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에페 4, 2)
살아온 사제생활 42년
서울대교구 특수사목담당 교구장 대리
최 창 화 토마스 데 아퀴노 몬시뇰
피난지에서 싹튼 성소, 수도 교구 중추 사제로 우뚝
서울대교구 특수사목담당 교구장 대리 최창화(崔昌和ㆍ토마스 데 아퀴노) 몬시뇰의 직함은 참 많다. 우선 특수사목 분야로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위원장, 직장사목담당, 일반병원사목담당, 결찰사목담당이 있다. 여기에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까지 겸하고 있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 과연 수도 서울을 맡고 있는 서울대교구의 중추 사제라 할 수 있다.
“1971년 12월 8일 명동 주교좌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님 주례로 사제품을 받은 이래 42년 동안 오직 ‘인내심을 가지고 한결같이 살자.’는 신념과 자세로 살아왔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에페 4, 2)살려고 노력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최 몬시뇰이 이런 신념과 자세를 갖추게 된 시기는 훨씬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6년 3월 소신학교인 성신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다. 이후 소신학교와 대신학교 전 과정을 마치고 사제가 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성소를 받게 된 계기도 예사롭지 않다.
최 몬시뇰은 1942년 3월 5일(월남 후 가호적할 때 어머니가 1943년으로 줄임)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남천리 209번지에서 아버지 최찬익(崔贊益ㆍ베드로. 2004년 1월 6일 91세로 선종) 님과 어머니 전성일(全成一ㆍ유스타. 2007년 10월 28일 91세로 선종) 님 사이의 5남 3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1984년 5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사목방문 때 명동 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와 함께 환자로서 교황 강복을 받고 그해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47세의 아까운 나이에 선종한 최창정(崔昌鼎ㆍ요아킴) 신부가 맏형이다. 노 대주교는 그해 6월 선종했다.
어머니가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온 가족이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38선 이북에 공산정권이 들어서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월남해 서울에 정착했다. 6.25 한국전댕이 터지고 1·4후퇴 때 기차 지붕을 타고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미군 수송함(LST)으로 제주도까지 피난했다. 그 시절 최창정 신부는 밀양에 가 있던 ‘피난 소신학교’에 입학해 방학을 마치고 개학해 갈 때마다 온 가족이 부둣가에서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하곤 했다.
최 몬시뇰은 제주도 중앙 성당에서 신학생에게 복사(라틴어 경문)를 배웠으나 너무 어려 촛대 잡이만 했다. 1954년 부산으로 다시 나와 서대신동 성당에 가서야 집전 신부 곁에서 복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새 초등학교 고학년생으로 자란 것이다.
“당시 주임 신부님은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의 권요셉 신부님이셨고 정의채 몬시뇰님이 보좌 신부님이셨습니다. 제주도에서 촛대 잡이만 하다가 부산에 와서 정식 대복사를 하게 되니 그 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 없었지요. 복사 하는 재미는 야단맞아도 섭섭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미사 드리는 신부님이 훌륭하게 보였고 나도 신부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졸업반 무렵 어느 중학교에 갈까 고민하면서 부산중학교 입학 원서를 준비했다가 보좌 신부님에게 어떻게 하면 신학교에 갈 수 있느냐고 상의했습니다.”
정의채 몬시뇰은 서울 소신학교 입학 관련 서류를 모두 준비해 주고 추천까지 해 주며 ‘최창화 소년’을 사제의 길로 이끈 ‘아버지 신부’다. 피난지에서 복사하면서 싹튼 사제성소가 ‘무화과나무’처럼 자라 한국교회의 흔들림 없는 버팀목이 된 것이다.
“순교자 현양 사업은 세말까지 계속되어야”
올해 추계 주교회의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한 시복 준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124위에 대한 시복 청원은 지난 3월 교황청 시성성 역사위원회와 10월 신학위원회를 통과했고, 이제 추기경과 주교회의, 교황인가만 남았다. 1984년 103위 시성에 이어 124위에 대한 시복시성도 확실하다. 새해 9월 순교자 성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방한해 시복식을 집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교회의 경사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최 몬시뇰이 이끄는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의 공이 크다.
“우리는 끝까지 기도할 따름입니다. 124위에 대한 시복시성이 결정되면 우리 서울대교구는 나름대로 큰 잔치를 마련할 것입니다. 순교자 현양사업은 세말까지 계속되어야 할 우리교회의 사명이며 공동체적으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초대교회 신도들의 공동생활(사도 2, 43 참조)처럼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124위 시복시성에 대한 기대로 교회 안팎에서 일고 있는 들뜬 분위기와 달리 실무 책임자 최 몬시뇰은 오히려 담담하다. 변함없는 기도가 요구된다고 강조할 뿐이다.
시복시성을 위해 현양위원회가 그동안 해 온 사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 103위 시성식을 시작으로 25주년 되던 2009년에 여의도 기념행사와 감사 미사 봉헌, 시성터 기념표석 설치와 축복식 • 매년 순교자 성월에 전국 주교들을 강사로 한 특강과 미사 봉헌 • 매달 절두산 성지 순교자 현양 미사(10시)와 명동 지하성당 시복시성을 위한 미사(셋째 주 화요일 11시) 봉헌 • 격년으로 성지순례 안내봉사자 양성교육 • 2002년 수표교 세례자 요한 이벽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에 한국천주교창립터 기념표석 설치와 축복식 • 한국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와 함께 시복시성을 위한 묵주기도 125억단 봉헌 선포식 • 교구내 순교성지순례길 3개 코스 개발 • 성지안내 봉사자 서울과 지방 성지 안내 • 2013년 11월 22일 ‘세례자 요한 이벽의 삶과 믿음’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 개최 등이 두드러진다.
앞으로도 •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가회동 성당 주변, 좌포도청 자리(옛 단성사 자리로 추정)를 중심으로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터 성역화 사업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특히 서소문 밖 네거리는 새남터와 함께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으로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순교한 한국 최대 순교성지다. 신원이 확인된 순교자만 100명이 넘으며 103위 성인 가운데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비롯한 44위,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27위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현재 근린공원으로 되어있으나 최근 기획재정부와 서울시, 중구청에서 역사공원으로 용도 변경하는데 합의함에 따라 성역화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국고(50%)와 서울시(30%), 중구청(20%) 예산으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와 같이 조선 후기 역사 기념터로 조성한다는 계획이지만 천주교 박해사를 빼고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공원 조성은 우리교회의 오랜 염원이기도 하다.
“이는 순교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이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교회가 순교자들의 피로 성장되고 있으며 일반 사회도 한국천주교회의 뿌리 깊은 순교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는 더욱 복음화 되라는 의미의 자극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복음화는 주님을 만나고, 교리 배워 세례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나 복음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정자들 정치적 욕심 버려야 민족화해 이뤄져
북핵문제와 인권문제로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실향민 최 본시뇰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민족화해위원장으로서 그동안 북한을 여러 번 방문했다. 초호화 생활을 하는 최고 권력자와 달리 피골이 상접한 북한 주민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인도적 지원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으면서 살 권리를 갖고 태어나는데 남북의 몇몇 위정자들의 정치적 욕심으로, 혹은 정치적 체제 유지를 위해 인권을 유린하고 죽음의 문화로 권력을 남용하는 것은 창조주의 뜻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최 몬시뇰의 확고한 믿음이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구소련이 붕괴되고 분단된 독일이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준비 없이 그냥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조국도 평화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평화 통일을 이루기 위해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져야 하고, 진정한 화해는 쌍방의 뜻이 일치해야 하고, 위정자들의 정치적 욕심이 없어져야 하고, 주변 강대국들의 협력 가운데 당사국간에 쌍방이 조금씩 양보한다면, 점점 가까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나눔도 실천하고 남북 체제의 특성을 상호 인정하면서 서서히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남북 간의 상호방문, 서신 교환, 통신 교환, 물자 왕래, 자유로운 여행 등이 이루어집니다.”
평양교구 소속으로 소신학교에 입학한 최 몬시뇰의 고교 시절, 당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와 평양교구장 서리 케롤 조지 몬시뇰(안 주교) 간에 “통일이 되면 다시 평양교구 소속으로 적을 옮긴다.”는 조건으로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과 사제들을 모두 서울교구 소속으로 적을 바꾼 일이 있다. 이에 따라 통일이 되면 최 몬시뇰은 곧장 평양으로 달려가야 한다. 아직 고향에 사촌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는 칠순을 넘긴 노 사제에게 민족화해와 통일은 그만큼 더 절박하다.
후배 사제들 본분에 충실했으면
고 최창정 신부는 최 몬시뇰에게 다섯 살 많은 맏형이자 사제 선배다. 1961년 12월 30일 명동 성당에서 노기남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은 최 신부는 23년의 짧은 사제생활을 했지만 불꽃같은 열정으로 사목했다. 첫 임지 후암동 보좌를 거쳐 1963년 군종신부가 되어 자원자 없는 첫 파월 군종신부를 자청해 맹호부대 소속으로 월남으로 갔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퀴논과 나트랑 전선을 넘나들며 장병들에게 상담은 물론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폐허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던 현지민들을 위한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대가로 얻은 건 고엽제였으며 귀국해 8년 동안의 군종신부 생활을 마감했다.
이문동 주임을 거쳐 청담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1976년 6월 초대 주임으로 부임해 잠실동(1977년)과 도곡동(1978년), 압구정동(1979년) 본당 등 강남 지역 본당을 설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1980년 9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많이 사는 독일 함부르크 본당 주임으로 가 북부 독일 6개 교구와 스웨덴 지역 교포들을 위해 헌신하던 중 이번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병, ‘골수암'을 얻어 1984년 3월 귀국해 교황 강복을 받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언제나 열정적이시던 형님은 신학생 때부터 사제가 된 다음까지 저에게 많은 꾸지람을 주셨습니다. 그러시던 형님이 당시에는 무척 싫었는데 지금은 그립기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사랑하는 후배 사제들에게 본분에 충실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목자인 사제의 본분은 양(신자)들을 보호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요한 14, 6)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성사 집행과 미사 봉헌에 최선을 다해야 하 겠지요.”
글 최홍운 alsemffp34@naver.com
사진 인영오 05erns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