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서구 이론을 독점했다는 주술사의 차원이 아니라, 체험적 차원으로 공감되는 신보수주의가 형성되려면 1980년대 후반 이후 좌파의 대학가 장악이 만든 ‘철부지 좌파 양산 체제’를 봐야 한다. 즉, 할아버지 세대들이 살아온 연륜보다는 여태껏 없어온 것을 젊은 보수 세력이 새롭게 창출해야 된다.
이론 수입상을 멸시하도록 주입하고, 대한민국적이며 민족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하도록 했던 기억은 ‘민족주체성’이란 단어 속에 몇 겹으로 감겨져 숨겨 있다. 더 이상 할아버지 우파와 40대로 접어든 좌파간의 공 주고 받기 놀이로 인해서, 1980년대 후반 이래 대학가 좌파들의 일반양상에 침묵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 국립도서관에 가면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사이에 서울대 연세대 좌파들의 왕자병의 역사가 문학으로 많이 떳음이 역사적 사료(?)로서 드러난다. 그 때 그러그러한 왕자병을 과시하던 이들이 다 권력 한자리씩 차지하고 뒤에 숨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직도 서울대학교가 주도권을 쥐는 ‘전대협체제’인 듯 한 사고방식을 지켜내는 차원에 의해서도, 새로운 여론은 숨통 막혀서 안될 것이다.
[조선일보]와 깊은 상관을 가진 좌파 인사 홍명희 선생의 역지사지적 발언을,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나를 진절머리 나게 하는 생활속의 ‘떨거지 새빨간 좌파들’에 대해서도, 궁극적으로는 ‘왜 저럴까?’하는 차원으로 그렇게 장기적 차원의 배척적인 마음은 없다. 우파가 진정으로 권력을 되찾고자 한다면, 그러한 부류의 과반수를 ‘이데올로기’와 문화의 힘으로 전향시켜야만 할 것이다.
진중권이 제목을 희롱했던 박대통령 전기에는, 1945년에서 6.25 전쟁 사이의 한국 좌파들의 과격성을 ‘영웅화 논리’로 훌륭하게 파악했다. 지금에서는, 그 시대와 전혀 같지 않은, 놓치지 말고 주목해야 할 하나의 풍경에 만난다. 지금은 ‘철부지 좌파 양산 체제’이다. 이것은 우파들이 수없이 수백만가지의 비판의 글을 적은 것 같다. 그런데, 밤나 그 상황 지속이다. 좌파들은 순진한 이들을 ‘감성적인 용어’로 희롱한다. 그러지 마라. 여기에서 매번 무제한반복이다.
철부지 좌파들을 단순화해서 정리해 본다. 대략 두 종류이다. 주류 우파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김윤식교수 등의 1980년대 후반에 이미 <구렁이 좌익>단계에 도달된 사람만 거론하는 차원에서, 아직도 좌파의 이념 공세에 코끼듯 불려 나갔지 자신의 진정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는 이들과 분리하는 언어를 죽자고 싫어하는 듯 하다.
지금 현재에 있어서, 1980년대 후반 무렵에 설치던 학생운동권 때리기보다 중요한 게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백년 묵은 구렁이>좌파인 사람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국제 사회에 선명하게 알리는 게 필요하다. 하리수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공산주의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바탕에서 곧장 이야기한다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윤식교수와 그의 제자들 이상으로 대한민국 민족문화 주체들의 인권을 짓밟은 사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권기관의 공기관을 좌파가 장악하고, 서울대 국문과 김윤식교수가 떡 하니 지키고 앉아서 좌파적 방향으로 고정하고, 우파들은 황장엽선생의 자유주의적인 인권론을 전략전술로만 이해하기에 기성세대 내부로만 고정되는 문화정치적 반인권 논리를 모르고 있다.
대단히, 죄송스럽지만, 정운찬총장님은 ‘대학원중심대학론’을 유지하면서 <백년 묵은 구렁이>소탕작전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대학원 중심대학론’의 실천은 자진해서 반납해야 맞다고 본다. 대한민국은 ‘대학원 중심대학론’의 원안을 제시한 ‘분단체제론’의 저자 교수 같은 ‘세계적 수준의 좌파 이론’생산(?)은 이젠 정말 관 둬야 될 듯 하다. 서울대학교에 지원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사제 카르텔에 묵여서 본의 아니게, 송두율 코드에 굴복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해서 가시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김윤식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한국 사회에 알려주는, 8.15 이후에서 6.25 전쟁 사이의 비밀이 있다면, 지식인 사회에서 ‘떡’(잇권)보고 다니는 사람들이 대한민국과 개인 모두를 불행했는가 하는 점이다. 임헌영교수의 역사관 틀에서만 논쟁하라고 우겨대는 식의 입장에서도, 한나라당은 학술적인 입장으로 고정된다면 ‘균형가격’같은 게 형성된다고 본다. 그런데, 체험적 입장으로 그게 아니올시다! 가 맞다. 물론, 한나라당의 나를 실망시킨 어떤 젊은 정치인처럼, 자신이 보수 정당에 있는지도 모른 체 ‘우파만 교수자리에 눈밝힌다’고 최근까지 주장하여, 대학가 좌파 완전 장악을 기다리며 우파 정당에 있는 지도 모를 분도 있을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인문사회학 분야로 ‘시장논리’를 넘어서 개발독재주의적으로 밀어주는 것에 대해서, 자금줄을 봉쇄하는 것이 장기적 차원에서 ‘애국’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때로 본다. 물론, 투명하게 검증 가능하게 지원대상 속에서 연구 주제를 좌파적으로 고정하는 <구렁이 좌파 교수들>을 고립하며 배제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파는 박대통령의 반일반공주의도 잊어버렸다. 근대화를 일본을 통해 배운 차원의 긍정적인 효과보다도, 사회 하층에서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왜색적 풍조는 진절 머리가 날 정도다. 사실, 과거의 상황에서 박대통령은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좌파적으로 나라를 흔드는 게 사회의 하층 심리에 반영된 일본색깔임을 정확하게 알았으나, 정치 지도자 발언의 한계상 6.25 전쟁 이후의 니힐리즘적 어조에 담아서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 반일반공주의를 주장하며 일본과 경제교류를 맺는 것은 ‘禁反言’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박대통령이 이념에서 저항적 경계를 둔 것이 국가를 잘 살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는 국민단합성을 없애고 소모적으로 흐르는 왜색적인 것에 대한 경계였을 것이다. 진짜, 금반언을 따진다면 김윤식교수와 코드를 같이 하는 세력보다 이상의 세력이 없다. 우파 문인이 장악했다고 애걸 복걸 죽는 척 하는 타령을 똑똑하게 기억하는 이로서는, 분명히 그러하다. 우파는 순수 참여 논쟁 당시의 ‘선우휘’선생의 밥그릇중심으로 굴곡되는 문화 훼손에 저항하는 측면도 잊어 버렸다.
철부지 좌파 체제 양산 체제의 붕괴는, 단기적으로는 밥그릇에 뿅가버리며 애국심도 던져 버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의 김윤식교수 문학사관에 복면복창해야 되는 세력들에 불만자들을 끌어내는 차원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좌파의 친일시비에서도 드러났지만, 김윤식-임헌영교수가 만든 북한문학사의 유물사관 틀을 깨는 시도만이, 진정으로 헌법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 구절을 지키는 것이라 본다.
우파들은 좌파가 만든 유일사관을 너무 소홀히 본다. 서울시청 중심의 논리에 대해서 ‘관변단체’란 단어를 붙여주는 것에도, 너무 저항하지 않는다. ‘민’과 ‘관’의 이분법은 좌파의 민족해방논리의 계급적 구분법을 긋는 것이다. 현재에 살아 있는 관제 문화는 좌파 시민단체의 엄청난 돈을 먹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똑똑하게 방점을 찍어서 여러번 이야기를 해야 하나, 김윤식교수가 만든 역사관 그물망에 걸려서 자꾸 흩어진다. 기성세대 할아버지들은 30-40년 전의 공식 그대로를 돌아가는 게 좋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학생운동권에 억압당한 비운동권들의 이야기를 현재화시키지 않았기에 좌파의 논리가 완사이드로 먹히는 것을 승인하는 것을 봐주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철부지 좌파 양산에 대해서, 문제만 생기면 우파정당에 떠넘기는 식으로 철부지 좌파가 우파에 넘길 예상이 두려워 말을 아끼지 않겠다. 분명히, 좌파 철부지들은 이러한 공식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서울대 연세대 외 레닌이니 스탈린이니 들뢰즈니 하고 읽었다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근본적 차원에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수학정석 읽고 성문종합 영어 읽고 한샘국어 참고서 읽는 그 마인드로 외국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들을 구렁이 좌파들이 관리 하도록 하고, 적극적으로 지원도 해주었다. 그리고, 결사적으로 홍보도 해주었다. 좌파가 아니라 공산주의 이론 자체였다고 주장하는 차원은, 분명히 1987년 항쟁을 이끈 주도자급의 선동가에는 맞을 것이다. 그러한 부류의 핵심은 어려서부터 좌파 공산주의 이념을 옹호해야만 하는 환경에 익숙했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대체로 그들끼리 또래에는 옹호하며 나머지 논리에 배척이다. 한마디로 학생운동권이 부르주아지 계급공식을 씌우는 것은, 일본의 ‘왕따’논리에 가까웠다. 이른바 ‘386’운동권들은 대학가에서 체계적으로 비운동권을 공격했다.
그들은 사회의 가장 바깥에서 기성세대 보수 세력이 갖다 주는 파이를 뜯어 먹으며, 비운동권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체계적으로 차단했다. 그리고, 자기 전공 분야 내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수학’과 ‘영어’를 잘했던 측면으로서의 학문언어의 정확성 차원을 과시하면서, 그 분야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측면에서 사회를 뜯어고치자고 하면서, 세부 디테일의 대안은 한마디도 못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논리적 한계를 지우는 것은, 보수 언론 문화면 기자와의 결탁에서 빚어진 홍보망이다. 그 정도로 홀리게 홍보하면 안 홀릴 수 없다. 그러면, 기성세대 우파 들은 인기 차원에서 그것을 확장하자는 측면에 박자를 맞추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이 ‘내심의사’에서 좌경공산의지를 가진 이가 극소수되는 상황에서 좌익 이론만으로 음풍놀월하면서,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려왔는가의 실체일 것이다.
곧 신춘문예 시즌이 된다. 문학평론과 신문 칼럼은 좌익 이론 음풍농월의 경연장이 된다. 여기에 모든 신문은 이상 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등의 이름은 달라도, 하나같이 김윤식문학상이 진정한 실체이다. 신춘문예도 제도권 문학상과 다르지 않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에 임헌영교수와 김윤식교수와 친하지 않은 인물로만, 절반을 확실히 채우도록 하는 압력도 필요하다. 1980년대 후반에 우파 문단으로만 가득찼다고, 김윤식교수 패거리들이 어떻게 눈물짰는가를 보여주면서, 애초부터 악의적인 차원의 반민주적 문화 패거리임을 들춰 내도 좋을 듯 싶다.
두 번째, 사회에서 ‘성질 많이 죽었다’가 인사말이 되며, 그러한 쳇바퀴를 없애준다고 유학 보내는 상류층도 있는 게 한국이다. 이 상황에서 서울 중하위권대학교 좌파들과 지방대 좌파들의 언어가 분석이 가능하다. 그들은 제도권 논리에 끼어서 돌아가며 견뎌내는 것보다는, 끝까지 버티며 체제 해체적 사유를 하는 것이 실리에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차원에서 그 어떠한 훈계조보다도, 구체적으로 극복하는 논리의 실현이 옳을 것이다. 나는 엘리트 문화에 편중하면서, 사회의 지하철 내에 콩시루 속에 사는 사람들을 너무 얕잡아보는 듯한 우파 문화를 싫어한다.
이들 좌파의 반미 사상을 거창하게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러한 방향성의 비도덕적 실리주의에서 이익과 불이익의 문제로 생각하는 게 편할 것이다. 물론, 어딘가에서 미국만 반대하라라고 문화적 압력을 자주 주는 것도 사실이다.
어피니언 리더급의 철부지 좌파 형성은, 구렁이 좌파와 단절이란 보장없이 인문사회학에 시장경제 논리 해치는 지원 때문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두 번째 분야에서는 전적으로 ‘말달리는 몽고주의’의 사회의 보편주의논리를 경멸하며 군사 매니아 논리로 가는 차원에서 기원된다. 좌파들이 상투적으로 지네가 잘못해도 책임을 떠넘기는 측면이 있었지만, 말달리는 몽고주의로만 고정되는 우파 문화 상황에서는, 일반인들이 이들을 설득하는 평균논리를 찾아주기는 쉽지 않다.
한국 사회에 좌파 이론이 가득 찬다고 했을 때, 이들은 그냥 좋은 것이겠지 생각한다. 사회의 조화는? 조율은? 그러한 것은 좌익 이론 연구해도 떨어질 지원금에 아무상관없고, 열심히 체제 친화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려 하는 차원에 아무상관이 없을 것이라 본다. 기성세대 할아버지들의 공식주의적 접근은, 이들의 철부지논리의 알리바이를 잘 세워 줘 왔다. 이 철부지 좌파들이 없다면, 친북좌익 핵심부는 대단히 껄끄러울 것임은 분명하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게 하지 않고서도 공식 몇가지로 세몰이 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우파 내부의 선입견은 너무 무섭다. 우연적으로 딱 하니 정신차리는 것을 기다리는 차원이라면, 천지신명에 복을 비는 애니미즘으로 달려가는 게 낫다.
철부지 좌파들을 전향시킨다면, 그러면 새 것을 쥐어줘야 한다. 새 사고 새 이론 새 사고방식을 쓴다. 그런데, 우파 사이트마저도 군사 매니아 논리 아니면, 좌파 아부성 허위적 정치논리만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