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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19,4.14) 말씀/ 누가복음 13:31-33
갈 길을 가신 예수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영어공부 하다보니... 이런 귀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Have it your own way 직역을 하면 '네 방식대로 해'도 되겠지만... 네 삶을 찾아라는 뜻입니다. 벌써 인생 60을 넘고 보니 내 삶을 찾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그동안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좇아 흉내 내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내 삶보다는 타인의 삶을 많이 살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보면 산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뜩이나 인생살이가 짧은데 자기 삶 한번 제대로 살지 못하고 남에게 매여서 남을 좆는 인생을 살았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짐승들이야 생존방식이 똑 같습니다. 매일 순간 순간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배설하고, 새끼치고, 수명이 다하면 죽습니다. 똑같이 생존하다 똑같이 죽습니다. 이렇게 산들 저렇게 산들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수 없고, 배 부른 돼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도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는 인간은 생존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생존방식은 같아도 삶은 천태만상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만의 독특한 삶 그것이 곧 자기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있으면 자기도 있는 것이고, 삶이 없으면 자기도 없는 것이다. 자기 삶이 없는 존재라면 도대체 자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누군가 타인의 삶에 모방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부요하고 ,권세를 누리고, 이름을 날린다 해도, 잘 먹고 잘 산다고 해도 자기의 삶이 없으면 그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고 누구 엄마, 누구 댁, 김사장, oo의원, oo장관, oo장군, 김박사, 영감... 이런 타이틀로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타이틀, 게급장 떼면 나는 누가 됩니까?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과거가 하려했던 사람일수록 후회스럽고 가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자기 삶을 찾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소유가 많던 적던 상관없습니다. 가방끈이 길던 짧던 상관없습니다. 남이 흉내 낼 수 없고, 따라할 수없는 나만의 삶을 찾아 기쁘고 즐거움으로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인생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물론 자기의 삶을 찾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보다 남을 더 많이 봅니다. 내 얼굴보다도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굴뚝 청소를 두 사람이 했는데 한 사람은 얼굴에 검덩이가 묻고, 다른 사람은 깨끗한데 누가 세수를 하였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연 얼굴이 검둥이 묻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깨끗한 사람이 얼굴을 씻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행동의 기준이 자기 자신보다 남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보고, 남을 따라 하고, 남을 시기하고, 남과 경쟁하고, 남 때문에 불행하고, 남 때문에 행복해 하는 그런 삶을 많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면 나중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없고 남만 있습니다. 남에 대한 원망, 남에 대한 갈등, 죽는 순간에도 남 탓하며 죽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니체는 이런 인생을 아주 나약한 존재라 하며 나력을 키우라고강변 합니다. <아침놀.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부터 지작하라. 스스로에게 거짓말 하지 말고, 항상 성실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습성을 갖고 있으며,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랑을 사랑으로 느낄 수 없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정확히 아는 것부터 시작 하라. 자신조차 모르면서 상대방을 알기한 불가능한 일다.” 스스로는 아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자기 자신에게 박수를 보낼 줄 안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외로울수록 자기 자신과 하이 파이브를 하며 뜨겁게 응원하고, 격려하고, 그런 사람은 잠시나마 환란이나 역경과 지쳐 힘들 때가 있지만 멀리 본다면 인생이라는 경주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제까지 남의 시선에 사로 잡힌 노예로 살 것인가? 그대는 그대 자신이 되라”, 주체성을 가지고 사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것은 노예 근성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잘했다 칭찬하면 기뻐하고, 못했다고 하면 슬퍼합니다. 자기 기준이 없습니다. 이렇게 남의 시선을 좇아 사는 사람은 노예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도 남들 뒤를 좇아가는 삶을 살다 50이 넘어서 비로소 내 방식의 삶을 찾게 되었습니다. 남들 가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 공부하고, 남이 성공한 코스를 부러워하며 그 길을 좇아가려 했습니다. 남보다 잘 하면 행복하고, 못하면 실망하고. 성전도 건축하고, 성도도 부흥시키고, 크고 많고, 명성으로 인정 받는 그런 삶을 추구하며 살 때 항상 기뻐할 수 가 없었습니다. 자신이란 존재는 항상 부족하고 슬펐습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으로 살아도 열등감을 벗어날 수 없고, 얼굴 펴고 웃으며 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아무라 좇아 노력해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 잘 하는데 나는 따라하려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삶을 살아가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교회의 부흥은 이제 수가 아니라 한 영혼 사랑하는 것, 성도들을 푸시하고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배우고 성숙하는데 마음을 쓰고, 작아도 아름다운 교회, 적은 능력이라도 충성된 교회를 소망하고, 독서도 하고, 글도 써서 나누고, 음악도 하고, 취미활동도 하면서 우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누리고 나누며 살 수 있는 나만의 삶을 갖는 것!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언젠가 로마의 권순만 선교사님과 대화 중에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 길레 남과 비교해서 이야기 할 수 없지만 나는 더 이상 남을 부러워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뭔가 놀라움의 표현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부족한 점들은 계속 타인을 배우지만 '내 삶의 자리'만큼은 어느 누구의 삶과 비교하지도 않고 흉내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찾은 것이 가장 큰 행복인데 다른 사람의 삶을 좇아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몇일 전에는 응암동 식당 하는 동생에게 전화가 와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이번에 또 방송 촬영을 한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녀석들?' 개그우먼들 와서 등갈비 먹으며 촬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 또? 벌써 네 번 째 방송출연입니다. 이번에도 카메라면 30명이 와서 촬영하였는데 응암동에 소분이 쫙 퍼져서 손님들이 몰리는 바람에 어제도 12시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응암도 뒷 골목의 작은 가게가 전국으로 뜨게 되었습니까? 자기만의 독특한 등갈비 개발하여 욕심도 없이 손님들 배려하며 식당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말 안 해도 그렇게 살아가니 방송에서 스스로 와서 촬영섭외를 하는 것입니다. 보면 나름대로 음식 만드는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정성으로, 미원 안 쓰고 자연 맛 내기, 김치은 국산으로 스스로 만들고, 음식은 짜지 않게, 갈비는 농협 것 쓰고, 기름은 철저히 빼서 손님건강 생각하고, 거기다 5,500원짜리(6000원) 가정식 백반으로 손님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또 형제들도 짬을 내서 백 김치 등 반찬을 만들어 보내 줍니다. 때로 주변에 봉사도 합니다. 그러한 삶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계속 됩니다. 쉴 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즐겁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자기 삶을 사니 그렇습니다. 누구를 따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비법으로 음식을 만들고, 자기가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게 행복입니다. 가끔 제가 색소폰 연주를 보내주면 자기는 어린 시절 꿈이 가수 였다고 합니다. 가수! 우리 집안에 무슨 가수? 그런 동생에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옥근아! 너는 엄마 닮아서 음식을 잘 만들고 잘하는데. 식당해서 사람들 맛있는 음식 만들어 섬기는 일 아주 너한테 꼭 맞는 일 이다. 최고다! 가수 못 되었어도 부러울 것 하나도 없다. 가만히 있어도 연예인들이 찾아와서 같이 사진 찍고 네 음식을 맛보고 가니 너도 이미 연예인 이다. 앞으로도 말이다. 욕심 내지 말고 지금 족한 줄 알고 감사하고, 정성과 진심을 다하여 너만의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 가거라.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임을 늘 명심 하고 내가 먹는 음식처럼 초지일관 변함 없이 섬기는일을 하거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 하다면 그것이 최고의 이윤이라는 것 잊지 말거라. 이미 너는 네 삶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니 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반을 더 채워 완전 성공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놓쳐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네 삶을 살아가거라. 그래야 나만의 삶이 완성되는 것 이다." 왜 사람들은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하고, 자기의 길을 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이나 식물들은 종류대로 만드셨어도 그 개체들은 다 똑같습니다. 아프리카 빈들에 띄어다니는 수 만 마리의 소떼 사슴 떼들을 보십시오.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털 색깔은 다를지 모르지만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지구상에 사람들은 15억이 있어도 각 사람이 각각의 인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도 특징대로 키우시고, 각각 12지파를 축복하실 때도 각각이 다 다릅니다. 예수님 역시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각 사람을 부르시고 각기 이름을 주시고 제자로 양육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 각각 성격과 특징이 자릅니다. 그들에 맞게끔 양육하시며 훈련을 하신 것입니다. 한꺼번에 똑같이 취급하시거나 베드로처럼 되라, 누구처럼 되라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베드로의 죽음을 예고하실 때 그가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을 때 너는 그를 상관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21:.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잘 알고 자기의 부르신 대로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잘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 역시 자신의 삶을 철저히 사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길이 어떻하셨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자로 세상에 오셔서 로마군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기를 바랬습니다. 제자들마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 왕이 되시면 좌우정 영의정을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의 육신의 형제들은 자신을 세상에 들어내어 인기를 얻으라고 명성의 길을 갈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메시아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메시아의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강자가 아닌 약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세상에 부요한 유지의 길을 가시지 않고 가난하고 배고픈 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한 청년이 주님의 길을 가겠다고 하였을 때 주님은 이렇게만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눅9:58).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길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고난 받고, 멸시 받고,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할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오히려 고난 받고 별시 받고, 조롱받고 채찍질 당하시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 길이 었습니다. 제자 베드로는 그 이야기를 그러지 말라고 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길은 누구도 흉내 내거나 따라 갈 수 없는 자신만의 길이 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당장에는 제자도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길이 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을 가시려는 의지는 너무도 분명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1-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죽음의 위협이 도처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를 떠나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셔야 할 길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죽음으로 완전해지는 길 이며 하나님이 주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아직 아무도 모르는 길입니다. 제자들도 깨닫지 못한 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예수님만의 길입니다.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길을 가시며 자신의 삶을 철저히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으시고 삼일 후에 부활하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주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며 어떤 곳에 있던지 어떤 위에 있던지 아버지께서 주신 나만의 삶을 잘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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