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옆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이하 안내소)가
있다. 주차장은 평일이라 공간의 여유가 넘치며, 안내소에는 괘릉을 맡은 해설사가 답사객이
없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인근 문화유적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괘릉 주변으로 길게 담장을 둘렀고, 삼문(三門)을 통해 괘릉 능역(陵域)으
로 들어섰다.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겨울은 17시)였으며, 관람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없었다. 허나 20년 가까운 세월이 무심히 흐르면서 괘릉을 지키던 담장은 사라지고, 담장 대
신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푸른
철책이 도로와 화표석 사이에 둘러져 있다. 해설사
에게 이유를 물으니 경주시청에서 관람 편의를 이유로 담장을 철거했다고 한다.
담장 철거로 그 안에 가려진 괘릉은 그 속살을 시원히 드러냈으나 그래도 신라 후기 제왕(帝
王)의 능인데, 능을 보호하고, 능역과 속세를 가르는 담장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특히 문화유
산 도난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보물급의 지위를 간직한
괘릉의 석인(石人)과 석사자상, 화표석 같은 것은 아무리 무겁고 견고한 돌이라고 해도 방심
은 금물,
그들 또한 도난의 마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멋드러지게 우거진 송림(松林)에 둥지를 튼 괘릉은 북쪽에 능이 있고, 능이 바라보는 남쪽에
넓게 터를 닦아 좌우 2열로 석인 2쌍과 석사자 2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두어 서로 마주보
게 했다. 화표석 앞에는 도로가 굽이쳐 지나가는데, 이는 괘릉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키 작
은 철책을 둘러 경계로 삼았으며, 화표석과 도로 사이가 너무나 가까워 옥의 티를 진하게 풍
긴다.
도로를 길 남쪽 하천 너머로 밀어내고, 기존 도로에는 잔디와 소나무 등을 심어 능역을 확장
하고 담장을 두르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해설사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니 안그
래도 경주시에서
그럴 계획이 있다고 그런다. (계획만 있는 모양임) |
괘릉은 경주에 기러기처럼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이다. 그냥 커다란 봉분만 있던 신라왕릉이
무열왕릉(武烈王陵)에서 최초로 능비(陵碑)가 생기는데, 이는 당(唐)나라 능묘(陵墓) 양식에
군침을 흘리며 도입했기 때문이다.
신문왕릉(神文王陵)에 이르면 봉분 아랫도리에
호석(護石)을 두르면서 무덤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성덕왕릉(聖德王陵)에는 비어있던 호석
판석(板石)에 12지신상을 만들고, 무덤 주
변을 돌난간으로 두르며, 석상(石床)과 함께 석인 2쌍과 석사자 1쌍을 능 앞에 펼쳐놓는다.
거기서 더 발전한 모습이 바로 괘릉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이다. 그중에서도 괘릉이 신라 왕릉
의 백미(白眉)라 통할 정도로 완비된 능묘제도를 자랑하는데, 그래서 봉분만 달랑 있는 다른
왕릉과 달리 볼거리가 많다.
그런데 다른 왕릉은 '~~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괘릉은 그런 이름 대신 괘릉이란 이
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여 유일하게 능호(陵號)를 가지고 있는 셈인데, 오래 전부터 흘러오
던 속설(俗說)에 따르면 무덤 자리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의 원형을 살리면서 제
왕의 관을 수면 위에 걸고, 흙을 쌓아 능을 닦았는데, 그런 연유로 걸어놓는다는 뜻의 괘릉이
되었다는 것이다.
괘릉은 신라가 망하면서 속세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누구의 능인지도 모른 채, 적당한
기록에 오르지도 못하고 버려진 것이다. 그러다가
1669년에 작성된 '동경잡기(東京雜記, 동경
은 고려 때 경주의 이름)'에 괘릉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경주부(慶州府) 동쪽 35리(당시 10리
는 5km)에 떨어진 주인을 모르는 능이라 나오면서 앞서 언급된 괘릉의 유래가 나와있다.
18세기에 이르면서 신라 왕실의 후예인 경주박씨와 경주김씨, 경주석씨들은 앞다투어 경주 땅
곳곳을 들쑤시며, 그들의 조상묘 찾기 프로젝트를 벌였다. 그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
유사(三國遺事)를 참조하여 묘를 찾았는데, 꼼꼼하게 살피지 않고 대충 기록에 나온 자리를
맞춰가면서 조상묘로 삼았다. 하여 그 시절에 이름 없던 신라 고분 20여 기가 졸지에 '~~왕릉
'이란 가면을 쓰게 된 것이다. (그중에 성덕왕릉, 흥덕왕릉, 무열왕릉 등은 99% 이상 맞음)
한편 경주김씨는 괘릉에 군침을 흘리며 신라 제왕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는 문무왕(文武王)의
능으로 삼는 어거지성을 발휘한다. 어느 기록에도 이곳이 문무왕릉이라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
이다.
그들은 이곳이 문무왕릉의 허묘(墟墓)일 수 있다면서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를 올렸다
고 한다.
그렇게 문무왕릉이란 가면을 강제로 눌러 쓴 괘릉은 왜정(倭政) 때 이르러 정체성에 대한 중
대한 수정을 받게 된다. 1931년 입실소학교에서 인근 말방리 절터로 소풍을 갔는데, 거기서
깨진
비석 조각을 발견했다. 하여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달려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
總覽)'과 대조하여 비석 조각의 수수께끼를 풀었는데, 그 결과 그곳은 원성왕과 인연이 깊은
숭복사터로 밝혀졌다.
또한 비문에 괘릉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어 원성왕릉 설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허나 경주
김씨 측은 이를 끝까지 무시했으나 1968년 동해바다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밝혀지고 언론사에서 크게 특집으로 다루면서 괘릉을 포기하게 된다.
그 이후 괘릉<전(傳) 원성왕릉>이라 불리다가 이제는 숭복사비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
록을 토대로 완전히 원성왕릉으로 99% 이상 굳어진 모양이다. 해설사도 이곳이 원성왕릉이 맞
다고 그런다. 예전에는 아리송하다는 뜻의 전(傳)을 붙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전'도 쏙 사
라져버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붕어(崩御)하자,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火葬)을 했다고 하며
, 삼국유사에는 능이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
(崇福寺)라고 한다. 마침 숭복사가 근처에 있었고, 주변에 마땅한 고분이 없으며, 최치원(崔
致遠)이 쓴 숭복사비에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동곡사)가 괘릉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신하들은 원성왕에게 곡사 자리가 능 자리로 좋다고 추천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허나
신하들
의 계속되는 설득에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숭복사 자리로
옮겨져 헌
강왕(憲康王) 때 대숭복사(大崇福寺, 지금의 숭복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왕의 땅
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기 때문
이다.
얼마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 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괘릉의 주인인 원성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 독서삼품과로 유명한 신라 38대 군주, 원성왕<元聖王 ?~798
(재위 785~798)>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金敬信)으로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아버지는
김효양(金孝讓)
으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자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했으며,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
人,
혹은 지오부인<知烏夫人>) 박씨로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올렸다. 부인은 숙정부인 김씨(
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780년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이찬 지정(志貞)의 난을 평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혜공
왕(惠恭王)이 살해되고 만다. 그래서 김양상에게 힘을 실어 재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신라
37대 군주인 선덕왕(宣德王)이다. 그 공로로 김경신은 상대등(上大等)에 올라 그 이름을 크게
떨친다.
한편 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은 세력과 덕망을 키우며 대권을 노리고 있었는데, 김
경신보다 서열도 높았고 세력 또한 컸다. 마침 선덕왕이 후사도 없이 붕어하자 중신(重臣)들
은 너도나도 김주원을 추대하기에 이르고, 김경신의 자리는 크게 위협을 받게 된다.
그와
관
련해서 재미있는 설화가 한토막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선덕왕 시절에 김경신은 묘한 꿈을 꿨다. 그는 일상적으로 쓰던 두건를 벗고 소립(素笠, 갓)
을
썼으며, 12줄 거문고를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그래서 점쟁이에
게 물어보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을 잃는다는 뜻이며, 삿갓을 쓴 것은 목에 칼을 쓰는 것입니다. 12줄
거문고를 든 것은 포박되는 것이며,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영 좋지 못한 흉몽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제대로 토라진 김경신은 종일 집에 틀어박혀있
었고. 그 와중에 그와
무척 가까운 여산(餘山)이 찾아왔다.
여산이 김경신의 주눅 든 모습에 이유를 물었다. 대답을 회피하던 김경신은 결국 꿈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 이야기가 끝나자 갑자기 옷깃을 여미며 자신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이다.
김경신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여산이
'그 꿈은 공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후일에 공이 출세하면 저를 잊지 마십시요!'
김경신이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건 무슨 소리요?'
'두건을 벗는 것은 윗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며, 삿갓을 쓴 것은 왕관을 쓴다는 뜻입니다.
12
줄
거문고를 손에 쥔 것은 공이 왕의 12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공은 내물대왕
의 12세손이 아닙니까? 또한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물의 도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김경신은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며
'무열대왕의 6세손인 김주원이 떡 버티고 있는데, 나에게 그런 자리가 오겠소?'
'저와 공은 친분이 두텁습니다. 어찌 감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믿어주십시요. 일단 물과 인
연을 두텁게 하기 위해 알천으로 나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산의 권유에 따라 매일 알천(경주 시내 북쪽에 흐르는 하천)에 나가 기도를 했다. 말은 기
도이지만 아마도 중신과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고 친분을 두텁게 쌓는 작업이었을 것
이다.
785년이 되자 선덕왕이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귀족들은 서열이 제일 높고, 덕망
과
세력을 두루 갖춘 김주원을 제왕으로 추대했다. 그때 김주원은 알천 북쪽에 살고 있었고,
김경신은 남쪽에 있었다.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알천이 범람을 하
고
말았다. 중신들과 김주원은 비가 그치길 기다렸으나 폭우는 7일이나 계속 되었다. (폭우라
고
하지만 김경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그의 길을 알천에서 막은 것을 비유한 듯 싶다)
상황이 이러자 중신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늘만 쳐다보며 대책을 논의했는데
'하늘이 주원공을 원하지 않아 이런 홍수를 내린 것이 틀림없소! 상대등인 경신공은 선왕 폐
하의 아우로 덕망이 높고, 임금이 될 기상을 갖추고 있으니 그를 추대하는 것이 어떻소?'
이렇게 논의가 나오자 다시 중의를 거쳐 결국 김경신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어지럽게
내리던 큰 비는 뚝 멈추었고,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반면 김주원은 알천을 건
너지도 못하고 김경신에게 왕위가 돌아갔다는 말에 격분해 강릉(江陵)으로 내려갔다.
이에 김경신은 그가 모반을 꾀할까 두려워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 달랬으나, 나중에 김
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부친의 한을 갚는다며 웅진(熊津, 공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
으켰다.
이렇게 중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왕위에 오른 김경신은 바로 그해 아들 김인겸(金仁謙)을 태
자(太子)로 봉하고, 시조대왕<김알지(金閼智)인듯>, 태종무열왕, 문무왕, 조부(祖父)인 흥평
(興平)대왕,
부친 명덕대왕을 제사지내는 5묘를 세웠다. 또한 문무백관의 작위를 1급씩 올려
주고, 충렴(忠廉)을 상대등에,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총관(摠管)이란
이름을 도독(都督)으로 바꿨다.
786년 4월, 동부 지역에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모두 상했으며, 김원전을 당나라에 보
내
조공(朝貢)을 건네자. 당나라 덕종(德宗)이 왕을 칭송하는 조서(詔書)와 함께 여러가지 선
물을 보냈다.
9월에는 도성에 기근이 심하자 곡식과 조 33,240석을 풀었으며, 10월에 33,000석을 더 풀었다
.
그리고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치자 굴압현령의 벼
슬을
내렸다.
787년 2월, 도성(都城)에 지진이 생기자 왕은 신궁(神宮)에 제를 지내고 죄수를 방면했다. 7
월에 황재(蝗災)가 들어 농사를 망쳤다.
788년 봄,
그 유명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시행했다.
독서삼품과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
傳)과 예기(禮記), 문선(文選)에 정통하며, 논어(論語), 효경(孝經)까지 두루 섭렵한 자를 상
품(上品)으로 삼고, 곡예와 논어, 효경에 밝은 자를 중품(中品),
곡예, 효경만 읽은 자를 하
품(下品)으로 삼았다. 그리고 오경(五經)과 삼사,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모두 외운 사람은
특별히 등급을 초월하여 썼다. 그 이전에는 활과 무예로 인재를 뽑았는데, 그것이 확
변한 것이다.
가을에 서쪽 지방에 한재와 황재가 들고 도적이 들끓자 사람을 보내 백성을 위무했다.
789년 1월, 한산주(漢山州)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조와 곡식을 보냈으며,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또 상했다.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경기도 양평) 소수(小守)로 삼자, 사람들
이
그는
문적(文籍) 출신이 아니라며 반대했으나 시중(侍中)이 그는 당나라에서 공부를 한 사
람이니
괜찮다고
권하자 왕은 그대로 시행했다.
790년 정월, 종기를 시중에 명하고,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자 전주(全州)를 비롯한 7주의
백성을 징발해 공사에 들어갔다. 웅천주(熊川州, 공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으며, 3월에
일길찬(一吉粲) 백어를 발해(渤海)에 사신으로 보냈다. 5월에 곡식을 풀어 한산주와 웅천주
백성을
구제했다.
791년 태자 김인겸이 죽자 시호를 혜충태자(惠忠太子)라 했으며, 이찬 제공이 불만을 품고 반
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처단했다.
10월에 폭설이 도성에 내려 얼어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시중
종기를 면직시키고 혜충태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김준옹<金俊邕, 이후 소성왕(昭聖王)>을
시중으로 삼았다. 손자를 시
중에 삼을 정도라면 원성왕도 제법 나이가 있었다는 소리이다.
792년 7월, 당나라 제왕에게 미녀를 보냈다. 8월에는 왕자 김의영(金義英)을 태자로 봉했으며
,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世强)을 상대등에 삼았다. 그리고 시중 김준옹이 병으로
면
직되자 이찬 숭빈을 시중에 삼았다.
793년 8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794년 2월, 지진이 생겼고, 태자 김의영이 죽자 시호를 헌평태지(憲平太子)라 했다. 시중을
숭빈에서 언승으로 교체했으며, 7월에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했다. 한산주에서 하얀 까마귀를
진상했으며, 궁궐 서쪽에 망덕루(望德樓)를 지었다.
795년 정월, 손자 김준옹을 태자로 봉했다. 4월 한재가 들자 죄수를 친히 살폈으며, 8월에 서
리가 내려 곡식이 상했다.
796년 봄, 도성에 기근이 심하고 전염병이 생기자 창고의 양곡을 풀어 구제했다. 4월에 동생
인
김언승(金彦昇, 나중에 헌덕왕)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이찬 지원을 시중으로 삼았다.
797년 9월, 도성 동쪽에 황충(蝗蟲)으로 농사를 망쳤고, 홍수로 산이 무너졌다. 시중을 김삼
조로
갈았다.
798년 3월, 궁궐 남쪽 누교가 화재를 입었고,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부딪쳤다. 6월 한재
가
있었고, 굴자군(屈自郡, 경남 창원) 대사(大舍) 석남오(石南烏)의 아내가 3남 1녀의 쌍둥
이를
낳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9일 왕이 붕어하니 시호(諡號)를 원성(元
聖)이라
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 삼국유사에는 토함산 서
쪽 동곡사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원성왕은 신라의 마지막 성군(聖君)이자 막바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이다. 비록 홍수와 한재
, 서리 등의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나 농사를 망치긴 했지만 수시로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
했으며,
벽골제 등의 수리시설을 증축하여 농사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는 자식들의 명이 짧아 태자로 삼은 두 아들이 몇 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끝내는 손자
를 태자로
삼아 후계를 잇게 했다. 게다가 아들과 손자, 동생 등 가족과 근친 가족을 주요
요
직에 앉혀
자신의 왕권강화에 주력했다. 그래서 그 덕에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는
괘
릉을 만들어 편히 발 뻗고 눕게 된 것이니 그의 권력과 지지 기반이 그만큼 튼튼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고, 심지어 미녀까지 보내면서 당나라에 아부를 떨었으나, 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살던 신라의 호국용(護國龍)을 몰래 물고기 3마리로 둔
갑시켜 자기네 나라로 빼돌리려 한 것을 그들을 족쳐 빼앗아왔다는 설화가 있어 당나라와 적
지 않은 충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호국용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나라
에서 무척 탐을 내거나 부담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싶으며, 그 이후로 당에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 없다.
또한 주목할 것은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단순히 북국(北國, 발해)에
사신을 보냈
다고 했을 뿐,
자세한 건 모름>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화엄종(華嚴宗) 승려 묘정(妙正)을 내전(內殿)에 두어 늘 곁에 부렸다
고
하며, 봉은사 등의 절을 창건했다.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고 하는데,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허나 내용이
전하지 않으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자식들로는 태자로 임명되었다가 죽은 두 아들 외에 대룡부인(大龍夫人)과 소룡부인(小龍夫人
) 등
두 딸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