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프리카 최대 항구도시 몸바사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비행시간 1시간 남짓 거리에 있었다. ‘전쟁의 섬’이라는 예명답게 몸바사는 두 개의 다리로 육지와 이어진 섬이었다.
케냐 제2의 도시이자 마치 여름날처럼 햇살이 따거워 유럽인들에게 관광휴양도시로 인기있는 몸바사를 기자가 방문하게 된 것은 2011·2013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활동을 위해떠나는 대구시 대표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구시가 구성한 육상선수권대회 유치위 대표단은 모두 31명으로 김범일 대구시장을 비롯 이인중 대구상의 회장,이화언 대구은행장 등 쟁쟁한 인사들로 구성돼 있었다.
대표단은 2007년 3월 27일 이곳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연맹 집행이사회에 참석하는 각국 집행이사들을 상대로 유치활동을 펴기 위해 22∼24일까지 각자 일정에 따라 아프리카로 향했다.
대표단 출장 일정은 3월22일부터 30일까지 8박9일. 유치단 일원으로 참석하기 위해 기자가 받아본 일정표에는 케냐 일정이 5박6일이고 나머지 3박3일은 이동 시간이었다.
매일신문 영남일보 세계일보 국민일보 등 지방,중앙일간지 기자를 비롯 4개 방송사 기자6명으로 구성된 우리 기자단은 22일 출발 예정이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 대구를 출발해 육상연맹 집행이사회가 열리는 케냐 몸바사까지 가는 길은 비록 비행기일지라도 멀고도 험했다.
왕복 6차례 비행기에 올라야 했고 이가운데 두 차례는 3∼5시간 가까이 지루한 대기시간을 거친 트랜싯(환승)을 해야 했다.
동대구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인천공항행 리무진 버스를 탄 시각은 22일 오전 10시30분. 우리 일행은 버스안에서 저마다 아프리카에 대한 상식을 털어놓았고 2011년 세계육상선수건대회 유치 가능 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행은 4시간 30분뒤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휴대전화 로밍 등 간단한 절차를 거친 뒤 5시 50분 방콕행 대한항공에 올랐고 약간 지루한 시간을 거쳐 밤10시 20분(현지시각 시차 2시간) 방콕에 도착했고 약 2시간 뒤 곧바로 나이로비행 케냐 에어웨이 보잉 767기에 올랐다.
나이로비로 향하는 항공기안에는 우리 일행과 백인 몇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흑인들이 다수 타고 있어 ‘이제 드디어 진짜 아프리카로 날아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공기는 내부시설이 우리 대한항공에 비해 형편없이 낡아 보였다. 23일 오전 4시6분(이하 현지시간) 나이로비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시간은 9시간 30분이었고 시차는 6시간이었다. 유럽여행을 두번이나 다녀온 나였지만 그때와 달리 비행의 산뜻함은 간곳 없이 비행시간 내내 칙칙한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일행은 공항 로비에서 환전을 하는 등 시간을 보낸 뒤 5시간 대기끝에 여명이 밝아오자 오전 8시 30분 출발키로 된 몸바사행 국내선 탑승구로 이동했다.
국내선 탑승구에서 대기하는 동안 미국 CNN TV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박격포로 테러를 당하는 장면이 목격돼 몸서리를 쳤다.
그래서 그런지 공항 전체 검문검색이 너무 삼엄해 일행을 잔뜩 긴장 시켰고 주변에 터번을 둘렀거나 긴 가운 또는 히잡을 쓴 사람들이 보여 혹 테러와 관련된 인물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아마 내가 겁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가슴을 달랬지만 비행기 타기직전까지는 고온의 날씨에 후덥지근한 실내 분위기는 긴장을 가라앉혀 주질 못했다.
어쨌꺼나 긴장의 시간을 보낸뒤 공항 직원이 우리가 탈 비행기편을 부르며 탑승할 것을 주문했고 줄지어쓴끝에 겨우 이날 몸바사행 비행기 뒷문트랩에 발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8시 30분 출발예정이던 몸바사행 국내선 여객기(보잉767로 보임)는 유럽 등지서 온 손님(어린이도 있었슴)을 가득 태우고도 이륙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 탑숭객수가 일치하지 않았거나 아직 탑승하지 않은 손님이 있어 그렇겠거니 했다. 그런데 아무런 안내방송 한구절 없이 비행기는 뜰 생각을 하지 않았고 스튜어디스들만 분주히 앞뒤로 오갔다.
우리가 앉은 자리 앞 오른쪽에 앉은 유럽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키키적 거리며 웃기도 했고 이스라엘사람으로 보이는 한 가족은 떠드느라 다른 손님은 안중에 없는듯했다.
그리고 왼쪽옆자리 뒤에 앉은 젊은 부부는 아이들 셋을 데리고 탔는데 둘쨋놈으로 보이는 아들이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영남일보 장준영 차장이 김선배 우리나라 같으면 애 뽈때기라도 때릴텐데 그냥 두다니 이해가 안된다}며 볼멘 목소리를 냈다.
찌는듯한 비행기안에서 1시간여를 기다린 뒤 우여곡절끝에 뒤늦은 시각인 오전 10시쯤 비행기는 아프리카 하늘로 날아 올랐고 오전 11시 몸바사 모이(MOI)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낡아서 그런지 비행시간 내내 화면이 내걸린 칸막이 부분에서 찌그덕 거리는 소리가 계속 나 불안을 감출 수 없었고 급기야 모이공항 착륙시에는 해안가 바람이 강해서 그런지 기웃뚱거리는 비행을 해댔다.
모이 공항은 2002년 9.11 테러직후 이슬람테러단체가 이륙하는 이스라엘 여객기를 향해 견착식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다행히 빗나간 사건이 발생했던 공항이라 그런지 내릴때부터 모든 분위기가 상상이상으로 삼엄했다.
당시 이슬람단체는 이스라엘인이 경영하는 몸바사 파라다이스 호텔 정문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해 관광객 20여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몸바사 모이(MOI)공항에 도착하자 한국대사관에서 공사 한 분이 우리 일행을 마중을 나왔다.
김 공사는 긴장한 우리 일행을 귀빈실에서 잠시 쉬게 한 뒤 25인승 버스에 태우고 예약된 세레나비치호텔(SABONA SERENA BEACH HOTEL)로 출발 시켰다.
난생 처음 발을 디딘 우리 일행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시가지를 구경했다.
3중 테러경계령이 내려진 때문인지 이동하는 버스안에도 무장 군인 1명이 동승했고 버스 뒤에는 10명의 무장군인이 탄 스리쿼터(3/4 t) 뒤따랐다.
아프리카의 날씨는 우리나라 8월초 한여름 무더위 그대로를 연상케 했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현지인들은 우리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23일 낮12시쯤 세레나비치호텔에 여장을 푼 일행은 호텔 앞 인도양의 눈부시게 맑은 연록색의 바다와 밀가루 같은 하얀 부드러운 모래 해변을 둘러 보고 내일 도착할 대구시장 등 본진 일행을 기다리며 대서양에 몸을 담그고 수영을 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24일 오전중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나는 타사 기자 3명과 미니버스를 빌려 몸바사 투어에 나서기로 했다.
궁금증과 호기심,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나로 하여금 그냥 호텔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나에게 친절을 베풀던 호텔 웨이터 팰릭스(FELIX)를 불러내 투어버스를 소개받았다. 이윽고 투어버스 1대가 호텔입구에 도착했고 세계일보 YTN 매일신문 이렇게 셋이 차에 올랐다.
다른 기자들은 일 때문인지 아니면 바깥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투어를 꺼려했다. 아니나 다를까 투어버스(운전사 이딘, 여행사 직원 모세)가 호텔을 벗어나 10여분을 달리다 갑자기 한적한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뒤따라오는 다른 버스로 바뀌어 타라고 했다.
나는 즉시 이 친구들이 무슨 사기를 치는게 아닌가 싶어 “뒤따라 오는 저 버스를 믿을 수없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자”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일행의 얼굴 모두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운전수와 일행이 금품을 노리거나 우리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잔뜩 겁을 먹었다. 그러나 강력한 항의 덕분에 다시 호텔입구로 돌아가 경비 책임자 기드온의 보증을 받고 투어버스를 바꿔탔다.
기드온은 세레나비치호텔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는 친구로서 나와 매우 친하게 지낸 인상좋은 흑인중 한명이었다.그는 투어버스 기사와 여행사 직원에게 “왜 버스를 바꾸느냐 그건 저희들 잘못이다”고 나무라며 ‘다시 태워다 드려라”라고 말했다.
내막을 알고 보니 처음 탄 버스 기사 이딘이 갑자기 회사의 오더를 받고 전화로 같은 회사의 다른 버스를 부른 것이었는데,일행은 아프리카 치안이 엉망이고 안내원이 강도로 돌변한다는 등의 미심쩍음 때문에 ‘과민반응’을 보인 것이다.
우여곡절끝에 그나마 일행은 몸바사 시내 목공예품 전시장(핸디크랖트) 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기념으로 세웠다는 투스코 (TUSKOR 상아모양 아치),이슬람교도들이 사는 올드시티(Oldcity),박물관으로 변한 1593∼95년에 포르투갈인이 세웠다는 지저스(Ft. Jesus) 요새 성채 등을 관광한 후 호텔로 돌아왔다.
지저스 요새를 돌아보는 동안 몸바사가 왜 전쟁의 섬이라고 불리우는지 그 역사를 대충 알게 되었다. 11세기 아랍 상인들이 세운 몸바사(오만의 몸바사에서 따온 이름으로 추정된다는 것임)는 인도양 횡단교역에 이용되던 중요한 항구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1840년 잔지바르 술탄이 통치권을 차지할 때까지 아랍, 페르시아, 포르투갈, 투르크가 패권을 두고 서로 끊임없이 다투었다.
그 후 1895년 영국이 차지해 1907년까지 동아프리카 보호령의 수도로 삼았으며, 1928년 지방자치제 실시로 의회가 구성됐다.
몸바사는 본토에 있는 시가지(259㎢)와 다리와 나룻배 등으로 연결된 약 14㎢의 산호섬으로 구성돼 있으며, 지금은 해양 휴양지가 조성돼 있는 산호섬은 전략적 요충지로 ‘전쟁의 섬’으로 불리어 왔다고 한다. 현재 인구는 60여만명으로 추정된다.
케냐는 1963년 12월 영국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했으나 영연방의 일원으로 지금도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식 명칭은 케냐공화국(Republic of Kenya), 수도는 고원 지대에 위치한 나이로비(Nairobi)이며 면적은 58만2646㎢, 인구는 3280여만명,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60달러다. 국민은 키쿠유족·루오족·루히야족·마사이족·캄바족·칼렌진족 등 약 43개 부족으로 구성돼 있고 종교는 개신교(30%), 이스람교(소수), 토착종교(50%)를 주로 신봉한다.
화폐 단위는 케냐 실링이고 공용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가 사용되고 있으나 영국의 오랜 식민지 때문인지 외국인들과 영어 통용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다양한 종족이 모여사는 케냐는 국민들의 외모가 제 각각이었다.어떤 사람은 외모만 봐도 너무 우락부락해 공포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개개인을만나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냥한 영국신사다운 매너와 기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후 나 자신도 그들을 대하는데 몸가짐과 말씨를 달리해야 했다.
몸바사 중심가는 현대식 건물과 관청,은행,상가 등으로 우리나라의 70년대 중·후반 도시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3∼4㎞만 벗어나면 우리의 60년대초 보다도 못한 낙후된 풍경이였다.
도로는 이번 대회를 위해 얼마전 포장을 했고 비포장 도로도 많았다.공항에서 호텔에 이르는 동안 도로 한가운데 노란색 중앙선 구간 구간을 한사람씩 맡아 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라면 중앙선 도색 차량이 지나면 금방 될 일을 이곳 현지인들은 긴 허리를 구부려 붓으로 하나하나 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답답하고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도로변에 줄지어 들어선 노점상들도 질서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과일과 야채,조잡한 의류 등의 상품의 대부분이었다. 마구버린 쓰레기들이 길가에 나돌아 곳곳이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24오후 4시 일행은 유치단이 묵고 있으며 ‘2011·2013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지결정집행이사회’가 열릴 화이트샌즈호텔로 가려다 본진이 제35회 세계크로스컨트리선수권대회가 열리는 해안 경기장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합류키로 하고 버스로 호텔을 떠났다.
시가지를 가로 질러 버스를 한참 달리자 해안가에 온듯 했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곳에 도착했고 함성이 귀를 찢는듯 했다.
바로 크로스컨추리경기장이었다. 이번 대회에는 세계 66개국 선수들이 출전했으나 한국은 출전 선수가 없다고 했다.
크로스컨추리에 대한 현지인들의 엄청난 관심을 반영하듯 30여만명의 관중이 경기장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버스와 나무,인근 집 지붕위를 검은색 피부의 사람들이 재주도 용하게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도로를 따라 군중을 꿰뚫고 나아가던 버스가 몰려드는 인파로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기자는 곧바로 버스 주위로 몰려든 군중들의 눈빛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섹큐러티(현지 치안담당자)와 가이드에게 되돌아 갈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이들은 대표단 일행이 탄 앞차가 나아가니 별일 없을 것이라며 그냥 따라가 보자고 대답했다.
그러나 잠시 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케냐의 불안한 치안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사고는 대구 세계육상대회 유치 대표단이 임대한 버스가 현지 안내 요원의 실수로 보안이 허술한 곳으로 진입했다는 것이었다.
김범일 시장, 박상하 유치위원회 상임 고문 등과 취재진이 탄 버스 2대는 순식간에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포위당했고, 위기를 느낀 대표단 일행은 버스를 버리고 기마경찰이 채찍을 휘두르며 군중들의 진입을 막고 있는 안전지대(VIP석)로 도주했다.
뒷 버스 한가운데 타고 있던 기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작은 배낭을 꼭 질머진 채 버스에서 내렸고 내리자마자 등만 보이는 군중들을 해치고 앞만 향해 달려 나갔다.
다행히 기마 경찰이 군중을 통제하고 있는 폴리스라인까지는 약 15m로 거리가 얼마되지 않았고 금방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뒤를 돌아보니 뒤늦게 버스에서 내린 일행이 문제였다. 그들은 금방 강도로 돌변한 군중들에게 에워싸였다.
온몸을 붙잡힌채 물건을 빼앗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낭패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기마경찰이 말채찍을 휘두르며 그들을 위기의 순간에서 건져 내려 했지만 이마 소지품을 강탈당한 뒤였다.
한 기자는 지갑과 핸드폰, 손수건 등 소지품들을 빼앗기고 한 기자는 오른쪽 엄지 발톱이 부러져 피를 흘리는 부상을 당했다.
두려움속에 한참을 걸어 올라간 케냐 기부키 대통령과 IAAF 임원 등이 자리 잡은 본부석 부근도 안전지대가 되지 못했다. AD카드를 목에 건 한 대회 참가 여성(이탈리아인)이 가방을 강탈당한 후 정신 나간 듯이 울부짖는 장면도 목격됐다.
이 여성은 주위 사람들을 붙잡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현지에서 고용한 보안 요원과 경찰, 최정예를 배치했다는 케냐 군인 대다수는 강 건너 불 구경하는 듯 했다.
우리 일행이 타고온 버스를 살펴보니 군중들이 이미 지붕에 가득 올라가 있었다. 2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대회 조직위가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그곳을 벗어났지만 호텔에 돌아 와서도당시의 공포감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이날 대회장에서는 다친 사람만 100여명이나 된다고 했고 안전지대에서도 조직위 관계자들의 노트북 3대가 분실됐다고 한다. 한마디로 군중심리를 이용한 강도와 날치기범들 탓에 치안이 실종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이 사건에 대해 보도할 경우 대구의 2011년 세계육상대회 유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유치 결정때까지 보도를 미뤄달라는 부탁에 모두가 동의했다.
화이트센즈호텔에서 유치단과 이튿날 일정을 협의한후 밤 11시 세레나호텔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지만 밤새도록 검은 군중들의 하얀 눈동자 수백개가 따라 다니는 등 악몽에 시달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25일 오전 10시 화이트샌즈 호텔로 가서 프레스센터, 마쿠나토룸 등 회의장소 확인, 전송상황 점검, 홍보 부스 등을 돌아 보지 그런데로 현지 통신 사정은 기사전송에 무리가 없을듯했다.
방송사 기자들은 인터넷 이용이 어렵고 그나마 사진 1장 전송하는데 30분 이상이 걸리고 그것도 한번에 전송되는 경우는 거의없고 보통 6∼7번을 시도해야 가능하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다행히 로밍을 해온 핸드폰의 통화 감도가 좋았고 의사 소통을 할수 있었다.
화이트샌즈호텔에서 대구의 유치 가능성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뒤 오후 2시쯤 세레나호텔로 돌아와 마을에 나가보기로 했다.
비록 악몽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호텔앞에는 특산품 판매상점이 줄지어 있었고 주점과 현지인 주택 20여 가구가 있었다.
주민들은 일자리가 없는듯 한낮에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더운날씨라 그런지 모두가 맥빠지고 지친듯 했고 옷차림은 남루했다.
나와 세계일보,강문배 대구시청 사진실장 3명은 노상주점에 자리를 잡고 맥주 1병씩을 시켰다.
그러나 현지인 2명이 다가와 사파리 여행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시간이 없다고 거절한뒤 세계일보 문선배가 그 대신 음료수 한 잔씩을 마시라먀 주문해 주었다.
이들이 음료수를 마시자 주변을 배회하던 다른 3명이 합류했고 이들도 음료수를 사달라고 졸라 마시라고 했고 한명은 또 맥주를 사달라고 해 사주자 굉장히 기뻐했다.
하루전 버스를 탈취할 정도로 난폭했던 그들도 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너무 상냥하고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이들은 힘든 생활을 하고 있지만 순박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호텔내 해변에서 호사스런 옷차림에 고급음식과 음료수를 마시며 일가족이 휴가를 즐기는 이곳 상류층들과는 비교해 볼때 이 나라의 빈부 격차가 극심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눈을 감은 채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뜻한 간난아기를 안고 있는 가난한 아주머니를 만나 “젖도 못 먹인다”는 말에 100실링을 주고 돌아섰다, 아프리카의 기아를 목격한 것이다. 가슴이 짠했다.
저녁식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했다. 식당을 운영하는 김종규씨는 몸바사에서 한국인 선교사 10여가구가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 1979년 케냐에 진출해 선박대리점 사업을 하고 있으며 식당 경영은 자식들이 맡아하는 부업 정도라고 말했다.
김씨는 대구 성서가 고향이고 당시 태권도 사범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그는 “케냐 흑인들을 많은 제자로 길러냈다”면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케냐인들은 순박하다고 말했다. 저녁에 시간이 있으면 자신의 아들 김군이 몸바사 유흥가를 안내하겠다고 했으나 우리는 사양했다.
26일 오전 10시30분 화이트샌즈호텔로 이동해 호주, 러시아 기자들과 2011년 대회 유치도시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러시아의 거액 제공설이 나돌아 대구 유치가 어렵지 않나 하는 우려 속에 우리 일행은 27일 프레젠테이션에 대비해 열린 리허설 관람 후 세레나호텔로 돌아왔다.
운명의 날인 27일 오전 10시30분 화이트샌즈호텔 도착. 이미 국내 언론에 보도된 사실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개최지 결정 예상 루머가 나돌아 판단을 할 수 없는 피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화이트샌즈호텔 국제회의장 에서 오후 2시55분쯤 개최지가 대구로 결정됐다는 라민디악 회장 발표로 대구 유치단은 감격의 순간을 접했고 그 동안의 숨막히던 유치전이 막을내렸다.
개최지 결정발표전 mbc기자가 회의장에 잠입시킨 정보원을 통해 이미 대구가 결정됐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본사에 전화를 걸어 자막을 내보내라는 전화를 걸어 나도 그렇게 하려다 좀더 확실한 발표를 듣고 하려고 기다렸다.
다행히 로밍된 휴대전화가 잘 가동돼 본사 체육부 데스크에 확정 소식을 알렸고 기사 마감시간도 무사히 지켜낼수 있었다고 본다.
우리 대표단 기자단 모두는 이날 “드디어 해 냈다”는 보람을 만끽했다. 이날 저녁 7시30분부터 화이트샌즈호텔 연회장에서 김범일 대구시장 주최로 열린 축하 리셉션에는 유종하 위원장, 박정기 집행이사 등 대구 유치단 관계자 전원이 참석했다.
헬무트 디겔(독일) IAAF 부회장, 세사르 모레노 브라보(멕시코) 기술담당 임원, ‘인간 새’라는 별명으로 장대 높이뛰기 세계 기록을 35차례나 세웠던 세르게이 붑카(우크라이나), 이사야 키플라가트 케냐 육상연맹 회장 등 10여 명의 IAAF 집행이사들도 와 대구 유치를 축하해 주었다.
아프리카에서의 마지막 날인 28일 오전 10시30분 호텔 체크아웃을 했다. 오전 11시 케냐 사진기사(프란시스 인조르지)가 호텔에서 20여분 거리에 홀러파크 미니 사파리가 있다고 해 비행기 출발 전 오전 2시간을 이용해 돌아 보았다.
미니 사파리에는 기린, 하마, 악어, 거북, 누우 뱀, 이구아나 도마뱀 그리고 파충류 박물관과 어류양식장 정도 밖에 없었다. 대구의 달성공원 수준에 불과해 실망했다.
28일오후 4시50분 몸바사에서 케냐항공을 이용, 나이로비로 출발해 귀국길에 올랐다. 방콕을 거쳐 공항 대기시간 등으로 30일 오전 6시에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아프리카를 뒤로 하면서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호텔과 그 주변에서 만났던 현지인들의 따뜻한 모습과 크로스컨추리경기장에서 갑자기 폭도로 변해 버스를 공격하고 마구 주머니를 뒤지던 현지인들의 두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아프리카가 또다른 의문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