 제작을 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영상이 먼저 나왔고,
대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을 겨냥해 심각한 역사 왜곡이 있다.
이런 내용의 상세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박 대통령도 이 전 대사의 [성토]를 일일이 메모하면서 경청한 뒤 “잘 살펴보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청와대 공식브리핑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발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여러 버전으로 출시된 이 동영상의 존재 자체도 몰랐다는 것에 있다.
조회수가 200만이 넘고,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을 겨냥해 만든 [깡통진보]들의 [선동 콘텐츠]였음에도 말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대통령께서 영상을 진짜 몰랐던 것 같았다. 대선 기간 동안 워낙 바빴으니 보고를 못받았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예민한 문제다. 대통령도 ‘잘 살펴보겠다’고 대답했고 대통합을 새 정부의 최대 과제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도 어떠한 지침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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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15일 <뉴데일리> 기사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38271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가 대선(大選)을 전후해 <100년의 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내놓았다.
"이승만씨 나쁜 사람 맞습니다"
"그걸(경제) 일본에 헌납해서 경제 식민지 만들려고 했던 것도 박정희라고 나오고…."
한마디로 [반일](反日)과 [친일](親日), [반미](反美)와 [친미](親美), [민족]과 [반(反)민족] 사이의 [100년에 걸친 상쟁(相爭)의 역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는 후자(後者)의 흐름을 대표한 [두 원흉]이라는 식이다.
아무런 백신도 없이 이런 동영상에 노출된 청소년들이 대한민국 65년사에 대해 어떤 악감정을 가질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고 하는 오도(誤導)가 여전히 한국 정치의 가장 [기층(基層)적인 싸움]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잘나갔어도 '그래도 그것은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든…'이라는 적의(敵意)가 도사리는 한, 그리고 그 흥행이 그렇듯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면, 그 싸움은 그렇게 쉽사리 사그라질 수 없을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도 표면상으로는 민생, 복지, 경제 민주화가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사실은 그런 역사관의 싸움이 끈질기게 저류(底流)를 이루고 있었다.
대한민국 65년사를 "보람 있었다"고 하는 [긍지(矜持)의 역사관]과 그것을 "정의가 패배한…"이라고 매도하는 [증오(憎惡)의 역사관] 사이의 싸움 말이다.
[증오의 역사관]에는 "이승만·박정희, 너희만 아니었다면…" 하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이 깔려 있다.
"너희가 어쩌다가 경제 발전은 해가지고…" 하는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도 읽힌다.
반면에 [긍지의 역사관]에는 "대한민국 성공사(成功史)에는 이승만·박정희의 리더십 더하기 나의 피와 땀과 눈물이 녹아 있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객관적 사실과 진실은 후자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1974년을 고비로 한반도의 '삶의 질(質)' 경쟁은 시장과 개방 우세로 접어들었다.
[긍지의 역사관]이 발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87년까지는 [증오의 역사관]과 [종속(從屬)이론]이 시대의 트렌드였다.
'남영동'과 '빙고(氷庫) 하우스'가 낸 반사 효과였다.
그러다가 민주화, 88 올림픽, 북(北)의 300만 아사(餓死) 사태를 거치면서 그것이 설 땅은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현실 설명력을 그렇게 잃어갔어도 [증오의 역사관]은 그러나 수그러들 기색이 아니다.
<100년의 전쟁>과 그 열성 팬들의 반응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사람들의 머릿속과 가슴속을 누가 선점하느냐 하는 [문화 전쟁]에서 [증오의 역사관]이 훨씬 더 집요하고 기민했던 결과다.
따지고 보면 [긍지의 역사관]이 꿀릴 이유는 없다.
[긍지의 역사관]은 세계가 인정하는 [긍지의 근거]를 가졌다.
그러나 [증오의 역사관]은 [잘된 것까지 잘못됐다고 우기는 픽션]을 썼다.
이 차이가 [긍지의 역사관]이 지닌 정당성의 힘이다.
지난 대선에서 제헌(制憲) 세대, 6·25 세대, 산업화 세대, 민주화 운동 초심(初心)의 [연합 세(勢)]가 투표 당일 막판 끗발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100년 전쟁]은 [그들의 100년 전쟁]과 다르다.
그것은 독립협회 이래의 자유·평등·박애 그리고 문명개화 이상(理想)의 우여곡절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은 그 이상의 초기적 결실이었다.
6·25 때의 다부동전투 지휘관은 그 결실을 지켜낸 영웅이지 '민족 반역자'가 아니다.
산업화는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의 감격의 눈물을 쏟게 한 고심참담한 역작이었다.
그리고 비록 '지하실'에 끌려갔어도 민주화 운동의 대표 투사에겐 그것은 요덕수용소 변호인들 따위에겐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깃발이었다.
박근혜 당선인은 있을까?
없으면 그가 말한 '시대 교체'도 '청와대 교체'로 그칠 것이다.
<100년의 전쟁>이 그걸 말해준다.
<조선일보 특별기고(2013.1.15) 전재>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 (cafe.daum.net/aestheticismclub)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은 이재오가 포섭하여 키운 사람
임준열(=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父子가 간첩출신
임준열의 아버지 임우빈은 빨 집단인 보도연맹 가입으로 처형되었고, 임준열 자신은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 에 연루되어 5년형을 받았다. 남민전에 가입할 때까지 37세가 되도록 변변한 직장 없이 열등의식에 차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가 다 대한민국을 증오한 빨이다. 대한민국을 증오-파괴한 자가,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국가를 부자로 만든 애국자, 반공을 국시로 하여 간첩 사냥을 했던 박정희 대통령에 욕을 해댄다.
간첩애 물에 들면 선악 구별이 안되고 오직 한풀이에만 올인한다. 신경쓸 것 없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쏟아내는 쓰레기 발표를 인쇄로 찍어내는 언론들이 더 쓰레기들이다.
1941년 1월생, 남민전 당시의 직업은 문학평론가, 당시 주소는 은평구 녹번동, 본적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구연리, 남민전 가명은 한미정, 필명은 임헌영인 자다. 박헌영을 흉내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임준열은 임우빈의 2남, 그의 부친은 임우빈 본적지인 의성군 금성면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처형당했다. 이 나라에 한이 맺힐 만한 사람인 것이다.
임준열은 1959년 3월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과 동시에 소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이듬해인 1960년 12월에 사임하고 1961년 3월-1965년 3월간 중앙대 국문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8년 3월에 동 대학원을 이수했다.
1969년 10월 경향신문 주간경향 기자로 재직하다가 1970년 10월 월간 ‘다리’지 주간으로 전직하여 여기에 근무하면서 1972년 3월 중앙대 강사를 겸직하다가 1974년 1월 ‘문인간첩단사건’ 에 연루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자 동직을 사임하고, 1976년 7월 대법원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4월부터는 ‘태극출판사’ 기획부장으로 있으면서 1978년 6월부터는 월간 ‘독서’ 주간으로 재직하다가 1979년 8월부터 도서출판 ‘상황사’를 설립하여 경영해 오다가 남민전에 뛰어들어 1심에서 징역 15년, 2-3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 형량은 이재오와 동일하다.
남민전은 1976년 3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3인에 의해 발기를 한 후 박대통령이 서거하신 계절인 1979년 10월에 일망타진되었다. 일당 73명이 재판을 받았고, 임준열의 피고인 번호는 72번, 참고로 이재오는 60번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은 이재오가 포섭하여 키운 사람
임준열은 1976년 11월 하순, 15:00시 경, 주욱 필동 소재 근무지인 태극출판사 사무실로 찾아온 이재오로부터 “민주화투쟁의 핵심 조직”(민투)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자마자 이를 쾌히 승낙하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0:00경 서대문구 냉천동 소재 이재오의 집에서 이재문의 주재와 이재오의 추천 및 사회로 민투의 강령과 규약을 선서하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남민전에 가입했다.
수일 후 20:00경 은평구 홍은동 4거리 중국집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민주화운동‘에 대한 교약을 받았고, 12월 초에도 같은 음식점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점조직에 대한 교양을 받았다. 1979년 1월4일 20:00 이재오의 집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민투의 첫 활동으로 삐라를 뿌려야 하니 삐라 문안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익일인 1월 5일, 22:00시 삐라 문안을 작성했다.
“오늘 박정희 1인 학정은 군대와 경찰의 사병화 . . 한국 민주투쟁국민위원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1인폭정과 무제한 투쟁할 것을 . .” “인권을 유린한 박정희 1인 폭정을 타도하기 위하여 . .” 그리고 이를 이재오에게 전달했다.
1월 중순 20:00시 임재오, 임기묵,(10년에서 3년으로 확정) 최석진(1,2심 사형에서 무기로 확정) 등과 4인 1조가 되어 삐라 살포를 위한 수개지역 사전답사를 했다.
이재오가 삐라를 살포하다가 구속되자 이재오의 영치금, 변호사 문제를 이재문과 논의하고, 이재오가 맡고 있던 민투책을 승계했다, 이후 수회에 걸쳐 자금을 전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섭하여 남민전 조직 확대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1977년9월 16일,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신 초안을 작성했고, 동년 9월말에는 권오헌의 집 안방에서 안재구가 준비해온 남민전기를 걸어놓고 안재구가 가져온 단도를 임준열과 함께 세 사람이 거머세우고 강령, 규약, 선서문을 앙독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 자는 아버지도 간첩, 자신도 간첩이다. 그가 박정희를 친일파로 몰아간 것은 국가-사회에 대한 아버지의 원한과 그 자신이 치룬 재판들과 감옥생활에 대한 보복심리 그리고 그가 심취했던 사회주의 서적들에 의해 형성된 공산주의 사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심취했던 책들은 “1981년 10월 20일, 발간된 ‘좌익사건실록’ 746-747쪽에 수록돼 있다.
그가 친일파 명단을 작성한 것은 자신이 간첩 행각으로 감옥생활을 했고, 변변한 직장조차 가져보지 못했고, 그의 부친은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처형당한 데 대한 한풀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글쓴이 : 지만원
오늘 우리는 한없이 자애로우신 어버이 수령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분단 30년이 가져온 5천만 겨레의 고통과
전 남조선 인민들의 절절한 염원과
조국통일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열화 같은 신념을 담아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이름으로 삼가 보고의 말씀을 드립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의 품에 굳게 뭉친 조선노동당의 영도 하에
북조선은 일제 식민지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건설
사회주의적 개조와 사회주의의 건설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강력한 사회주의의 대 공업국으로 전변하였습니다...
국제공산주의의 운동사에서 김일성 원수님께서 독창적으로 창시하신 주체사상으로
사상, 기술, 문화 3대혁명을 거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5천만 조선민족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조국이요
아세아동방의 사회주의의 강력한 전진기지이며
블록 불 가담 나라 반제투쟁의 영향력 있는 지도국으로
그 위광은 날이 갈수록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은 패망한 일본제국주의의 자리를 빼앗아
미군이 상륙한 날로부터 미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에게는 지상천국으로 되었으나
모든 남조선인민들에게 그네들의 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되어 있습니다.
점령 미군의 직접 군정이 허수아비를 내세우는 간접통치로 지배양식이 바뀌고
신식민지 괴뢰정권이 이승만 괴뢰에서 장면으로 다시 박정희 군사팟쇼로 교체되었으나
사회적 구성체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배계급의 착취와 압박은 강화되고 민생고는 가중되고 있습니다...
국제독점자본과 매판자본의 충실한 번견인 박정희 군사팟쇼는
온갖 매국매족의 죄악을 저지르며 인민대중을 들볶고 있습니다...
피로 물들인 투쟁 속에서 자라온 남조선 혁명가들은
평양으로부터 울려오는 주체사상 강의에서 혁명이론을 배우고
각계각층 대중과 손을 잡고 싸우는 마당에 대중공작과 지도의 실천을 익히고 있습니다...
투쟁의 국면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대중투쟁을 지도해 온 남조선 혁명가들은
나라 안팎에서 조성된 모든 주, 객관적 정세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1976년 2월29일 마침내 역사적인 남조선 민족해방애국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남조선혁명은 남조선인민의 힘으로라는 김일성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어
용약 결집된 남조선민족 해방애국전선 준비위원회에는
혁명가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소시민, 교수와 언론인, 문인, 군인, 여성 등
각계각층 대표가 참가하고 있습니다.
항일 빨치산 투쟁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기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전사들은
불굴의 투지와 결의 규율 인민대중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으로
남조선에서 외래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를 쓸어버리고
남조선 인민들을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하고 강산을 뒤흔드는 만세의 함성과 함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원수님께옵서 인도하는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품 안으로 안기는
영광스러운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5천만 조선민족의 어버이시며 경애하는 우리 공화국의 주석이신
김일성 동지의 적의 탄압과 폭압 속에서 결사 투쟁하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수령님의 무한한 사랑과 교시 그리고 적극적인 지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끝으로 어버이 수령님의 만수무강과 조선로동당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무궁한 발전과 북조선 전체인민의 건강과
행복을 빌면서 저희들의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 만세!
조선노동당 만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남조선민족 해방전선승리 만세!
조국통일 만세!
1977년 11월7일
서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중앙위원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