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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성소(聖召); 부르심을 받음
구약성서를 보면, 예언자 예컨대 이사야든, 예레미야든, 아모스든,
예언자로서 신(神)에게 부르심을 받은 기사가 있습니다만,
마르코복음 1장 23절은
예수께서 신(神)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으신 기사입니다.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자각은,
그분이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안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등 여러 종파가 있었습니다만,
별도로 에세네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에세네파라는 것은
요르단강 동쪽 광야 지방에 거주하며
거친 옷에 거친 음식, 독신의 금욕 생활을 하고, 자주 단식하며,
또한 하루에도 여러 번 강에 뛰어들어 정결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 무렵 유대의 종교는 부패하여,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는 완전히 형식적으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유대 국가가 독립을 잃고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라를 구해야 할 종교, 종교가가 완전히 형식적으로 타락하여
무력화(無力化)되어 있었기에,
이에 대한 하나의 종교개혁 운동으로서 에세네파가 일어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낙타 털로 된 거친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르며,
메뚜기와 들꿀을 상식으로 삼았다고 하니,
그 자신 에세네파의 감화를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세네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종교개혁자로서 출현하였습니다.
에세네파는 하루에도 여러 번 물에 들어가 정결 의식을 하였습니다.
많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물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아무리 물로 몸을 씻는다 한들
그것으로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물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중시하는 에세네파도
형식주의이며 허위라고 하였습니다.
물에 들어갈 거라면 한 번, 일생에 한 번이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형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회개란 마음을 바꾸어 새롭게 하는 것으로,
원어인 그리스어로는 메타노이아(metanoia)라 하며,
제가 매우 좋아하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서 31장 18절에,
내가 진실로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하는 것을 들었노라,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계하시매 내가 징계를 받았나이다,
멍에에 길들지 않은 송아지같이,
여호와여, 주는 나의 신이여 나를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이키겠나이다(렘 31:18).
"저를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시면 돌이키겠나이다,
저는 돌아가고 싶사오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메타노이아, 곧 회개입니다.
백팔십 도의 회전이라고 할까요,
빙그르르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활의 목적, 생활의 목표, 생활 태도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세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전에 가서 번제 같은 제물을 바치는 데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에세네파의 광야에서의 고행이나
정결 의식의 생활에도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마음의 방향 전환이요,
온몸을 신(神)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또한 그것만으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큰 개혁입니다.
참으로 "예언자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위대한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영적 능력과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한 소문이
온 나라에 널리 퍼져, 사람들이 각지에서 줄줄이
그에게로 와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도 나사렛 마을에서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본래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는가에 대해,
마태복음은 특별히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마 3:13~15).
그러나 마르코복음은 그 문제를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던 마을에서 나오셔서 거침없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곧 하늘이 갈라지며 영(靈)(=수호령, 지도령)이 자신에게
— 원어 그대로 말하면
"자기 안으로" — "자기 위에"라고 되어 있지만,
마르코복음 쪽이 더 생생합니다 —
"자기 안으로" 영(靈)이 뛰어들었다고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자기 민족의 죄를 느끼셨기 때문일까요.
혹은 인류의 죄를 느끼셨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처럼 분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세례를 받으신 것이겠지요.
결코 자기 한 사람만을 별도의 존재로 취급하는 자각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은 단지 사람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는
참된 종교란 신(神)의 일이지
형식의 일이 아니라고 세례자 요한이 말하는 바,
그것이 진리라고 느끼시어
요한의 개혁 운동에 찬동을 표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른바 청출어람의 영예로,
세례의 영적 의미를 요한 이상으로 밝히셨습니다.
곧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성령(빛)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임을 나타내시는 데 있어,
요한은 회개(반성;뉘우쳐 고침)
곧 마음의 방향 전환이라는 것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런 형식도 쓰지 않으시고,
직접 성령(=빛)에 의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종교의 순수한 영적 의미는 예수에 의해 밝혀지셨습니다.
그분은 이 점에서도 예언자, 개혁자 이상의 개혁자이셨습니다.
그것은 뒷일로 하고,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요르단강에서 올라오신 순간,
그분의 마음에 갑자기 압도적이고 강렬한 자각이 솟아올랐습니다.
곧 그분의 마음은 신(神)의 영(=수호령, 지도령)과
깊고 강한 사랑으로 결합되었음을 자각하신 것입니다.
영(靈)이 비둘기같이 예수 안으로 뛰어들었다고 느끼셨습니다.
비둘기는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새이며,
게다가 그 비상하는 속도는 놀랍도록 빠릅니다.
영(靈)(=수호령, 지도령)이 비둘기같이 예수 안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예수의 마음이 신(神)의 사랑을 받아들여,
신(神)의 마음에 강하게 연결되시고,
신과 사랑의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비둘기(수호령, 지도령)"라는 것은,
이때 예수께서 신(神)의 영(靈)을 부르신 애칭입니다.
신(수호령)과 예수와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맺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참으로 부자(父子)의 관계였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니,
너는 내 사랑하는 자식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네가 좋다, 마음에 들었다,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신이 사랑하는 자식이라는
자각을 강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성소(聖召)(=부름 받으심) 체험입니다.
신에게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신의 사명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신의 사명을 맡는 자는
"신의 종"이라 (사람들이) 말하고, 또한 (그는) "신의 종"이라고도 불립니다.
이사야서에 "나의 영을 그에게 주는 나의 택한 자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리니,
저 이방인에게 도를 보이리라"(사 42:1),
또 "보라, 나의 종이 지혜로 행하리라"(사 52:13) 등이라고 있듯이,
신에게 선택되어
신의 말씀을 맡기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 불리고 있다.
그러나 신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을
신의 "자식“이라고 부른 곳도 있고(출 4:22, 호 11:1, 사 1:2),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로서
그 왕을 신의 자식이라 부른 곳도 있습니다(시 2:6~7, 89:26~27).
이와 같이 구약성서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를 신의 종"이라고도,
또한 "신의 자식"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신약성서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를 "신의 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신의 자식"과 "신의 종"은 말하자면 동의어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신의 자식"이라 불리시는 것은,
단순히 "신의 종"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종은 주인의 명을 받아 사명을 수행하는 자이지만,
자식은 아버지와 같은 마음, 같은 성품을 지닌 자입니다.
부모 자식 사이의 가장 깊은 유대는 내면의 유대이며,
거기에 진정한 부모 자식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신과 예수와의 사이도 또한 그러하여,
내면적인, 마음과 마음의 연결에 있어서,
예수는 신의 자식이셨습니다.
예수는 신의 종 이상의 분, 곧 "신의 자식"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신의 자식"이라는 하늘로부터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깊이 숙고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에 관해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크면 클수록,
과연 그 계시에 걸맞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어야 합니다.
"나는 신의 자식이다, 한번 크게 해치워 보자" 같은 천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신의 자식이라는 음성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가까운 이들을 피하여 광야로 숨어 들어가,
사십일 낮과밤을 짐승이 사는 광야에 머무르시며
고요한 성찰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짐승이 있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고독을 더해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어떤 시험을 받으셨는지
그 내용은 마르코복음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로 보충해 보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세상 만물을 주겠으니 마귀에게 절하라"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신의 나라의 복음 전파에 있어
빵을 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빵을 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사람이 굶주려도 빵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말도 안되는 잘못입니다.
예수께서는 굶주린 사람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던가요.
그분은 사천 명, 오천 명에게 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많은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생의 힘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을 위하여 그분은 일생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돌을 변하게 하여 빵으로 만드는 것 자체를,
예수께서 무의미하다거나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은,
자신이 신의 자식이라는 증거를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돌을 빵으로 바꾸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등의
불가사의한 일을 할 수 있으면 신의 자식이고,
그것을 할 수 없으면 신의 자식이 아닌 것일까요.
이 사고 방식이 악마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신과의 마음의 사랑의 언약을 믿으시고,
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신의 자식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께는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이 있으셨고,
그 능력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신의 자식이시라는 증거를,
기적적 탄생이나 기적적 행위에서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매일매일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 아니며,
또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분이 신의 자식이시라는 증거는
신(수호령, 지도령)과의 영의 교감이 참으로 깊다는 데 있으며,
신과의 영의 교감에서 신과 사랑을 굳게 약속했다는 것,
이것이 그 증거이고,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이상은 일체 불필요합니다.
신과 영에 있어서 굳게 손을 잡는 것,
완전히 뉘우쳐 고치고 신(神)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신과 굳게 손을 잡는 것,
이것이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좋습니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의 사십일 간의 생활로,
자신이 신의 자식임의 근거를 확인하신 후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곧바로 전도의 생애에 들어가지는 않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될 때까지는
예수께서는 뒤편에 계시며 전도자로서
공공연히 세상에 얼굴을 내미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존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체포되었을 때, 그
분은 분연히 일어서셨습니다.
요한의 싸움을 이어받아,
요한 이상의 싸움을 하시기 위해, 그
분이 일어서셔야 할 때가 온 것이었습니다.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즉 그분의 복음 전파 개시에 이른 경위입니다.
같은 것을 우리도 각자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
선포를 듣고, 우리를 이끌어주라고 신에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몇 번이고 스스로 신에게 돌아가려고 생각해서 노력해 봅니다만,
할 수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얼굴의 방향을 바꾸어,
신의 방향으로 돌아서서 정면으로 신의 거룩한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그 순간에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놀랍니다.
우리가 신의 자식?
이 무력무능하고 더럽고 천한 우리가 신의 자식?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너는 아무 선행도 하지 못하고
나쁜 일만 하면서 돌을 빵으로 바꾸는 힘도 없지 않느냐,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용기도 없고
돌을 빵으로 바꾸는 힘도 없지 않느냐",
이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시험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향하여, "
그러므로 너는 신의 자식이 아니다"라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는 이겼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여, 너의 이름은 무력(無力)이니라"라고.
이렇게 하여 사탄은 신과 우리의 부모자식의 관계에 끼어들어,
모처럼 신을 향해 돌아선 우리의 얼굴을 다시금
신으로부터 떼어 놓으려 합니다.
이 문제 때문에 사십일 밤낮을 괴로워하셨습니다만,
그분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훌륭한 해결을 해 주셨습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신의 자식임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영(수호령, 지도령)으로 신에게 연결되는 것이,
신의 자식이라는 증거입니다.
신과 함께 조금이라도 하면,
무엇을 할 수 없더라도 신의 자식이며,
신은 그것을 기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자식인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공포를 제거한다."고 합니다(요일 4:18).
이러한 사랑을 신으로부터 받은 자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대적하는 자가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자가 누구냐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二 イエスの聖召
2. 예수의 성소(聖召); 부르심을 받음
旧約聖書を見ますと、預言者たとえばイザヤにしても、エレミヤにしても、アモスにしても、預言者として神に召し出された記事がありますが、マルコ伝一章二十三節はイエスが神に召し出された記事です。
구약성서를 보면, 예언자 예컨대 이사야든, 예레미야든, 아모스든, 예언자로서 신(神)에게 부르심을 받은 기사가 있습니다만, 마르코복음 1장 23절은 예수께서 신(神)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으신 기사입니다.
イエスの聖召の自覚は、彼がヨルダン川でバプテスマのヨハネから洗礼を受けて、水より上ったその瞬間に、このであります。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자각은, 그분이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当時ユダヤ教の中にはパリサイ派、サドカイ派等いろいろな宗派がありましたが、別にエッセネ派というのがありました。
당시 유대교 안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등 여러 종파가 있었습니다만, 별도로 에세네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このエッセネ派というのはヨルダン川の東荒野地方に居住して粗衣粗食、独身の禁欲生活をなし、しばしば断食し、また日に何度も川に飛び込んで禊をしました。
이 에세네파라는 것은 요르단강 동쪽 광야 지방에 거주하며 거친 옷에 거친 음식, 독신의 금욕 생활을 하고, 자주 단식하며, 또한 하루에도 여러 번 강에 뛰어들어 정결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そのころユダヤの宗教は腐敗し、エルサレムの神殿礼拝は全く形式的に堕落していました。
그 무렵 유대의 종교는 부패하여,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는 완전히 형식적으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そして政治的にはユダヤ国家は独立を失い、ローマ帝国の属国となっていた。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유대 국가가 독립을 잃고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国を救うべき宗教、宗教家が全く形式的に堕して無力化しているので、これに対し一つの宗教改革運動としてエッセネ派が起ったのであります。
나라를 구해야 할 종교, 종교가가 완전히 형식적으로 타락하여 무력화되어 있었기에, 이에 대한 하나의 종교개혁 운동으로서 에세네파가 일어난 것입니다.
洗礼者ヨハネは駱駝の毛の粗衣を着用し、生皮の帯をしめ、蝗や野蜜を常食としていたというから、彼自身エッセネ派の感化を受けたに相違ありません。
세례자 요한은 낙타 털로 된 거친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르며, 메뚜기와 들꿀을 상식으로 삼았다고 하니, 그 자신 에세네파의 감화를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しかし彼はエッセネ派よりもさらに一歩進んだ宗教改革者としても出現しました。
그러나 그는 에세네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종교개혁자로서 출현하였습니다.
エッセネ派は一日に何度も水に入って禊をしました。たくさんの度数入れば入るほどよいと思った。
에세네파는 하루에도 여러 번 물에 들어가 정결 의식을 하였습니다. 많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しかるにヨハネは、水に入るというのは一つの形式だ、いくら水でからだを洗ったとてそれで心が清まるものではない、水に入ることとそのことを重要視するエッセネ派も形式主義であり、虚偽である。水に入るなら一度、一生に一度だ、水に入るのは罪の赦しを得さする悔い改めの型であるのだと、主張しました。
그런데 요한은, 물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아무리 물로 몸을 씻는다 한들 그것으로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물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중시하는 에세네파도 형식주의이며 허위라고 하였습니다. 물에 들어갈 거라면 한 번, 일생에 한 번이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형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悔い改めとは心を変えて新たにすることでありまして、原語たるギリシヤ語ではメタノイアといい、私の非常に好きな語です。
회개란 마음을 바꾸어 새롭게 하는 것으로, 원어인 그리스어로는 메타노이아(metanoia)라 하며, 제가 매우 좋아하는 말입니다.
エレミヤ記三十一章十八節に、我まことにエフライムの自ら嘆くを聞けり、いわく汝は我を懲しめ給う、我は懲しめを受けたり、軛に馴れざる犢のごとくに、エホバよ、汝はわが神なれば我を牽転し給え、しからば我転るべし。
예레미야서 31장 18절에, 내가 진실로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하는 것을 들었노라,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계하시매 내가 징계를 받았나이다, 멍에에 길들지 않은 송아지같이, 여호와여, 주는 나의 신이여 나를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이키겠나이다(렘 31:18).
「私を牽転して下さい、そうすれば転られる、私は転りたいと思うのですが、自分の力では転られません」、これがメタノイア、すなわち悔い改めであります。
"저를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시면 돌이키겠나이다, 저는 돌아가고 싶사오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메타노이아, 곧 회개입니다.
百八十度の回転と言いますか、くるりと向きを変えることです。生活の目的、生活の目標、生活態度の向きを一変せよと言うのであります。
백팔십 도의 회전이라고 할까요, 빙그르르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활의 목적, 생활의 목표, 생활 태도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세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神殿に行って燔祭などの犠牲を捧げることに救いがあるのではない。しかしエッセネ派の荒野の難行苦行や禊の生活にも救いがあるのではない。救いは心の向き直りだ、からだを全体を神様の方へ向けることだ。
신전에 가서 번제 같은 제물을 바치는 데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에세네파의 광야에서의 고행이나 정결 의식의 생활에도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마음의 방향 전환이요, 온몸을 신(神)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それではじめて、またそれだけで、罪の赦しが得られるのだ。これが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教えです。これは非常に大きな改革です。実に「預言者中バプテスマのヨハネより偉大なるものなし」であります。
그래야 비로소, 또한 그것만으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큰 개혁입니다. 참으로 "예언자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위대한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ヨハネの霊力と権威ある教えとの風評が国内にあまねくなり、人々が各地から続々と彼のもとに来てヨルダン川で洗礼を受けました。
요한의 영적 능력과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한 소문이 온 나라에 널리 퍼져, 사람들이 각지에서 줄줄이 그에게로 와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その時イエスもナザレの村より出て洗礼を受けたのであります。
그때 예수께서도 나사렛 마을에서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イエスはどういう気持で洗礼を受けられたか。元来罪のないイエスが、なぜ「罪の赦しを得さする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を受けたかについて、マタイ伝は特に説明を加えています(マタイ三の一三ー一五)。
예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본래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는가에 대해, 마태복음은 특별히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마 3:13~15).
しかしマルコ伝はその問題を何にも苦にしていません。イエスは他の者と同じく居村から出てきて、さっさと洗礼を受けた。
그러나 마르코복음은 그 문제를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던 마을에서 나오셔서 거침없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そして水から上がるとただちに天が裂けて御霊が己に、原語どおりに言えば「己の中に」ーー「自分の上に」となっていますが、マルコ伝の方がいきいきとしているーー「自分の中に」御霊が飛び込んだと感じた。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곧 하늘이 갈라지며 영(靈)(=수호령, 지도령)이 자신에게 — 원어 그대로 말하면 "자기 안으로" — "자기 위에"라고 되어 있지만, 마르코복음 쪽이 더 생생합니다 — "자기 안으로" 영(靈)이 뛰어들었다고 느끼셨습니다.
そして「汝はわが愛しむ子なり、我汝を悦ぶ」という声を聞いた。
그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なぜイエスは洗礼を受けられたか。己の民族の罪を感じたからか。あるいは人類の罪を感じたためか。
왜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자기 민족의 죄를 느끼셨기 때문일까요. 혹은 인류의 죄를 느끼셨기 때문일까요.
おそらくイエスは何もこんなに分析的に考えずに洗礼を受けたのであろう。彼は決して自分一人を別人扱いにする自覚をもって洗礼を受けられたのではなかろう。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처럼 분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세례를 받으신 것이겠지요. 결코 자기 한 사람만을 별도의 존재로 취급하는 자각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彼はただ人を救い国を救う真の宗教とは神のことであって形式のことではないと洗礼者ヨハネが言っているところ、それは真理だと感じて、ヨハネの改革運動に賛成を表明せられたのである。
그분은 단지 사람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는 참된 종교란 신(神)의 일이지 형식의 일이 아니라고 세례자 요한이 말하는 바, 그것이 진리라고 느끼시어 요한의 개혁 운동에 찬동을 표명하신 것입니다.
しかしイエスはいわゆる出藍の誉れで、洗礼の霊的意味をヨハネ以上に明かにされた。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른바 청출어람의 영예로, 세례의 영적 의미를 요한 이상으로 밝히셨습니다.
すなわちヨハネは水をもって洗礼を施しましたが、イエスは聖霊で洗礼を施さるることを表示するのに、ヨハネは悔い改めすなわち心の向き直りということを表明しました。
곧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성령(빛)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임을 나타내시는 데 있어, 요한은 회개(반성;뉘우쳐 고침) 곧 마음의 방향 전환이라는 것을 표명하였습니다.
しかしイエスは何らの形式を用いず、直接聖霊による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を宣べ伝えたのであります。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런 형식도 쓰지 않으시고, 직접 성령(=빛)에 의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心より心へ。心をもって心を。宗教の純霊的意味はイエスによりて明らかにせられた。彼はこの点でも預言者、改革者以上の改革者でありました。
마음에서 마음으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종교의 순수한 영적 의미는 예수에 의해 밝혀지셨습니다. 그분은 이 점에서도 예언자, 개혁자 이상의 개혁자이셨습니다.
それは後のこととして、イエスがヨハネの洗礼を受けてヨルダン川から上った瞬間、彼の心にたちまちある圧倒的な強い自覚がわいた。
그것은 뒷일로 하고,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요르단강에서 올라오신 순간, 그분의 마음에 갑자기 압도적이고 강렬한 자각이 솟아올랐습니다.
すなわち彼の心は神の霊と深く強き愛において結びついたことを自覚したのである。
곧 그분의 마음은 신(神)의 영(=수호령, 지도령)과 깊고 강한 사랑으로 결합되었음을 자각하신 것입니다.
御霊が鳩のごとくにイエスの中に飛び込んだと感じた。それは鳩は愛と和とを表徴する鳥、しかもその飛翔する速力はすばらしく速い。
영(靈)이 비둘기같이 예수 안으로 뛰어들었다고 느끼셨습니다. 비둘기는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새이며, 게다가 그 비상하는 속도는 놀랍도록 빠릅니다.
御霊が鳩のごとくにイエスの中に飛び込んだというのは、イエスの心が神の愛を受感して、神の心に強く結びつき、神と愛の契りを結んだことである。
영(靈)(=수호령, 지도령)이 비둘기같이 예수 안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예수의 마음이 신(神)의 사랑을 받아들여, 신(神)의 마음에 강하게 연결되시고, 신과 사랑의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鳩」というのは、この際イエスが神の御霊を呼んだ愛称である。
"비둘기(수호령, 지도령)"라는 것은, 이때 예수께서 신(神)의 영(靈)을 부르신 애칭입니다.
神とイエスとは心の奥底における相愛の関係に結ばれた。そしてその間柄は実に父子の関係であった。
신(수호령)과 예수와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맺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참으로 부자(父子)의 관계였습니다.
「天より声出いず、汝はわが愛しむ子なり、我汝を悦ぶ」。お前が好きだ、気に入った、というのである。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니, 너는 내 사랑하는 자식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네가 좋다, 마음에 들었다, 하시는 것입니다.
ここにイエスは神の愛子たる自覚を強く与えられました。これがイエスの聖召の体験であります。
여기서 예수는 신이 사랑하는 자식이라는 자각을 강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성소(聖召)(=부름 받으심) 체험입니다.
神に召し出されるとは、神の使命を託せられることであります。神の使命を託せらるる者は「神の僕」といい、また「神の僕」とも言われる。
신에게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신의 사명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신의 사명을 맡는 자는 "신의 종"이라 말하고, 또한 "신의 종"이라고도 불립니다.
イザヤ書に「わが霊を彼に扶くるわが選び人を見よ、我わが霊を彼に与え、かの異邦人に道を示すべし」(四二の一)、また「見よ、わが僕知恵をもって行なわん」(五二の一三)、等とあるごとく、神に選び出されて神の言を託されし者は「僕」と呼ばれている。
이사야서에 "나의 영을 그에게 주는 나의 택한 자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리니, 저 이방인에게 도를 보이리라"(사 42:1), 또 "보라, 나의 종이 지혜로 행하리라"(사 52:13) 등이라고 있듯이, 신에게 선택되어 신의 말씀을 맡기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 불리고 있다.
しかし神の選民たるイスラエル民族を神の「子」と呼んだ個所もあり(出エジプト記四の二二、ホセア一一の一、イザヤ一の二)、イスラエル民族の代表者としてその王を神の子と呼んだ所もある(詩編二の六、七。八九の二六、二七)。
그러나 신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을 신의 "자식“이라고 부른 곳도 있고(출 4:22, 호 11:1, 사 1:2),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로서 그 왕을 신의 자식이라 부른 곳도 있습니다(시 2:6~7, 89:26~27).
かくのごとく旧約聖書は神に選ばれし者を「神の僕」とも、また「神の子」とも呼んでいるのであり、新約聖書でもペテロはイエスを「神の僕」と呼んでいます。
이와 같이 구약성서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를 신의 종"이라고도, 또한 "신의 자식"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신약성서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를 "신의 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神の子」と「神の僕」とは、いわば同義語であります。ただしイエスが「神の子」と呼ばれるのは、単に「神の僕」たる以上の意味をもつ。僕は主人の命を受けて使命を行なう者であるが、子は父と同じ心、同じ性質をもつ者である。親子の間の最も深き結びつきは内心の結びつきであって、そこに本当の親子関係があるのです。
"신의 자식"과 "신의 종"은 말하자면 동의어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신의 자식"이라 불리시는 것은, 단순히 "신의 종"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종은 주인의 명을 받아 사명을 수행하는 자이지만, 자식은 아버지와 같은 마음, 같은 성품을 지닌 자입니다. 부모 자식 사이의 가장 깊은 유대는 내면의 유대이며, 거기에 진정한 부모 자식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神とイエスとの間もまたそうであって、内面的な、心と心の結びつきにおいて、イエスは神の子であった。イエスは神の僕以上の者、すなわち「神の子」であり給う。
신과 예수와의 사이도 또한 그러하여, 내면적인, 마음과 마음의 연결에 있어서, 예수는 신의 자식이셨습니다. 예수는 신의 종 이상의 분, 곧 "신의 자식"이십니다.
イエスは「神の子」であるとの天来の声を耳にした。しかし自分でとくと考えてみなければならない。
예수께서는 "신의 자식"이라는 하늘로부터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깊이 숙고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わが身について神様から受けた啓示の大なれば大なるほど、はたしてその啓示に値するやの確信を得なければならない。
자기 자신에 관해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크면 클수록, 과연 그 계시에 걸맞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어야 합니다.
おれは神の子だ、一つ大いにやってやろう、などという浅薄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
"나는 신의 자식이다, 한번 크게 해치워 보자" 같은 천박한 것은 아닙니다.
イエスは自分が神の子であるという声を聞いて、居ても立ってもいられず、親近の者を避けて荒野にかくれ、四十日四十夜獣の住む荒野に居て、静思の時を過ごし給うた。
예수께서는 자신이 신의 자식이라는 음성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가까운 이들을 피하여 광야로 숨어 들어가, 사십일 낮과밤을 짐승이 사는 광야에 머무르시며 고요한 성찰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獣が居たことは、何物も居ないよりもいっそう寂しさを増したのであります。
짐승이 있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고독을 더해 주었습니다.
荒野でイエス様がどういう試みを受けられたか、その内容はマルコ伝には書いてありませんが、他の福音書で補ってみると、石を変えてパンにせよとか、高い所から飛び降りよとか、世界中の物を皆やるから悪魔を拝せよとかいうことであった。
광야에서 예수님이 어떤 시험을 받으셨는지 그 내용은 마르코복음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로 보충해 보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세상 만물을 주겠으니 마귀에게 절하라"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我々はこれらの問題をどう考えるか。神の国の福音宣伝上パンを与えることは無意味であろうか。パンを与えては悪いか。
우리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신의 나라의 복음 전파에 있어 빵을 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빵을 주면 안 되는 것일까요.
「人の生くるはパンのみに由るにあらず」と記されてあるから人が飢えてもパンをやる必要がないなどと考えるならば、とんでもない間違いです。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사람이 굶주려도 빵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말도 안되는 잘못입니다.
イエスは飢えた人をどんなに憐んだか。彼は四千人五千人にパンを与えました。
예수께서는 굶주린 사람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던가요. 그분은 사천 명, 오천 명에게 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彼がどんなに弱い人弱い人のために彼は一生の力を尽くされたのであります。世の中の貧しい人弱い人のために彼は一生の力を尽くされたのであります。
그분은 얼마나 많은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생의 힘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을 위하여 그분은 일생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石を変えてパンにすることそのことを、イエスが無意味である、善くないことであるというふうにはお考えにならなかったと思う。
돌을 변하게 하여 빵으로 만드는 것 자체를, 예수께서 무의미하다거나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イエスが荒野で試みられたことは、自分の神の子たることの証拠をどこに求めるかという点であった。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은, 자신이 신의 자식이라는 증거를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たとえば石をパンに変え、高い所から飛び降りる等の不思議な業ができれば神の子であり、それができなければ神の子でないのであろうか。この考え方が悪魔の試みでありました。
예를 들어 돌을 빵으로 바꾸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등의 불가사의한 일을 할 수 있으면 신의 자식이고, 그것을 할 수 없으면 신의 자식이 아닌 것일까요. 이 사고 방식이 악마의 시험이었습니다.
かしイエスは神との心の愛の契りを信じて、この試みに打ち勝たれたのであります。
그러나 예수께서는 신과의 마음의 사랑의 언약을 믿으시고, 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神の子とは、何ができるとかできないとかによりません。
신의 자식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もちろん、イエスはたくさんの奇蹟を行ない給う力があり、それをもってたくさんの奇蹟を行ない給いました。
물론, 예수께는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이 있으셨고, 그 능력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それは彼が神の子たる証拠は、彼の奇蹟的出生や、奇蹟的行為に求むべきではありません。
그러나 그분이 신의 자식이시라는 증거를, 기적적 탄생이나 기적적 행위에서 구해서는 안 됩니다.
彼は毎日毎日奇蹟をなしていたわけではなく、また奇蹟を行な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もありました。
그분은 매일매일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 아니며, 또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彼が神の子たることの証拠は神との霊の交わりが本当に深いということにおいて一つであり、神との霊の交わりにおいて神と愛を契ったということ、これがその証拠であり、これだけで十分です。それ以上はいっさい不要です。
그분이 신의 자식이시라는 증거는 신(수호령, 지도령)과의 영의 교감이 참으로 깊다는 데 있으며, 신과의 영의 교감에서 신과 사랑을 굳게 약속했다는 것, 이것이 그 증거이고,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이상은 일체 불필요합니다.
神と霊において堅く手を握ること、完全に悔い改めて神の方を向いて神と堅く手を握ること、これがあればよい。他のことはあれば結構だが、なくともよい。
신과 영에 있어서 굳게 손을 잡는 것, 완전히 뉘우쳐 고치고 신(神)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신과 굳게 손을 잡는 것, 이것이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좋습니다.
イエスは荒野の四十日間の生活で、自分の神の子たることとの根拠を確かめられた上、ガリラヤに帰ってきました。
예수께서는 광야에서의 사십일 간의 생활로, 자신이 신의 자식임의 근거를 확인하신 후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しかし彼はただちに伝道の生涯に入り給わなかった。バプテスマのヨハネが捕えられるまでは、イエスは背後において、伝道者として公然世間に顔出しをされなかった。
그러나 그분은 곧바로 전도의 생애에 들어가지는 않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될 때까지는 예수께서는 뒤편에 계시며 전도자로서 공공연히 세상에 얼굴을 내미시지 않으셨습니다.
これはヨハネに対するイエスの尊敬でありました。
이것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존경이었습니다.
しかしヨハネが捕えられた時、彼は奮然として立ち上がった。ヨハネの戦いを受け継ぎ、ヨハネ以上の戦いをなすために、彼の立ち上がるべき時機は来たのであった。
그러나 요한이 체포되었을 때, 그분은 분연히 일어서셨습니다. 요한의 싸움을 이어받아, 요한 이상의 싸움을 하시기 위해, 그분이 일어서셔야 할 때가 온 것이었습니다.
以上が「イエス・キリストの福音の始め」、すなわち彼の福音宣伝開始に至る次第であります。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즉 그분의 복음 전파 개시에 이른 경위입니다.
同じことを私ども我々各自のキリスト者としての生涯に応用できます。
같은 것을 우리도 각자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私どもは洗礼者ヨハネの「罪の赦しを得さする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の宣伝を聞いて、我らを牽転し給えと神に祈ります。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 선포를 듣고, 우리를 이끌어주라고 신에게 기도합니다.
私どもは何度か自分で神に転ろうと思って努力してみますが、できないで我らを牽転し給うと祈り求めます。
우리는 몇 번이고 스스로 신에게 돌아가려고 생각해서 노력해 봅니다만, 할 수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それを牽転して下さるのはイエス・キリストです。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私どもはイエス様によって顔の向きを変えまして、神様の方へ向き直り真正面から神の聖顔を見た時、その瞬間に「汝はわが愛しむ子、我汝を悦ぶ」という声を聞きます。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얼굴의 방향을 바꾸어, 신의 방향으로 돌아서서 정면으로 신의 거룩한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그 순간에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その時に私どもはキリスト者として驚きます。私どもは神の子? この無力無能、汚穢下賤の私どもが神の子? そんなことはあるようはずがない、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놀랍니다. 우리가 신의 자식? 이 무력무능하고 더럽고 천한 우리가 신의 자식?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汝は何の善行もできず悪いことばかりして石をパンに変える力もないではないか、高い所から飛び降りる勇気もなく石をパンに変える力もないではないか」、これは私どもがサタンに試みられているのです。
"너는 아무 선행도 하지 못하고 나쁜 일만 하면서 돌을 빵으로 바꾸는 힘도 없지 않느냐,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용기도 없고 돌을 빵으로 바꾸는 힘도 없지 않느냐", 이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시험받고 있는 것입니다.
サタンは私どもに向かい、「だから汝は神の子ではない」とささやいています。彼は勝ちて言います「キリスト者よ、汝の名は無力なり」と。
사탄은 우리를 향하여, "그러므로 너는 신의 자식이 아니다"라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는 이겼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여, 너의 이름은 무력(無力)이니라"라고.
こうしてサタンは神様と私どもとの親子関係にさしこんで、せっかく神に向かって向き返った私どもの顔をば再び神から引き離そうとする。
이렇게 하여 사탄은 신과 우리의 부모자식의 관계에 끼어들어, 모처럼 신을 향해 돌아선 우리의 얼굴을 다시금 신으로부터 떼어 놓으려 합니다.
この問題のため四十日四十夜苦しまれましたが、彼自身のために並びに我らのためにみごとなる解決をして下さいました。
이 문제 때문에 사십일 밤낮을 괴로워하셨습니다만, 그분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훌륭한 해결을 해 주셨습니다.
天使は私どもに教えることを、神の子たることの標準にしてはいけない。霊において神に結ばれることが、神の子たる証拠である。
천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신의 자식임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영(수호령, 지도령)으로 신에게 연결되는 것이, 신의 자식이라는 증거입니다.
神とともにいささえすれば、何ができなくとも神の子であり、神はそれを喜んで下さる」と。
신과 함께 조금이라도 하면, 무엇을 할 수 없더라도 신의 자식이며, 신은 그것을 기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こういう意味で神の子である者がキリスト者です。
이런 의미에서 신의 자식인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全き愛は恐怖を除く」といいます(ヨハネ第一書四の一八)。
"온전한 사랑은 공포를 제거한다."고 합니다(요일 4:18).
こういう愛を神様から頂いた者には、恐ろしいものはありません。
이러한 사랑을 신으로부터 받은 자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こういう我らに逆らう者がいかに多くあっても、イエス・キリストによる神の愛より我らを離れしむるものは誰ぞや、と言うことができるのであります。
이런 우리에게 대적하는 자가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자가 누구냐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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