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돌아오오. 민주회복 어서 오오~” 개사해 부르며 기도
2015.11.08
김영삼은 "민주주의 하자. 대통령 직접 선거를 하자."고 하면서 유신헌법 빨리 철폐해
민주주의 하자고 거듭 얘기했다. 그러자 박정희가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정희가 울지만 않았으면 언제 할 거냐고 따져 물었을 텐데 박정희가 울고
있어서 김영삼 자신이 추궁을 못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민주주의를 꼭 하겠다.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 이런 뜻으로 들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이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김 총재,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공표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75년 박정희와 청와대에서 회담한 뒤 선명야당 노선을 포기한
것이 분란의 불씨를 키웠다. 그해 10월 신민당 의원 김옥선이 국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관제데모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옥선은 공화당과 유정회의 거센 반발로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이 때 김영삼이 아무런 행동도 안 한 것이 큰 의혹을 일으켰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 대한 반발이 커지자 김영삼은 자기 세력 중심 단일지도체제
강화로 대응했다. 김영삼에 도전하는 이철승·김원만을 비롯한 비주류는 집단지도체제로
당헌을 바꾸는 것만이 당이 사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976년 5월 전당대회는 폭력의 아수라장이었다. 조폭 김태촌이 전당대회가 열리는
관훈동 신민당 당사로 쳐들어가 당사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김태촌의 배후조종자는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날 밤 ‘김대중이 반항하면 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어요”
2015.12.20
신군부는 5월17일 밤 10시를 작전 개시 시점으로 정해놓고 미리 짠 각본대로 움직였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이 이날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 회의를 소집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맞춰 검거할 800여명의 예비검속자 명단을 통고했다. 이 명단에는 학생 소요
배후조종자로 분류된 주요 인사 이름이 들어 있었다.
학생소요 배후조종자 명단에는 김대중과 동교동 비서들, 예춘호·문익환·고은·한승헌·
이문영을 비롯한 김대중과 가까운 재야인사들, 김홍일·배기선·송기원·신계륜·이석표·
설훈·심재권·이해찬을 비롯한 청년·학생운동 지도자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김대중은 5월17일 집에서 잡혀 나간 뒤 곧바로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중앙정보부에 잡혀오고 20일쯤 지난 뒤에 수사관이 김대중에게 물었다. “광주에서 큰
사건이 난 것을 아시오?” “모릅니다.”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아시오?” 김대중은
다시 “모른다”고 대답했다. 수사관은 “500만원을 주고 반정부 운동을 시키지 않았느냐?”
며 자백하라고 윽박질렀다. 김대중은 정동년과 일면식도 없었다. “그런 일 없다”고
대답하자 수사관은 고문이라도 해야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후 진행 과정>
1980년 12월 카터 대통령이 브라운 국방장관을 보내 전두환에게 김대중을 사형시키면
안 된다고 경고.
레이건 정부 국가안보보좌관 앨런이 워싱턴 주재 한국 중앙정보부 책임자 손장래 통해
전두환에게 김대중 처형을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보냄.
1981년 1월 23일 대법원 사형 확정판결 내려졌으나 오후 임시국무회의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1981년 1월 31일 청주교도소로 이감 뒤 1982년 3월 1일 20년으로 감형.
1982년 12월 노신영 안기부장이 이희호 여사를 찾아와 미국 가겠다고 하면 김대중이 가족과
함께 갈 수 있도록 하겠다 제안.
안기부장이 요구한 정치활동 포기 각서 작성을 김대중이 거절하자 이희호 여사가 대신 써서
주고 12월 16일 병원서 치료받은 뒤 23일 미국 망명.
<신민당 전당대회 몰려온 조폭에 대응하는 당원들>
첫댓글 그런데도 지미 카터가 전두환의 5.18광주학살을 왜외면했는지 이해가 안가요.
저도 그게 의문이네요.
@봉도사이강주 제가 생각하기에 유대자본들이 지미 카터한테 돈으로 암묵적인 협박해서 지미 카터가 전두환의 5.18광주학살을 외면하게 한것 같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