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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4,1-5
형제 여러분,
1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2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서 함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루카 5,34)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루카 5,36-38)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옷’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곧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하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왔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준 이 나라를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의 영과 더불어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삶을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5,38)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고,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면>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1코린 4,3)
요즘 우리 대통령이 하는 것을 보면 국민을 섬기는 것이 아님은 물론, 통치도 아니고 그저 오기 부림이요 깔아뭉갬이요 자기가 다 옳다입니다.
과거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이 말이 권력에 굴복하거나 빌붙지 않고 오직 법대로 하겠다는 말로 들리어 좋게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는 교만일 뿐이고, 법대로 하겠다는 것도 남은 법대로 하고 자기는 예외인 법대로이며, 그래서 결국 자기 마음대로일 뿐입니다.
왜 이럴까 생각하면, 옛날 제가 오래 양성 책임을 맡다 보니 훈장 기질이 몸에 뱄던 것처럼, 우리 대통령도 검사 기질이 몸에 배어 그러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기는 단죄하는 자이지 단죄받을 자가 아니라는 의식이 몸에 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누구에게 또는 어디서 심판받건 그것이 자기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런 맥락인가요?
이것이 사람들의 심판을 무시하고 거부한다는 뜻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심판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음을 안다는 말의 뜻도 자신이 무죄라는 것이 아니지요.
앞뒤 말을 연결하여 볼 때 이것은 오직 하느님의 심판이 중요하고, 그렇기에 하느님 심판에 자기도 남도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심판하건 하느님의 심판이 중요하고,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기에 자기가 앞질러 자기를 심판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자기가 앞질러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판단, 단죄, 심판, 이런 것들은 우리가 조심하고 삼가야 할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판단의 경우 올바른 판단은 사랑에 있어서 필요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병의 경우, 육신의 병이건 마음의 병이건 고쳐주기 위해서는 판단을 아예 하지 않으려 하기보다는 잘 판단해야겠지요.
문제는 잘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에 조심하거나 삼가야 하고, 특히 단죄나 심판은 더더욱 조심하거나 삼가야 한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단죄나 심판의 권한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면 세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할 수 있으며, 둘째는 내가 나를 앞질러 심판하거나 쓸데없이 자책하지 않을 수 있고, 셋째는 남을 함부로 단죄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교만의 죄도 피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 겸손하면 함부로 단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하느님보다 앞질러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사랑보다 단죄나 심판이 앞서지 않을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새 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 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할 날에 단식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용을 위한 다이어트를 단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단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 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7-38) 하고 말씀하신 것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새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 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러운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티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티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 정신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소수만 아는 단식의 목적: 빼앗긴 신랑을 되찾아라!>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논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불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해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신랑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신랑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입니다.
누가 신랑을 십자가에 달까요?
우리 자신입니다.
더는 신랑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가 신랑을 자아에게 빼앗긴 때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 때는 결국 신부의 거울이 되어야 할 신랑을 빼앗긴 때입니다.
단식을 하는 사람들은 왜 단식할까요?
그들에게 어떤 목표가 되는 신랑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고긴스’의 인생 이야기는 극도의 정신적 강인함과 신체적 훈련의 토대 위에 세워진 놀라운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내력 운동 선수, 동기 부여 연설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그의 여정은 심각한 도전과 좌절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강렬한 신체 운동, 엄격한 다이어트, 단식이라는 그의 유명한 아침 일과를 채택하게 된 그의 삶의 주요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데이비드 고긴스는 1975년 2월 17일 뉴욕 버팔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학대적이고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역경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 트루니스 고긴스는 가족을 신체적으로 학대하여 격동적이고 충격적인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데이비드와 그의 어머니는 결국 학대하는 가정에서 벗어났지만, 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긴스는 어린 시절 인종 차별, 괴롭힘, 빈곤에 직면했고, 그 결과 학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심각한 우울증과 자존감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고긴스는 20대 초반에 종종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묘사합니다.
혈액질환과 관련된 의학적 이유로 공군을 제대한 후, 그는 깊은 우울감을 느꼈고 해충 구제업자로 일했습니다.
당시 고긴스는 심하게 과체중이었고, 체중이 거의 300파운드였으며, 움직이지 않고 건강에 해로운 생활 방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범함과 자기 의심의 악순환에 갇힌 것처럼 느꼈고, 이는 신체적, 정신적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그에겐 닮아가야 할 삶의 모델이 없었습니다.
고긴스가 해군 특수부대의 TV 광고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의 300파운드인 고긴스는 SEAL 훈련에 필요한 체력 요건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고, 자격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100파운드 이상을 감량해야 하는 시간이 겨우 3개월뿐이었습니다.
이 촉박한 마감일과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그의 사고방식에 급진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한 고긴스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훈련하는 매우 엄격한 아침 일과를 개발했습니다.
강렬한 신체운동, 엄격한 식단과 단식, 극도의 규율과 자기 책임으로 결국 필요한 체중을 감량하고 BUD/S(기본 수중 폭파/SEAL) 훈련에 성공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SEAL 훈련 중에 극심한 신체적 어려움에 직면했고, 부상으로 인해 세 번이나 ‘지옥 주간’(강렬한 신체적 정신적 훈련 기간)을 견뎌내고 해군 특수부대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나에게 상처줄 수 없다』(Can't Hurt Me)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들,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하고만 어울리려고 합니다.
반면에, 흔치 않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는 그 ‘느낌’을 아주 싫어합니다.
‘자 이제 뛰러 가자.’ 그런 걸 아주 싫어합니다.
고난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고난 끝에는 소수만 아는 세계가 있어요.
매우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는 스스로를 찾게 되거든요.”
데이비드 고긴스가 평범함을 거부하고 찾으려고 했던 자기 자신, 이것이 우리에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처절한 고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해방되시면 어떨까요?
나의 모습이 내가 기대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일 때는 그분과 함께 즐길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는 삶이 새 포도주에 새 부대가 되는 길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랑을 빼앗겼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것 자체가 신랑의 뜻을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때 단식을 하였습니다.
이틀을 꼬박 굶었습니다.
그러자 신랑이 다시 오셨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주신 분이 오시니 더는 단식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서 바로 밥을 먹었습니다.
그때 밥알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먹었습니다.
무언가 불만이 많았는데 매일 먹는 밥알 하나하나가 감사해서 많이 퍼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식하면 겸손해집니다.
그때 느꼈던 것은 ‘이틀만 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는데 내가 뭐 대단하다고 주님께 불만이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식하면 자아의 힘이 죽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잡았던 힘이 풀립니다.
이때 신랑이 풀려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나셨듯이, 나를 통해 신랑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단식은 단식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갇힌 그리스도를 해방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생활 양식>
인류 역사 안에서 새로운 가치가 등장하고 확산되어 보편화될 때 겪는 저항이나 혼란이 만만치 않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가치 회복의 과정이었지만, 노예 제도의 폐지나 흑인들의 인권 회복, 어린이나 청소년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여성들의 위치나 신분이 신장되는 과정 등에서 넘어야 할 산이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를 큰 고민과 혼란으로 밀어 넣는 새로운 가치들도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AI 등 최첨단 매체의 대중화와 일반화로 인해 겪는 가치관의 혼돈 등입니다.
십 년, 이십 년 전만 해도 남녀 수도회는 한 수도자가 스마트폰을 개인으로 소지하는 문제로 치열하게 갑론을박을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마트폰이 아주 탁월한 사목과 친교, 기도와 복음 선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물론 과몰입이나 남용으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서 새로운 가치나 문화가 등장할 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지녀야 할 능력이 있으니, 복음이란 프리즘에 비춰 균형잡힌 해석을 하려는 노력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수많은 가치와 문화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이 거듭되었는데, 그중 가장 특별하고 엄청나며 고귀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인물의 등장일 것입니다.
가장 감미롭고 부드러운 풍미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며, 우리 모두를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실 분, 이른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자마자 우리 인간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고수해오던 가치나 생활 양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셨습니다.
왕은 더 이상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섬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맨날 구박받고 얻어맞던 노예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손가락질 당하던 이방인이나 세리나 죄인들도 벗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가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한가지 강력한 요청을 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가치이신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운 생활 양식, 즉 복음적인 삶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새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버려야 합니다>
1)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엄격하게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을 했고, 그의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본받아서 자주 단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바리사이들은 그렇다 치고, 요한의 제자들은 왜 그런 단식을 했을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지 않았는가?
사실 실제 상황을 보면, 요한의 증언을 믿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된 사람들, 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조금은 있긴 한데(요한 1,37), 그냥 세례자 요한 곁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요한 3,25-26).
그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요한의 증언을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든 그랬습니다.
어쩌면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아마도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요한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2)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을 할 필요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의 기준으로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에 사도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그들이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루카 24,41), 곧바로 음식을 예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루카 24,42).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사도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혀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단식을 합니다.
3)
예수님의 수난 당시의 신자들 가운데에는, 모든 것이 다 허망하게 끝나버렸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고, 수난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단식을 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행하는 단식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희망하고, 또 그렇게 부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4)
‘새 옷’과 ‘새 포도주’에 관한 말씀을 앞의 단식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새 옷’과 ‘새 포도주, 새 부대’는 이미 오신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사는 ‘새로운 신앙생활’로,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낡은 신앙생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그것이 곧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거부하고 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만 살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기준으로는 ‘헌 옷’을 입고 있는 것이고, '묵은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의 생활은 같을 수가 없고, 같은 생활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5)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 승천과 성령강림 후에도 유대교에 속해 있으면서 유대교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안의 한 분파 같은 모습이었는데, 스테파노 순교자의 순교 후에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심하게 박해하면서 결국 갈라서게 됩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갈라선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느냐, 아니냐?”, 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느냐, 아니냐?”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비록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고, 구약성경을 함께 사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두 종교는 그냥 ‘서로 다른 종교’일 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축제의 때, 단식의 때 - '분별의 지혜'>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시편 37,5)
엊저녁 식사 시 알레르기 비염으로 요동치던 심신이 자고 일어나니 씻은 듯 정적의 평화입니다.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이 지혜이자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새벽 일어나 강론 쓰기 전 대략 일별해 보는 인터넷 뉴스입니다.
예전에는 수천명이 보던 굿뉴스 묵상란이 요즘은 백명 안팎입니다.
아마도 유투브에 몰려가 있는 듯 합니다.
시골이 소멸해가고 수도권이 번성하는 이치와 흡사합니다.
블랙홀 같은 유투브는 축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끝없는 심연입니다.
정말 분별의 지혜와 절제가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9월2일부터 9월13일까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4개국에 제45차 해외 사목 순방길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고 기뻐하는 사진과 더불어 몇 메인 뉴스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감히 형제애를 꿈꾸도록 하자!”
“여러분의 최고의 환영과 믿음에 감사한다.”
“인도네시아는 내적믿음의 대화에서 모범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향한 도상의 순례자들로서 우정을 키워가도록 하자.”
“여러분은 삶의 올림픽에서 사랑의 챔피언들이다.”
제목들도 영감과 꿈을, 생명과 빛을 제공합니다.
시대의 현자, 영원한 청춘, 88세 고령의 가톨릭교회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현자의 말씀도 분별의 지혜에 도움이 됩니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안다.
부끄러움은 어른이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다산>
부끄러움을 아는 자가, 하나 덧붙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
부끄러운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야 한다면 부끄러워 할 일이 없다.”
<맹자>
어제 읽은 노자 도덕경 16장 한 말마디가 너무 좋아서 게시판에 써서 붙여 놨습니다.
'스스로 비우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라(致虛極 守靜篤;치허극 수정독)'
이런 이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이들입니다.
자기를 몰라 남을 심판하지 정말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을 결코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들 역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종이자 하느님의 신비의 관리인임을 자부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묻습니다.
이 물음에는 심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물론 인간 현실을 모르는 어리석고 교만한 이들입니다.
단식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사랑이 절대적 가치의 분별의 잣대라면 단식은 상대적 가치에 불과합니다.
아무 때나 단식할 것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는 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축제의 때는 단식할 수 없다 합니다.
아무 때나 단식으로 고해인생을 자초하지 말고 축제의 때는 기쁘고 즐겁게 축제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단식한다면 과시가 아닌 이웃에게 숨겨진 단식, 하느님께 열린, 사랑의 단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주의가 만연한 세상, 곳곳에 맛집들이 넘치고 먹는 재미로 살아가는 이들이 넘치는 시절, 자발적 단식이 유행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부끄러울 정도로 정말 너무 많이 잘 먹습니다.
밥을 배불리 먹고 카페에서 또 빵과 커피를 먹고 마십니다.
먹는 것 역시 빈부의 양극화가 뚜렷합니다.
때로 넘치는 식단을 대할 때는 “먹기도 힘들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많은 사람들이 먹는 재미(식욕), 성(性;sex) 재미(성욕), 돈맛(물욕)이란 기본적 욕구로 살아갑니다.
욕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나친 탐식, 탐애, 탐욕이 문제인 것입니다.
공자의 군자 삼락(三樂)이라는 '배움의 즐거움, 친구와 만남의 즐거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 초연한 즐거움'에다 하느님 찾는 맛의 즐거움을 더한다면 정말 이상적이겠습니다.
밥맛이, 성(sex)맛이, 돈맛이 아닌 하느님 맛, 말씀의 진리 맛으로 사는 이들이 정말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건강한 이들이겠습니다.
이래서 영적훈련과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며 축제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발상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유연한 단식,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수행에 유연할 것을 촉구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렇게 묵은 포도주가 상징하는 옛 것에 습관화, 보수화되어 꼰대가 되면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유연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새삼 부단한 내적 혁명의 회개가 절실함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좋은 분별의 지혜를 지니고 늘 “새 포도주에 새 부대”의 현실을 살게 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시편 37,2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가치의 문제>
본당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역이 있습니다.
알렌 멕키니 구역입니다.
코로나 전에는 구역장을 중심으로 구역모임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구역장이 이사 갔고, 성당에서 멀리 있다 보니 구역 모임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점심 봉사 구역에서도 빠지게 되었습니다.
비가 안 오면 메마르고 메마르면 더욱 비가 안 내리듯이 구역모임이 안 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새로이 구역장이 선임되었고 구역장과 함께 반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큰 기대를 안 했는데 반 미사에 아이들과 어른 20명이 넘게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가진 걸 팔아서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미사를 하면서 숨어있는 보석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렇게 몇 번 더 반 미사를 다니면 예전처럼 구역모임이 잘 되리라 생각합니다.
긍정의 마음으로 구역을 이끌어가는 구역장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27기 사목회가 시작되었고, 첫 번째 행사는 ‘본당의 날’입니다.
주관 부서는 ‘친교분과’입니다.
26기에서는 ‘친교분과’가 공석이었다고 합니다.
새롭게 선임된 친교분과 형제님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의욕이 넘치는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어떻게 하면 즐거운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분입니다.
첫 번째는 ‘먹을거리’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형제님들을 중심으로 고기를 구워 나누어 주자고 하였습니다.
‘고기 굽기 경연대회’입니다.
교우 분들은 맛을 보고 스티커를 경연자의 이름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본당의 숨어 있는 요리사가 능력을 보여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음악’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지난번 성령 찬양의 밤에 능력을 보여주었던 찬양 팀이 시작과 마무리에 멋진 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길거리 노래방도 개설해서 노래도 부르고, 선물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세 번째는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입니다.
구역별로 ‘족구대회’를 하기로 했고, 개인별로 ‘피클 볼’ 게임을 하기로 했고, 게임 장소를 만들어서 모든 게임을 마친 분에게는 경품권을 주기로 했습니다.
시상식과 경품추첨을 통해서 본당의 날 행사를 마치겠다고 합니다.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 친교분과가 있어서 든든합니다.
지난 2월 13일에 부임했으니, 어느덧 6개월이 지났습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전임 신부님 두 분이 모두 저와 동창신부님입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있었기에 예전에 몇 번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의 초대로 교우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12년간 사목하던 곳이어서 낯설지가 않습니다.
작년에 부임한 보좌신부님은 제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보좌신부님이 있으니 든든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한국에서 오지 않고 5년 동안 뉴욕에 있으면서 미국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미국에 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을 이미 다 거쳤습니다.
쇼셜넘버를 5년 전에 받았습니다.
미국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 중에 하나인 운전면허증도 5년 전에 받았습니다.
미국 은행에서 발해해준 신용카드도 받았습니다.
2년 전에는 신문사에 있으면서 그린카드도 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외적인 면에서는 준비된 본당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준비는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하고, 부족했던 제자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도망치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셨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예수님께 의탁하며 지내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나의 욕심과 욕망을 먼저 생각한다면 지금 생산된 포도주와 부대도 낡은 포도주와 부대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한다면 2000년 전의 포도주와 부대도 언제나 새 포도주와 새 부대입니다.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코린토1 4,1-5)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는 단식>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잘 알 것입니다.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독일 작곡가로 영웅, 운명, 황제, 합창 등의 교향곡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쓴 9번째 교향곡 ‘합창’을 발표할 때, 그의 귀는 완전히 들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럼에도 그는 열심히 작곡에 임했고, 합창 교향곡 마지막 4악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작곡합니다.
들리지도 않는데 왜 작곡했을까요?
자기는 듣지 못해도 타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본인이 경험할 수 없는 기쁨을 다른 이와 나누기 위해 이 곡을 쓴 것이 아닐까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실제로 자기가 경험할 수 없는 기쁨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타인과 내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한 것도, 남만 행복한 것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타인의 행복을 보면서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그 행복에 문제 있는 것이라면서 어떻게든 깎아내려고 합니다.
나만 옳고 나만 행복하다면서, 상대의 행복이 잘못된 것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과연 진정한 행복일 수 있을까요?
타인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에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짜 사랑의 삶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경건한 사람들로 여겨졌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정말로 율법에 충실했고 신앙심도 깊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이런 노력과 달리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니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그 행복한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기쁨을 깨뜨리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에서는 혼인 잔치를 일주일 동안 치렀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단식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신랑이고, 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인 그리스도인은 단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빼앗길 날,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게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일 뿐이었습니다.
자기의 열심을 알리기 위한 것,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단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짜 단식을,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는 단식을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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