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무진장 - 행운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유당
수없이 선 덧그어 보름간 한땀 한땀 수 놓듯…
한 장 탄생
시진핑 訪韓때 펑리위안 여사에 선물도
잘 나가던 디자이너, 펜화로 '제2의 인생'
어릴적 위조지폐 그릴 정도로 손재주…
큰 디자인회사 운영하다 부도 나 파산
빚쟁이 피할 겸 스케치북 들고 山寺로…
벼랑 끝 인생에서, 구원처럼 펜화 만나
펜화는 忍苦의 작업… 내겐 修行이더라
"내가 맑아야 그림도 맑아지는 것 느껴
IT시대에 펜화? 젊은이들이 더 좋아해요
빠름이 극단으로 가면 '느림' 찾는 법이죠"
지난 7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방한 때
창덕궁을 방문한 펑리위안 여사에게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부용정(芙蓉亭) 그림이 담긴 기념패를 증정했다.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꼽히는 부용정이
연못가 소나무 옆에 자리한 모습을 그린 펜화다.
세밀한 선으로
처마 곡선 아래 기둥과 문창살을 되살리고,
빛의 각도에 따라 솔잎의 명암과
그림자가 바뀌는 모습까지 잡아냈다.
펜화로
우리 전통 건축물을 그리는
김영택(69) 화백의 작품이다.
김 화백은 1994년 펜화를 시작한 이후
20년 동안 기록 펜화라는 영역을 개척해
'한국적 펜화'의 선구자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통로에는
전통 문화재의 모습을 담은
그의 펜화 작품 8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고구려 장군총, 불국사 다보탑, 부석사 무량수전 등이다.
지난해에는 교학사 발행
중등 미술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실렸다.
서울 조계사 경내에서 스케치할 건축물들을 둘러보고 있다.
세밀하게 묘사한
그의 펜화 작품에는 동양적인 그윽한 품격이 느껴진다.
그는 20년째 펜화에 매달려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 이진한 기자
◇ 50만번 선 그어야 한 장 그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작업대에 신문지 크기의 종이를 펼쳐놓고
가는 철펜에 먹물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
세밀한 부분을 그릴 때는
형광등이 옆에 붙은 3배율
대형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며 작업을 한다.
컴퓨터로 사진을 확대해서 보기도 한다.
그동안
화폭에 담은 전통 건축물은 모두 260여점.
전국의 사찰과 정자,
궁궐과 탑들이 그의 펜 끝에서 되살아났다.
고건축의 기둥과 지붕, 기왓장, 소나무,
바위 등을 섬세하게 묘사한 펜화엔
수묵화 같은 멋이 담겨 있다.
그래서
"조선백자의 향기가 난다"
"한국화 같다" 등의 평을 듣는다.
―펜에 먹물을 묻혀 그리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
"보름 동안 한땀 한땀 수를 놓듯
50만번 선을 그어야 그림 한 장이 탄생한다.
그 한 장을 위해
여러 차례 같은 장소를 방문하고
한자리에 앉아
팔이 빠질 때까지 선을 그어 그림을 만든다.
펜화는 인고의 결과다.
수행에 가깝다."
―50만번이라니, 얼마나 가는 선으로 그리길래.
"세계에서 가장 가는 펜촉의 굵기는 0.1㎜다.
이 펜촉을 사포로 갈면 약 0.05㎜까지 된다.
숙달되면
이 펜촉으로 1㎜ 안에 선 5개를 그을 수 있다.
이 가는 선을
수없이 덧그어 형태를 만들고
농담(濃淡·짙음과 옅음)만으로
원근을 표현한다."
―기록을 위해서라면 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나.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사진에서는
실제 현장에서 본 감흥이 살아나지 않는다.
사람은 인상적인 대상을
더 또렷하고 두드러지게 보고 기억한다.
이미지를
실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살려내기 위해
인간 시각에 맞춰 그림을 그린다.
강조하는 대상을
사진보다 10~20% 확대하기도 한다.
해남 미황사는
대웅전의 배경인
달마산을 15%쯤 확대해 그렸더니
주지 스님이 '
사진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감흥이 담겼다'고 했다."
―기록 펜화라고 해서
사진 찍듯 그대로 모사(模寫)하는 줄 알았다.
"현존하는 전통 건축물들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져
훼손되거나 변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옛 자료와 오래된 사진 등을 참고해
건물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건물을
큰 나무가 가리고 있으면 그림에서 빼고,
닳아 없어진 부분까지 그려넣어
고건축 본래의 특징과 분위기를 되살리려고 했다."
―서양 펜화와는 다른 방식 같다.
"서양 펜화는 건축도면처럼 그린다.
펜화라고
기록적인 측면만 생각해선 안 된다.
건물이나 자연이 가지고 있는
기운과 정취를 살리는 등 예술성도 고려해야 한다.
조선시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가 명작으로 남은 것은
산천을 단순히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주는 감흥을 담았기 때문이다."
구리 기둥으로 마룻귀틀을 받치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암자를 지었다.
건물 안에는 수행하기 좋은 석굴이 있다.
깎아지르는 암벽에
매달린 나무와 작은 암자가 어우러져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 같은 감흥이 느껴진다.
/ 김영택 제공
◇ 디자인 회사 망한 후 펜화에 전념
김영택은 디자이너였다.
홍익대 미대 공예과를 졸업한 후
1972년 디자인계에 뛰어들었다.
제일기획·나라기획 디자이너를 거쳐
1977년 홍인디자인그룹을 설립해
업계 최고 실력으로 키웠다.
고구려 벽화의 청룡,
백제 전돌의 봉황 등
한국 고유의 이미지에서 따온
상표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가 만든
해표 식용유, 삼천리그룹 등의
심벌마크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1993년에는 국제상표센터(ITC)가
세계 정상의 디자이너 54명에게 부여하는
'디자인 앰배서더'로 국내 최초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이듬해
제1회 세계 로고 디자인 비엔날레에 초청돼
파리를 방문했을 때 펜화에 눈을 떴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인근에서 파는
기념품의 절반 정도가 펜화였다.
서양인의 눈에 익숙한 펜화로
우리 문화재를 그려
한국의 전통 건축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엽서나 달력 같은
문화 상품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펜화라면 자신 있어서 이거다 싶었다."
그가 중학생 시절
장난삼아 지폐를 그려 문방구에 가져갔더니
주인이 학용품과 함께
거스름돈을 주려고 했다.
중학생이 그린 위조지폐에
사람들이 속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그는 디자이너로서는 유능했으나
회사 경영은 낙제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중
디자인 전문 출판사에 무리한 투자를 했다가
연쇄 부도가 나는 바람에 파산했다.
돈을 갚지 못해 조폭에게 끌려가기도 했다.
관악산에 올라가 자살할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빚쟁이들도 피할 겸
스케치북을 들고
산사(山寺)와 고건축을 찾아다니며
펜화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지천명(知天命·50살)을
코앞에 둔 나이에 시작한 펜화는
그에게 꿈이자 '제2의 인생'이었다.
"절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주니 자주 갔다.
부도로 벼랑 끝 인생에 몰렸다가
구원처럼 펜화를 만난 것이다.
남들도 다 하는 것 하다가
비로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몰두하니
생활은 어려웠지만 힘이 났다."
고건축을 찾아 전국을 한창 떠돌던 즈음,
그는 베트남 여인
청해무상사(靑海無上師)가 운영하는
국제명상센터에 입문해 계율을 지키는 생활을 시작했다.
"디자인 업계에서 한때 성공하기도 했지만
남은 게 없었다.
내가 그동안 무슨 일을 했나 회의가 들었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하루 세 갑씩 피우던 담배와 술을 끊고
고기도 입에 대지 않았다.
펜화 그리는 것도 일종의 수행이다.
내가 맑아야 그림도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김 화백은
2002년 초부터 1년 6개월 동안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법당을 펜화로 기록하는 작업을 했다.
"지금도 통도사의 범종 소리만 들으면
마음이 울적해지고 눈물이 난다.
통도사와 인연이 깊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수행이 깊은 스님 말씀으론
내가 전생에 통도사에서 불화를 그리던
유성 스님이었다고 했다.
유성 스님은 영산전 팔상탱
(八相幀·보물 1041호·석가모니의 일생을
8개 장면으로 그린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섬세함과 색채 등이 뛰어난 명작이다.
아마
전생에 팔상탱을 그리던 습관이
지금 세밀한
펜화를 그리는 데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통도사 작업은
그의 작품 활동에도 전환점이 되었다.
기존에는
건물이나 탑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 그렸지만,
이때부터
기초 스케치로 윤곽을 잡은 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컴퓨터 모니터로 확대해
상세한 부분을 그리는 추가 작업을 했다.
김영택 화백의 펜화 작품 8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 김영택 제공
◇ 솔잎 그리기 가장 힘들어
그는 펜화를 시작한 지
10년 만인 2004년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첫 전시회를 열어 '완판'을 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전시회 첫날 탤런트 고두심씨가 찾아와
마수걸이로
경북 문경 봉암사 일주문 그림을 샀다.
일주문은 원목을 가공하지 않고
기둥으로 그대로 쓴 소박한 모습이었다.
당시 도록 표지에도
그냥 좋아서 그 그림을 썼는데,
그 이유를 나중에 깨달았다."
―그림이 뭐가 달랐나.
"그 그림에는 욕심이 없었다.
대개는
그림 그릴 때 대상을 더 아름답게
그려야지 하는 욕심이 생기는 법인데,
그 그림에는 그게 없었다.
그림을 통해
사물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나부터
무색무취(無色無臭)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투 선수나 투수가 이기겠다는
욕심으로 어깨에 힘을 잔뜩 넣으면 실패한다.
예술에서도
자기 과시욕이 있으면 작품을 그르친다."
―가장 그리기 힘든 것은.
"소나무다.
소나무는 잎이 바늘 모양이어서
수많은 잎을 그리면 온통 시커멓게 된다.
동양화 같이 솔잎 몇 장만
그려넣으면 비슷하기는 하지만
관념적 그림이 된다.
솔잎 덩어리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구분해 소나무를
제대로 그리는 방법을 터득하는 데
4~5년 걸렸다."
―수십만번 선을 그어야 완성되는 펜화를
고집하는 건
요즘 시대엔 맞지 않는 일 아닐까.
"젊은 사람들이 내 작품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IT에서
일시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랑과 행복은 얻기 어렵다.
빠름·조급함이 극단으로 가면
다시 '느림'을 찾는 것 아닌가.
번잡한 것에 쏠렸던 눈은
언젠가 인간적인 것으로 향하는 법이다."
최홍렬 주말뉴스부 차장
13동 건물들의 크기 비례를 조정하고 소나무 숲을 10%,
먼 배경 집선 봉오리를
20% 정도 확대하여 연봉 바위형태를
세밀하고 선명하게 강조하여 그린 펜화
나무와 보호시설에 가려 제대로 건축물 전체를 볼 수 없다.
▲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한 후 복원해낸 김화백의 펜화.
건물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불국사 다보탑 실재 사진 모습. 기단위에 난간이 없고,
탑 사면에 배치되었던 돌사자상은
일제 강점기에 약탈되어 한개의 사장상만 남아있다.
▲ 김화백은 학자들의 추정과 자료의 고증에 의해 난간을 복원하고,
탑 사면에 사장상도 복원하여 건축당시의 탑으로 재현시켰다.
불국사 노송
1880년대의 흥인문(동대문)
映恩門(독립문)
崇禮門(南大門)
광화문
水原 華城
통도사입구
통도사 극락암’
통도사 대웅전 금강계단
통도사 대광명전
통도사 자장암
송광사 청량각
여주 신륵사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승주 선암사 승선교
합천 영암사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양루
예산 수덕사 대웅전
오대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보탑사
안동 병산서원
소수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