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식사까지 마친 뒤. 목적지인 아이스랜드로 가기 위해 다시 올라탄 비행선.
“저, 누나.”
자리 4개에 나란히 앉은 리차드가 다나를 불렀다.
“왜.”
“아까 그 노래 뭐에요? 콘서트도 한 마당에 음정이 왜 그렇게 불안해요?”
다나는 오른손 검지로 볼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불렀다 보니 그래. 난 작사가나 작곡가가 아니니까. 짬나면 통신기를 통해서, 외할아버지와 외친할머니께 보내서 제대로 된 곡을 만들어 봐야지.”
“아~ 그럼 음정을 다시 한 번 잡아 봐요.”
“그럴까?”
이윽고 비행선이 이륙 궤도에 오르고 안정적으로 변하자, 다나는 들고 온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 아까 흥얼댔던 가사를 떠올려봤다.
“빛이 머무는 자리에 스며드는 그림자- 나 홀로 지새워보았던 밤들의 별 새로운 희망이 눈을 뜨면 내 안의 반짝임도 눈을 뜨리-”
가사를 모두 쓴 다나는 앞뒤로 좀 더 끄적거려봤다.
“시우야, 감정 좀 해줄래?”
“내가 뭘 아나요.”
시우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5시간 뒤 도착한 아이스랜드,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하얀 세상.
비행선에서 내린 그들을 처음 반긴 것은 아침까지 내려서 쌓인 눈밭이다. 아무런 자국도 남지 않은, 깨끗하고 환한 눈밭은 그야말로 절정이었다.
경유지 마을에서 산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을 한 그들은 나이와 원정 임무를 잊고 비행선 주변을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옷이 각기 달라서 망정이지 통일해서 샀다면 큰일 날 뻔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환한 노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시우와 분홍색 단발머리의 다나, 진한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의 워더는 어디에 내놔도 눈에 띄지만 말이다.
“우와~”
“정말 하얗다!”
한 쪽은 짙은 노란색을 가진 모래알의 사막, 한 쪽은 푸른 하늘을 꼭 빼닮은 넓은 바다. 열대야에 가까운, 더운 지방에 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하얀 세상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얼음나라의 추억이라는 이름의 책장, 그 첫 장을 장식하리라.
뽀드득 뽀드득. 한 발 내딛고 또 한 발 내딛으면 발아래에서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려왔다. 폭신폭신 기분 좋은 눈밭에 자신들의 자취를 남기며, 쌩하니 걷기 시작하는 원정대. 깜짝 놀란 세 명의 교사가 동시에 손을 뻗었다.
“너희 어디 가니!”
뽀드득.
뒤에서 들리는 외침에 멈춰선 100명의 학생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왜요?”
“의약품 갖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니.”
아!
여선생님의 말에 챙겨야 할 것을 안 챙겼다는 것을 안, 남학생들이 모두 돌아왔다.
미니 아이스랜드에서 빌린 옷이 든 가방은 여학생들이 하나 둘 맡고, 의약품은 모두 남학생들이 들었다. 물론 교사 셋과 비행선을 조종한 조종사 세 사람도 의약품을 들었다.
아래는 새하얗게 땅을 뒤덮은 눈밭이요 손에는 의약품이 든 상자를 들었으니, 학생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무거워진다.
뽀드득뽀드득, 푹신푹신.
너무 깨끗하고 하얘서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눈밭 위로 의학학습원정대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남겨졌다.
“의약품 왔습니다, 여러분~”
주조종사의 외침에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었고, 뒤이어 아이스랜드의 어느 도시에 도착한 원정대는 입을 쩍 벌렸다.
미니 아이스랜드에서 만났던 그 따뜻함이 이곳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설산과 이글루 그리고 꽁꽁 얼어붙은 얼음 땅은, 비행선이 내린 공터와는 180도 다른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따뜻할까?
군데군데 피워 오른 모닥불이 있는데도 그런 걱정이 머릿속을 파고들만큼, 아이스랜드의 상황은 안 좋았다. 병원이 있으나 현재 아이스랜드를 강타한 독감은 그 의원들마저도 드러눕게 만들 정도로 강했다.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은 현재의 아이스랜드가 가진 문화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곳곳에 멋스럽게 세워져 있는 얼음 조각상이나 눈이 덮인 설산이 있으나, 추운 날씨에 밀려 일행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들고 있던 박스를 그냥 내려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종이로 만들어진 연약한 박스가 꽁꽁 얼어 있는 바닥을 견딜 리 만무하지 않은가.
“우와~ 여기에 비하면 미니 아이스랜드는 장난이다, 장난.”
“정말이야! 옷을 여러 벌 껴입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입에선 입김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입김은 차가운 공기와 부딪치자마자 가볍게 얼어붙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등, 아이스랜드에 닥친 한파를 여지없이 몸소 알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근데, 병원이 안 보이는데요?"
“아이스랜드는 병원이 세워질 만큼 땅이 튼튼하지 못 해. 이렇게나 얼음이 두껍게 어는데 병원을 어떻게 세우겠어."
하긴….
“대신 저렇게 작은 깃발을 달아놓은 곳 보이지? 다른 집에 비해서 좀 더 커 보이는 곳. 거기가 병원이야.”
바람만 불면 넘어갈 것 같은 저런 천막이- 병원?
100명의 원정대 모두는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가운데 시우가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 학교가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인데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세 명의 선생님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스랜드의 추운 분위기를 짧게 만끽한 원정대는 본격적인 의약품 나눠주는 작업에 들어갔다. 방송에 대해서는 워낙 감각이 없는 나라인지라 다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이에 대해 원정대는 불만을 표시했다.
카메라는 싫어도 가나의 팬이 적은 것은 원하지 않는 모양이다.
다나는 어깨를 막 넘기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한 데 모아 묶어 일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입김을 뿜으며 의약품을 집던 시우의 눈길이 다나의 왼쪽 귀를 지나갔다.
“어? 다나 언니, 피어싱 뺐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하고 있더니.”
“응. 아무리 생각해도 연예 활동은 잠시 접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빼놓고 왔어.”
“그랬구나. 머리를 풀고 있어서 몰랐어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 얼른 돌리러 가야지.”
“예.”
이후.
장장 4시간 동안 의약품을 모두 나눠주었다. 병원에도 나눠주었으며 시우 일행은 독감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상태도 봐가면서 의약품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간 곳은 SI. 아이스랜드에서 가장 큰 의학학교다.
하얀 눈으로 덮인 그곳을 하마터면 못 찾을 뻔 했다. 만약 원정대만 왔다면 통신기로 연락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지도 모른다. 1년에 한 번씩 아이스랜드에 오는 선생님 셋 덕분에 살았다.
선생님들끼리 인사를 나눈 뒤 문제점이 한 가지가 생겼다.
“예? 기숙사가 없어요?”
설령 있다고는 해도 기숙사에는 방이 없을 테니 기숙사에서 지낼 수는 없을 터. 짧아야 한 달이니 여관에서 머물 수도 없는 노릇.
심각한 표정의 여느 학생들과는 달리, 워더와 다나, 그리고 시우는 팔짱을 끼고서 자신들과 동행한 세 명의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다.
“계속 이러고 계실 건가요? 방법이 있지 않나요?”
“맞아. 특히나 저와 시우 양은 학생회 대표라고요. 우리가 방법을 내볼까?”
“자매결연까지 맺고 있는 학교야. 방법이 없으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어?”
워더와 시우, 그리고 다나의 말을 들은 다른 학생들의 표정이 그제야 풀린다.
잠시 원정대를 속이려 했던 교사 셋의 얼굴에 쓴 미소가 흘렀다. 이토록 빨리 간파 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SI에 재학 중인 총 1000명의 학생들 중, 집이 학교와 가장 가까운 150명의 학생이 선발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 중, 방이나 집이 한 명 정도 신세를 져도 괜찮을 정도의 100명 가량 되는 학생이 재 선발되었다. 그들은 이미 학교의 대강당에 모여 있다. 이제 그들과 조를 짜고 그들과 함께 한 달에서 두 달을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난 시우가 가는 집에 같이 가도 되죠?”
엉?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라니? 갑작스런 다나의 제안을 들은 모두와 시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다나 언니, 무슨 얘기가 하고 싶으신 거세요?”
“왜. 우린 같은 방이었잖아. 그래서 그러는데 왜?”
다나의 대꾸에 시우는 눈을 감고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토마로 군과 시지 군(리차드의 성씨)도 같은 집에 가야 하나요?”
“그, 그런가?”
워더와 리차드의 표정도 시우의 표정과 같아졌다.
다나는 시우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떨어질 생각을 안 했고 시우 역시 거부하는 편이 아니었다.
“혹시 두 사람 사귀나?”
“어머나, 친구끼리 붙어있지도 못 해요?”
SI 측 교사 중 한 명의 물음에 다나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고, 같이 온 세 명의 교사도 가만히 있었기에 그 교사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SI 측에서 생긴 의심을 모두 거두는 것은 힘들어 보이는 듯했다.
그건 워더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
여자들 사이의 친구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 워더가 그런 오해를 가지는 건 당연하다.
“시우 양, 정말로-”
워더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은 다나는 눈을 일자로 감으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아니라는 거 알지?”
워더는 장난기가 떠오른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겠는데요.”
“…….”
눈을 꾹 감은 다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기 위해 잠시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했다.
그냥 붙어 있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다나는 시우의 허리에 손을 올려놓기까지 했고, 주위의 의심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그래서, 나한테 불만 있어, 토마로 군? 내가 자네한테 해가 되기라도 한당가?”
“아니요.”
“그렇지? 자~ 이쯤에서 다들 의심을 거두어주셔! 토마로 군, 자네도 마찬가지야.”
“예.”
워더를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의 손이 허리에 와 있을 때부터 불편한 표정의 시우는 간절하게 빌 듯 말했다.
“언니, 이 손 좀 내려줘요.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는데."
“우리만 아니면 된 거 아냐?”
“아니거든요, 전혀.”
“…어….”
시우는 자신의 보라색 눈에 힘을 줬다. 순간 무서움을 느끼고 만 다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시우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교무실에 흐르던 이상한 분위기(!)가 진정된 뒤. 원정대가 신세를 지게 될 학생네 집이 하나 둘 선택되었다. 그리고 학교가 파하는 시간이 되었고 학생들은 자기네 집에서 지내게 될 원정대를 한 명씩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워더, 약속 잊지 마~”
“기억하고 있을게, 걱정 하지 마. 너나 까먹지 마.”
워더와 리차드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다나와 시우는 아니다. 기어이 여학생 한 명의 집에 둘이 가게 된 그녀 둘이다.
그 여학생, 아미는 한 번씩 뒤를 돌아 다나와 시우가 잘 오는 지를 지켜봤다. 아미의 뒤를 따르며 다나가 시우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참. 모자와 선글라스, 혹시 챙겼어?"
“예. 왜요?”
“그냥.”
그냥? 뭔가 좀 이상한데. 아, 설마!
“언니, 그건 아니에요! 전 지금 파올레아카데미의 학생으로서 아이스랜드에 와 있는 거지, 마스터챔피언으로서 와 있는 건 아니라고요! 그리고 만약 지금 상황에서 마스터챔피언으로서의 활동을 펴게 되면 의심을 받게 될 거예요. 아이스랜드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에요. 인구가 500만 명도 안 된다고요. 1억에 가까운 우리 황국하고는 달라요.”
“그래? 뭐, 싫다면 할 수 없지! 그래도 가벼운 변장은 하는 게 어때?”
또 다른 생각이 있는지 다나는 말을 다시 꺼낸다.
“결론은 남장을 바란다는 거예요?”
“응. 우리 둘이 이렇게 돌아다니면 이상하게 볼 거 아냐. 어차피 이 나라는 방송을 즐겨 보는 나라가 아니니까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모르는 것 같고.”
“그래서 일부러 매니저 언니를 본가에 보내신 거예요?”
“당연하지!”
다나는 엄지손가락을 불쑥 내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가 원래 이렇게 대책 없는 언니였던가, 시우는 다시 한 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