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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남은 음성
오월이 다 가고 있군. 답장이 늦었네. 지난번 자네 편지 받고 곧 편지 쓰려 했는데 작은 일이 하나 있었네. 아니 그것을 작은 일이라고 해야 할까. 말하자면 어느 순간 인간들은 예감 같은 걸 가질 수 있는데, 그런 예감 같은 것이 적중한 일, 말하자면 인생이 책이라면 그 페이지를 넘겨주는 손길 같은 일…… 그런 일들이 내게 일어났네. 말이 횡설수설이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겠네.
지난번 자네 편지 받고 그 편지 속에서 마흔이 다 된 자네의 고민 같은 게 읽혀지는 듯했네. 담담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싶다고. 한때 사랑했던 자네의 옛 연인이 불행한 모습으로 자네 앞에 다시 섰다고. 그냥 그녀와 저녁 한끼 먹고 어색하게 손 흔들며 헤어지고 나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네의 모습이 내게 보이네. 자네는 원래 그런 친구가 아니던가? 아니, 자네는 이렇게 말하면 또 그것이 자신에 대한 비난인 줄 오해할 수도 있네만, 한때 우리들 모두가 잡혀가고 고문받고 하던 시절에도 감옥에서 나오면 거의 팔 킬로나 줄어 있던 몸으로 다시 묵묵히 일하던 자네가 아닌가. 고문에 대해서 자네가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지. 고문받던 바로 옆방에서 우리의 동료이자 자네의 동지가 입을 열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우리들을 고발하고 난 후 수사관들이 샴페인을 터뜨리던 소리를, 알몸으로 칠성판 위에 묶인 채 들어야 했던 그 참혹한 밤의 기억도 자네는 십수년이 지난 후 털어놓았지. 그래, 쓰다보니까 이상한 기분이 드네. 고문 투옥 동지…… 마치 행복이나 사랑 혹은 운명이라고 쓰고 있는 듯도 하네. 시간이 많이 지났네. 세월이 흘러갔다는 말이지.
자네가 이니셜로 J라고 표기했지만 그게 누군지 나로서는 대충 짐작이 가네. 이제야 고백이랄 것도 없는 고백을 하자면 그녀를 나 역시 한때는 설레는 눈으로 바라본 일이 있었네. 그녀는 우리 모두의, 말하자면 여주인공 같은 사람이 아니었겠나. 검은 눈, 맹렬히 다가오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몸매나 눈동자쯤은 사실 길거리에 있는 속물들의 잡지처럼 통속적이었겠지. 그녀의 고향이 광주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그녀를 기억하는 일은, 혹은 자네가 그녀의 새삼스러운 출현에 몸살을 앓을 정도로 괴로웠던 것은 그저 흘러간 유행가만큼이나 부질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녀가 다시 광주에서 자네를 찾아왔다는 말이…… 내게 박혀왔네. 광주…… 광주에서, 한 날개를 꺾고 자네에게 다시 온 여인이라. 그녀가 어떻게 불행해졌던가, 그녀가 정말 불행해졌던가, 나는 그런 말을 물으려 했네만……
나는 며칠 전 라체부르크라는 도시에 다녀왔네. 여기 베를린에서 가자면 함부르크 조금 못 미쳐서 있는 아름다운 호수도시라네. 유명한 전지요양지이고 케테 콜비츠와 함께 활동했던 발라크의 미술관이 있는 도시, 부르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유서도 깊은 도시라고 보이네. 부르크란 예전에 성이 있던 곳을 말하는 거니까. 아마 그 성에 공주도 왕자도 살았겠지? 지금은 할머니가 된 공주 말이야, J라면 아마 그렇게 물었겠지. 스물한살, 그녀는 우리가 심각한 토론을 할 때도 가끔 그렇게 엉뚱한 소리를 했으니까. 그때 그녀의 단호한 표정 때문에 바보들 빼고는 모두 그게 굉장히 중요한 문젠가보다, 잠깐씩 그렇게 생각할 뻔도 하지 않았나 말일세. 그런데 그녀와 자네가 한때 그렇게 서로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네. 순전히 나의 무딤 탓이네. 지금의 제수씨가, 그녀와 자네가 함께 감옥에 갔을 때 자네를 면회함으로 인해 자네는 그녀와 헤어지고 지금의 제수씨와 맺어지게 되었다는 것도 잘 몰랐었네. 그러나 겨우 사십년을 살고 돌아보니, 그게 아니더라도 헤어지는 일은 많네. 이별이란 어쩌면 가장 손쉬운 사랑의 회피수단이지. 그러니까 가장 통속적인 사랑의 결말이 이별이란 말일세. 그러므로 잠시의 별리는 만남의 또다른 시작, 장편으로 치자면 겨우 한 챕터가 넘어간다고 해야 할까. 불륜이니 도덕이니 하는 말은 자네와 내게 모두 어울리지 않으니 하지 말게나. 제 처를 거느리고 다른 여자의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꼭 순결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나는 이제 정말 모르겠는 기분이네.
라체부르크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군. 그래, 자네도 알다시피 내 은사 트루머 선생께서 베를린으로 전화를 하셨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베를린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어린 마누라 덕에 마르부르크를 떠나 여기 베를린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지라 요즘은 자주 뵙지 못하는 그분. 그래, 자네도 기억하지 않는가. 오년 전쯤인가 내가 마르부르크라는 레고로 지어놓은 것 같은 도시에서 석사논문을 쓰고 있을 때 자네가 그 도시에 왔었지. 그때 내가 데려간 재즈 바에서 색소폰을 불던 그 금발의 노인네 교수 말일세. 노인네라고 하면 그 양반 화를 내겠군. 아직도 아주 작고 허름한 차만을 고집하여 타고 다니는, 우리나라로 치면 386세대와 비길 수 있는 독일의 68세대, 그러니까 그 당시 전유럽을 뒤흔들고 미국까지 영향을 미쳤던 그 진보의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람. 아직도 청바지를 입고 일주일에 한번씩 마르부르크의 친구가 경영하는 바에서 색소폰을 부는 그를 보면 늙었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네. 제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그저 여자와 앉아 시시한 농담이나 하는 우리 쪽이 실은 더 늙었다고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뭐 그런 기분을 들게도 하는 그 양반이 라체부르크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전화를 했네. 작은 모임이 있는데 한국어 통역이 좀 필요하다고 하더군. 마침 논문 일로 상의할 것도 있고 해서 흔쾌히 그러마고 했지. 그 양반이 마르부르크에서 기차로 올라오는 바람에 우리는 함부르크 중앙역에서 만났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는 내 차로 두 시간 반쯤의 거리인데, 때는 오월 말이었네.
라체부르크로 떠나는 날은 아주 맑았네. 요즘 시집에 심취해 있는 어린 아내는 시를 하나 적은 포스트잇을 내 안주머니에 붙여놓았더군. 18세기 독일 작센에서 태어난 희곡작가 레싱의 극시 한 구절이라고 기억되는데, 이런 것이었어. “안개가 피어오르고/잎이 떨어진다/포도주를 부어라, 부드러운 포도주를/우리 이 잿빛 나날들을 금빛으로 만들자/그래, 금빛으로 만들자.” 자네가 들으면 내가 늙마에 어린 아내를 데리고 호사하고 있다고 농담을 건넬지도 모르지만 그날은 독일 날씨답지 않게 화창했거든. 여기 사람들은 며칠 날씨가 좋으면 구텐 탁, 우리말로 좋은 날이라고 번역될 심상한 인사말조차 아주 다른 억양으로 한다네. 오월이 아니던가?라고 누가 물을지 모르지만 올해 베를린은 부활절이 지나고 한달이 가도록 날씨가 엉망이었네. 지난 가을 덮였던 두꺼운 하늘의 회색 뚜껑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않고 딸기를 팔려고 거리에 딸기 모양으로 예쁘게 지어놓은 가판대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네. “우리는 태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디 해가 나서 딸기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태양만 가득한 나라인 한국에서 사는 자네는 이 말이 의미하는 그 음울함과 간절한 소망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함부르크에서 만나 라체부르크까지 트루머 교수를 내 차로 모셨네. 불과 몇 달 전에 본 양반이었는데 그새 더 늙고 힘이 빠져 보였어.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의 동지였던 한 사람이 이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우리가 찾아갈 곳, 병석에 누워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에 관해 짧게 이야기를 꺼냈네.
“진수, 그 사람은 지금 누워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어. 죽으면 광주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는군. 그와 사십년을 함께한 그의 부인은 안된다고 하는 중이고…… 그녀가 우리에게 연락을 했네. 그녀는 그를…… 혹시 죽으면…… 만일 그가 여기서 죽어버린다면…… 가족묘지에 묻고 싶다고…… 자네 광주라는 곳에 가보았는가?”
대체 어떤 독일인이, 이곳에 앓아누워, 자신이 죽으면 한국에, 그것도 한국의 작은 도시 광주에 묻어달라고 하는지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네.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는 우리가 알 만한 그런 인물이었어. 우리가 대학교에 들어와 처음 보았던 광주민중항쟁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생각나나? 그 필름을 세계 최초로 찍은 그 사람. 그의 이름은 위르겐 힌츠페터였네. 그가 내 스승의 친구라니. 거기에는 우리 선생 트루머 말고도 베를린에서 한 사람, 그리고 빠리에서 한 사람이 더 올 거라고 했네. 그들은 모두, 한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기성세대의 위선에 반기를 들었던 동지들…… 베를린 출신의 동지는 베를린에서 택시운전을 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빠리의 대학 교수였지. 그 빠리의 대학 학장은 한때 그들의 동지였던 독일 여성과 결혼을 한 관계로 친구가 되었다는데 그는 아직도 차가 없다고 했네. 그건 부르주아들이 하는 짓이라고 한다면서, 프랑크 트루머 교수는 웃었네.
이젠 육십이 넘은 옛 친구들이 죽어가는 한 동지의 집에서 모인다…… 전두환이 집권하던 말기에 학교를 들어가 선배들이 이미 이룩해놓은, 돌과 불과 함성과 노래, 온갖 과격한 시위를, 대학 수강신청 하는 법보다 먼저 알아버렸던 나는 그들의 모임에 참석했네. 무엇을 통역해야 하는지 그때까지도 알지 못하면서. 다만, 그가 물었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남았네. 자네 광주라는 곳에 가보았는가?
라체부르크 호숫가에 있는 작은 이층집 앞에는 그의 부인이 나와 있었네. 한국에 있는 우리 어머니를 연상시킬 만큼 온화하고 작은 몸집, 그녀는 트루머 교수가 나를 일컬어 한국사람이라고 하자, 눈물을 글썽였네. 그리고 말했다네. 고맙다고, 여기까지 찾아오니 정말 고맙다고. 실은 나는 한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베를린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뭐 그걸 오래 설명할 수도 없었지.
창밖으로는 어린시절 엄마가 덮어주셨던 아기이불 위에서처럼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언제 먹구름으로 변할지 모르는 변덕스런 독일의 구름들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지. 그 아래로는 아름다운 호수가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다 껴안고 물에 허리를 적신 갈대들이 멀리 떠가는 요트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네. 그렇듯 풍경은 아름다운데 힌츠페터 씨는 바퀴 달린 침대를 탄 채 우리를 맞았네. 그는 몹시 거구여서 거실로 내어놓은 침대가 꽉 차 보였고 얼굴은 몹시 피곤해 보였지만 한국사람이 왔다는 트루머 교수의 말에 그의 눈이 반짝 빛나더군. 내가 왜 여기 이 사람들의 모임에 따라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쾌유를 빈다고 말했지. 그는 힘없는 손으로 악수를 하면서 나를 오래 바라보았네. 그때 그의 눈길에서 나는 왠지 목울대가 꽉 죄어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네. 실은 좀 쑥스럽고 난처했네. 독일인들, 특히 진보적이라고 하는 독일인들의 파티에 여러 번 참석해보고 그들과 밤이 늦도록 독일어로 토론을 벌인 일은 있었지만, 이런 나이 든 사람들, 그것도 전설의 68세대 모임에 참석해보기는 유학생활 십년 만에 처음이었네.
힌츠페터 부인이 치즈와 차를 내왔네. 독일산 흰 포도주도 있었고. 그들의 면면을 자네에게 좀 소개해볼까? 프랑스에서 왔다는 장 마리 바리옹 교수는 아마 사전에 소개가 없었다면 이 집 주인이라고 알아차렸을 것이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옷차림 때문이었지. 그는 프랑스 중년남자 특유의 작은 체구를 하고 있었네. 부인이 독일여자여선지 독일어를 아주 잘했네. 그는 어떻게 바지를 서랍에 넣어두면 저렇게 구겨질 수 있을까 싶게 구겨진 면바지에 역시 그렇게 구김이 간 면 티셔츠 차림이었네. 푸른 눈에 금발의 그는 잘만 꾸며놓으면 1960년대에 알랭 들롱이 나오는 영화에 단역이라도 할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네만 유감스럽게도 외모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어. 심하게 말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 눈곱만 떼고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 같았거든. 첨에 내가 독일에 왔을 때 선배들이 그런 말을 했었네. 학교에 가서 넥타이에 정장을 차려입은 교수를 보거든 우파라고 생각하면 된다. 청바지나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거든 십중팔구 그가 좌파적 성향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 어디까지나 농담이니 그것이 다 들어맞지는 않았긴 했네. 우리 트루머 교수는 스스로에 의하면 동독조차도 이미 성에 차지 않는 좌파 중의 좌파, 그러나 그는 벨기에와 독일의 혼혈인처럼 잘 차려입는 데 관심이 많았거든. 베를린에서 어제 도착했다는 택시운전사 칼 하인츠는 고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스스로의 입을 빌리자면 쫓겨났다고 했네. 그는 입을 열면 세계정세와 독일 녹색당 그리고 쉬뢰더에 대해 어떻게나 날카롭고 혹독한 비평을 해대던지 모두가 그의 말이 끝나기를 숨죽여 기다렸네. 트루머 선생의 말에 따르면 강의를 하는 것에도 학위를 받는 것에도 그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하네. 김나지움 선생을 그만둔 후 아내와도 이혼한 채 혼자 살아가는 그는 어릴 적 영화에서 보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았네. 강마른 몸집과 긴 다리, 거기에 입은 물빠진 청바지까지. 늙수그레한 옛 동지들, 하나는 죽음을 앞두고 바퀴 달린 침대에 누워 거실로 나와 있고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노인네들, 역시 모이니까 우리들이 모이면 그렇듯이 개구쟁이처럼 변하는 듯했어. 서로에게 면박을 주고, 놀려대고 그리고 장난스러운 표정. 죽음을 각오하고 유언까지 하고 얼마 전 수술을 마친 자신의 친구에게 그렇게 억울하면 어서 일어나 흰 포도주를 마시라고, 잘못해서 네가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아직도 예쁜 네 부인까지 우리가 차지할지 모른다고 짓궂은 농담들을 해댔네. 힌츠페터 부인은 함부르크 대학의 도서관 사서로 있다가 정년퇴직을 한 여성이었는데 격의없고 침착하며 온유한 자태가 은은하게 매혹적이었네.
잠시 담소가 끝난 다음 힌츠페터 부인이 작은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들고 나왔네. 그가 지금처럼 치명적인 척추 재수술을 받기 전 한국의 KBS에서 그를 취재해갔던 비디오라고 하더군. 그 비디오를 그가 죽기 전에 정확한 독일말로 통역하면서 보고 싶다고 했네. 나는 알게 되었지, 그것이 그날 내가 그 자리에 있는 이유라는 걸.
생각해보게나.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한국의 현대영화도 아니고, 한국을 소개하는 관광 프로그램도 아니고, 이십오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우리 모두의 젊음을 뒤흔들어놓았던 그 광주의 기억을 2004년의 내가 이곳 베를린에서 라체부르크라는 도시까지 와서 통역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놀랍게도 실은 내가 광주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네. 우리보다 어렸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선혈 낭자하게 죽어갔던 곳, 그 피의 기억보다 진했던 저항의 함성이 있어서, 인간은 어떤 폭력보다 위대하다고, 죽는다 해도, 죽음을 당한다 해도, 인간은 영원히 산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던 그곳을.
그래, 어쩌면 이것이 광주를 잊고 살았던 나날, 이곳에 와서 십년, 정치학을 한답시고 책을 끼고 다니며 옛 동지가 국회에 입성하는 걸 인터넷 중계로 귀기울이고, 요즘은 어떤 대학에 어떤 학과가 자리가 비었다더라, 옛 동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앞날이 암울한 날이면 맥주를 마시면서 기껏 멋있는 말로 나 스스로를 위로하던 날들의 댓가라고, 나는 통속적이라도 회개하는 기분이었네만, 아무리 그들이 좌파여서 광주를 이해한다고 해도, 이국의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치욕스러운 학살의 역사를 통역해야 한다는 게, 아직은 민족의 개념을 다 벗어나지 못한, 나는 누구 말대로 B급 좌파, 실은 쓰라리고 모욕스러우며 싫은 기분도 있었다는 걸 솔직히 말해두지.
부인이 비디오를 틀 준비를 끝내자 우리는 모두 자리에 앉았네. 한국의 KBS방송국 서고에서 그 필름은 시작되었네. 기자가 다가가 1980년 오월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자료를 보자, 그 자료들은 찢겨나가고 오려지고 그리고 검은 매직으로 지워져 있는 영상들이 나타났네. 국회도서관에 가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네. 그 프로의 내레이션은 말하고 있었네.
진실을 감추고자 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창문 밖 어둠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영원히 숨기고 싶었겠지만 그 현장에는 목격자가 있었다.
서부 활극의 시작이 아니네. 상투적인 수사 드라마의 시작도 아니었네. 내 귀는 무겁게 귀를 기울였네. 내 입술과 혀는 실은 몹시 힘겨워했지. 화면 속으로 드디어 한 기자가 나타났네. 당시 ARD의 북독일 방송사인 NRD의 토오꾜오 특파원 힌츠페터 씨가 든 카메라가 힌츠페터 씨의 얼굴 없이 광주로 가고 있었네. 자네와 나는 그때 몇 살이었나. 자네와 나는 그때 어디 있었는가. 그는 그때 마흔셋…… 어쩌면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나이였다네. 위르겐 힌츠페터. 지금은 67세. 전직 ARD 기자. 원래 의학도였으나 1968년 혁명 후 기자로 전직한 그…… 젊은 그는 카메라를 메고 그 당시 피가 피를 부르던 베트남으로 캄보디아로 떠났다고 했네. 가만히 있었으면 의사가 되어 살 수도 있었을 그 사람. 그 사람이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토오꾜오로 간 걸세. 그리고 운명과 같은 그날, 1980년 5월 19일 월요일 아침, 라디오에서 광주라는 이름을 듣게 되면서 어쩌면 그의 운명과 어쩌면 우리의 운명이, 그리하여 한국의 운명이, 그리하여 마침내 세계의 운명이 몸을 섞게 되더군. 인생을 바꾸어놓는 모든 일이 그렇듯, 그가 그 방송을 듣게 된 것도 우연이었네. 그는 기자다운 직감으로 광주가 그 전날 내려진 한국의 계엄령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느끼면서 바로 한국으로 떠나네. 그는 정부에 취재를 요청하지 않았네. 당시 외신기자가 한국에서 취재를 하려면 해외공보관(현 해외홍보원)에 취재경로를 밝히고 프레스 카드를 발급받아야 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던 거지. 아마도 오랜 시간 아시아에서 취재를 하면서 이런 일에는 정부에 기대지 않는 것이 진실을 얻는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지 물론 나는 물어보지는 않았네. 그래 그의 카메라가 광주로 들어가더군. 트럭에 젊은이들이 타고 있었네. 한국의 젊은이들, 손질되지 않은 머리가 쭈뼛쭈뼛 길게 어깨 가까이 내려와 있고, 깃이 길쭉한 셔츠를 입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검은, 아마도 박정희의 경제개발 내내 소외되어 있어서, 그 당시까지도 전기가 들어가지 않은 마을이 많았던, 한때는 전봉준이 달려갔을 황톳길을 달려가던 트럭에 그는 올라탔네. 그들은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네…… 힌츠페터 씨는 이 장면을 두고, 그것이 무슨 노래인 줄 모르면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었네. 그 애국가를,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빨갱이는 조국의 적이다,라고 말하려고 마련된 애국조회시간에 들었던 그 애국가를, 이 북독일 라체부르크, 창밖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너울이 있고, 갈대가 있고 요트들이 떠 있는 휴양도시에서 들어야 하는 심정을 내가 자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의 트럭은 광주로 들어서더군.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있었네. 사람들은 트럭을 보자 달려와 먹을 것을 건넸네. 마실 것을 건네고, 주유소는 공짜였네. 이런 일이 아니었더라면 콩나물 한줌을 두고 시장에서 승강이를 벌이고 소주 한 병 값을 두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싸웠을 그들이 무엇이든 서로 아낌없이 나누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클로즈업됐네. 그는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그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힌츠페터 씨도 그것은 모르네. 내가 보기에 그는 낡은 셔츠를 입고 있었네. 힌츠페터 씨의 해설이 내 입을 통해 번역되어야 했네.
나는 지금도 필름 속의 이 남자를 잊을 수 없다. 며칠 후 이 남자는 죽었다. 나는 그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내 통역을 듣고 휠체어에 앉은 힌츠페터 씨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나는 보았네. 나는 그 이상 그의 표정을 읽지는 못했네. 내 팔뚝에는 소름이 돋고 있어서, 나는 힌츠페터 씨와는 다르게 내 운명과 얽힌 광주를 생각하고 있었네. 멀리 화면 뒤로 보이는 대형 아치에는 "80만 힘 모아 활기찬 광주를"이라는 표어가 씌어 있었네. 물론 나는 그것을 통역하지는 않았지.
무등산을 등진 채 달려오던 사람들
총을 들고 공포를 이겨내려던 사람들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고 참혹한 죽음이 가득했던 광주
드디어 공수부대원들이 화면으로 등장했네. 내가 통역할 일은 아니었네만, 그들은 줄을 맞추어 서서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네. 안되면 되게 하라, 특전부대 용사들, 하는 그 노랫소리. 우리들 고등학교 시절, 교련시간에 총검을 들고 줄을 맞추어 부르던 그 노랫소리. 매를 맞고 군홧발로 차이며 발목에 각반을 두르고 총검술을 익히던 우리들의 소년시절이 떠올랐네. 학교에 가니까, 선생님들이 광주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니 유언비어에 속지 말라고 말해주던 1980년,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던 중학교 일학년짜리 나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간식을 먹고 얌전히 책상에 앉아 영어단어를 외웠네. 아이 엠 어 보이, 유 아 어 걸이었던가, 그도 아니면 하이 선희였던가.
공수부대원들이 거리로 달려가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물론 구경하고 있던 군중들, 어린이 여인 들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대검으로 찔러대고 있었네. 한 여자가 갈기갈기 찢어진 옷을 가리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네. 머리가 터져나가 목숨이 위태로운데 여자는 작은 두 손으로 아직 한번도 다른 이의 입술이 닿지 않았을 유방을 가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더군. 그리고 그녀는 트럭에 태워져 어디론가 사라졌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힌츠페터 씨도 나도 카메라도 그것을 알지 못했네. 그녀가 끌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우리는 모르네. 대학 일학년 때던가, 여자들의 주검은 훼손되어 있었다고 했던 증언들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네. 유방이 도려내어져 있었던 그 주검들…… 그때 아마 J가 몹시 울었지? 막연하게 그녀의 눈물을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는 높고 높은 성 안에 있는 공주를 구해내는 그런 왕자가 되기는 이미 글러버린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저 여자를 울게 하지 않는 남자가 되고 싶다, 생각한 거 같네. 부끄러운 말이네만 나는 책 속의 유방이 도려내어진 증언 속의 그 여자보다 J가 더 가엾게 여겨졌었네. 가끔씩 그 말투 속에 남도의 사투리가 남아 있던, J는 그 항쟁기간 내내 아버지에 의해 집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고 말했지.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꿈속에서도 그치지 않았다고 했었지. 이제 그녀도 여인이 되었던가, 그래서 한쪽 날개를 꺾인 채 자네에게 찾아왔던가. 벌써 우리에게 이십년이 흘러버렸나.
화면 속의 공수부대원들은 그렇게 길거리에 서 있는 흰 와이셔츠 입은 사내들과 손가에 물기 마르지 않은 채 무슨 일인가 궁금한 얼굴로 서 있는 중년의 아낙들과 소년들에게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침묵 속의 매질.
자네와 나 함께 참여했고 구속되었던 구로구청을 기억하나? 1987년 대통령선거 부정을 항의하려던 우리를 건물로 몰아넣고 최루탄을 눈앞에서 쏘며 진입했던 그들, 고개를 들면 머리 위에서 바로 터지던 최루탄, 사냥당하는 토끼들처럼 한곳으로 몰린 우리에게 도끼로 문을 부수며 들어와 우리들의 머리를 그렇게 때려대던 그들의 기억이 내게도 몰려왔네. 그날 그들의 각목이 내 머리통에 내리꽂혔을 때 나는 내 머리가 생각보다 꽤 단단하구나 생각했었지. 이렇게 머리가 터져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자네는 지옥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나도 자네도 신자가 아니니 깊이 생각해본 일은 없겠네만, 독일에 오기 전까지, 아니 독일에 와서도 가끔 내게는 반복되는 악몽이 하나 있네. 배경은 검은 동굴 같은 곳, 탄광 같기도 하고 피신해 들어간 깊은 산의 은신처 같기도 한 그곳에 나는 있곤 했네. 나 말고도 여러 사내들…… 그러곤 트럭에서 내린 일군의 사내들이 들이닥치지. 사내들은 어둠 때문에 실루엣으로만 보이네. 그 사내들은 군복을 입고 있고 손에는 일제히 두꺼운 몽둥이가 들려 있네. 그 사내들 우리를 내리치기 시작하네. 그 곤봉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 꼭 내가 아니어도 꿈은 여전히 악몽일세. 그 사내들이 내리치는 몽둥이, 오직 내리치는 소리와 그것을 맞는 자들의 비명소리만 가득한 그런 꿈 말일세…… 이유도 묻지 않고 영문도 모르고 나는 그 광주를 보는 건지, 우리의 젊은 80년대를 보는 건지, 내가 통역을 하는 건지, 머릿속으로 곤봉을 맞고 있는 꿈이 어지럽고 옷이 찢겨진 그 여인의 영상이 나의 오래된 꿈과 우리의 젊은 기억들과 얽히면서 머릿속으로 피가 몰려들어 응고되고 있는 것 같았네.
잠깐 비디오가 꺼졌네. 힌츠페터 씨의 부인이 내게 다가와 묻더군. 괜찮냐고. 정말 괜찮냐고. 흰 포도주를 내밀더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네. 괜찮다고 말하고 천천히 차고 흰 포도주를 마신 후, 나는 실례한다고 말하며 잠시 밖으로 나갔네. 잔인한 오월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구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시 서 있었네. 실은 괜찮지 않았네. 실은 맘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고 싶은 기분, 내가 왜 이런 자리에 서 있나, 하는 기분, 얼마간 우리 스승 트루머 교수가 원망스러운 기분이었네. 그러나 나는 다시 돌아가야 했지. 그때 자리에 서 있던 힌츠페터 씨, 목숨을 걸고, 그리로 잠입했던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 씨를 위해서. 그리고 내 스승, 우리들의 이상은 결코 한 나라의 몰락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인간을 위하지 않는 모든 이론은 그저 거짓일 뿐이라고, 낯선 땅에서 서투른 언어에 주눅이 잔뜩 든 채로 두리번거리는 극동에서 온 어리숙한 젊은 제자에게 학문이라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고 따듯한 것이고 사랑의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가르쳐주었던 나의 스승 트루머 교수를 위해서.
광주는 길가에 살해된 시신이 나뒹구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잔혹함이 처음 며칠 동안 일어났던 것이다. 나는 국제전화로 이 사실을 독일 본사에 알리려고 했지만 외부로 나가는 호텔 전화선은 이미 끊겨 있었다. 이날 밤늦도록 시위대의 함성이 들려왔다.
나는 힌츠페터 씨의 말을 한국의 아나운서가 읽고 있는 것을 통역했네. 통역하면서 나는 생각했네. 누가 대검으로 이들을 찌르라고 명령했나, 누가 전화선을 끊었나, 누가 광주를 영원한 어둠속에 묻어두려고 계획했는가. 이때 누가 그 살육을 알고 누가 몰랐나.
다시 도청, 힌츠페터 씨는 광주를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네. 화면 속에서 한 한국기자가 나와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더군.
저격병을 처음 봤어요. 정조준한 자세로 앉아 있었어요.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드는데 정조준해서 그를 타당, 쏘고, 그러면 사람들이 죽고 그러면 군인들이 끌어내고, 그러면 다음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흔들고, 그러면 쏘고, 그러면 죽고, 그러면 끌어냈지요……
그리고 힌츠페터 씨는 광주를 빠져나갔네. 그는 검문소에 이르러 필름 중 중요한 것을 다섯 개 빼서 허리 속에 감추고 있었다네. 설사 다른 것을 빼앗긴다 해도 이것만은 보호하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우리와 함께 비디오를 보고 있는 힌츠페터 씨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네. 저때 나 참 잘했어, 뭐 이런 표정이 잠시 내게도 미소를 짓게 했네. 그렇게 해서 그날 결혼선물로 위장된 쿠키상자에 담겨져 토오꾜오로 간 필름은 다시 독일로 날아가 전세계에 처음으로 광주를 타전하게 되었다네. 우리가 대학 때 본 필름, 우리가 성만이네 자취방에서 보면서 함께 붙들고 울었던 그 필름, J가 내 건너 건너편에 앉아서 옆에 앉은 여학생의 옷자락을, 뭐 하러 붙드는지도 모르고 붙들고 뚝뚝 눈물을 흘리던 그 필름, 결국 1987년, 이한열이를 죽이고 우리들로 하여금 시청 앞으로 뛰쳐나가 전두환에게 항복선언을 받아내게 했던 그 필름이 그렇게 태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걸 나도 그때 처음 알았지.
그리고 그 당시 신문들이 보였네. 바로 그날 신문의 일면은 백로가 차지하고 있었네. 백로 말일세. 그 크고 아름다운 새. 통역은 하지 않았네만, 월성에 새 백로 서식지…… 라는 헤드라인이 보였네. 백로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겠지. 광주의 소식은 단 한 줄도 없었네. 기사를 썼지만 간부들에 의해 인쇄할 판을 도난당한 광주의 기자들은 일괄 사표를 냈다고 하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부끄러워 우리는 붓을 놓는다.
그렇게 젊은 기자들이 제 팔을 자르듯 사직서를 쓰는 동안 우리가 알다시피 전세계의 주요 신문 방송 들은 광주를 보도하고 있었네.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 어쩌면 아프리카.
여기 와서 처음 어떤 선배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네. 그 선배는 마침 광주가 공포로 변하던 그 무렵, 한국에 잠시 다녀왔다고 했네. 다시 독일로 돌아오니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네. 그 선배는 성정이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 독일에 남아 있던 동료들은 모두 한국에서 그가 저 광경을 보고 참고 있었을 리가 없다, 이 수상한 시절에 그는 분명 투옥되었을 것이다, 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참이라고 했네. 그런데 그때 한국에서 돌아온 그가 말했다고 했네. 왜들 그래요. 나 서울 갔다가 식구들하고 야유회하고 왔는데.
다시 힌츠페터 씨는 광주로 돌아갔네. 광주는 이미 시민군의 항거에 군대가 쫓겨간 상황이더군. 수많은 사람들이 도청 앞에 모여 있었네.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익숙한 박관현의 얼굴이 보이더군. 그때 전남대 학생회장이었고, 소위 광주사태 사건으로 바로 투옥된 후 1982년 교도소에서 끝내 죽어간 그. 아직은 희망을 믿고, 아직은 싸워야 한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아직은 살아 있는 그의 얼굴 말일세.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올 때 나는 가방 속에 신문을 몇장 숨겨왔다. 광주시민들이 자신의 일이 보도된 신문을 보고 싶어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힌츠페터 씨의 말이 다시 통역되었네.
나는 베트남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부상당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많은 시신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체육관 안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놓여 있었네. 우리의 태극기에 덮인 관들은 내 눈에는 오히려 기이하게 평화로워 보였네. 그 배경으로 늙은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네. 내 새끼! 내 새끼, 내 새끼이이이!
그 말을 통역할 수 있겠는가, 내 새끼,라고 낮고 쉰 목소리로 부르는 어머니의, 눈물도 아니고 부름도 아닌 그 이상한 소리를.
다음으로 힌츠페터 씨의 인터뷰가 들려왔네. 독일말로 바로 방송되었으므로 통역이 필요없었네.
나는 삼십 미터나 되는 그 거리를 단숨에 촬영했다. 한 여자와 그녀의 남편이 체육관이 떠나가도록 통곡할 때까지 말이다. 아직도 그 소리가 내 귀에 쟁쟁하다. 그 소리가 들린다. 그 장면이 나를 슬프게 했고 오늘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비통한 심정이 된다. 그때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곳을 떠났고 거기에 있는 성직자 한 컷만을 촬영했을 뿐이다.
그가 무슨 독일말을 하는지 귀에 들리지 않았네. 힌츠페터 씨보다 먼저 그의 부인이 눈물을 닦았네. 내 귀에는 무슨 소리가 들려왔던가. 최루탄 소리, 온몸에 불을 붙이고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내렸던 우리 친구 성만이의 외침소리. 광주학살 규명하라! 광주책임자 처벌하라! 친구여, 자네도 가끔 듣는가, 힌츠페터 씨처럼 아직도 듣고 있나, 그 소리를?
그런데 화면은 한 신부님을 비추고 있더군. 중년이 넘어선 듯 보이는 그는 그 사람들을 외면한 채 울지도 않고 있었네. 1980년 그 당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어쩌면 신을 외면하고 있는 듯했네. 무력하고, 불쌍하고, 혀 빠지고, 화상당해, 늙어버린 가여운 신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늙은 성직자. 그리고 내레이션이 계속되었네. 나는 통역했네.
그때 계엄사에서 제공한 헬기로 언론사 사회부장들이 광주에 도착했다. 그들은 기자들의 보고를 통해 광주의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당시 그 헬기를 타고 광주에 도착했던,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던 신문사 사회부 부장들이 다시 서울에 있는 자신들의 회사로 돌아간 후의 신문과 방송이 비추어졌네. 사망자는 단 두 명뿐이라는 기사가 나오더군. 『조선일보』의 사설이 비추어졌네. 건국 이래 최대의 참변을 일으킨 폭도들을 진압하고 광주시민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계엄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이 보였네. 나는 차마 통역할 수 없었네. 생각나나, 언론이 입을 다물자 자네와 나의 학우들이 온몸에 불을 붙여 깃발을 만들었지. 언론들은 모든 걸 알고, 권력을 가진 이들도 모든 걸 알고, 미국도 알고 독일도 알고, 일본도 알고 아프리카도 아는 걸 우리들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독일도 알고 일본도 알고 미국도 알고 전세계가 다 아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선량한 시민들"뿐이었네. 선량한 시민들이 신뢰하고 있던 언론은 살인자의 편이었으니까.
그때 다른 한 신부님이 화면에 보였네. 당시 독일에 체류하던 신부님이셨네. 그는 독일에서 힌츠페터 씨가 타전한 그 뉴스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한국에 소식들을 알렸다고 했네. 다른 젊은 신부님들이 투옥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필름들을 독일에서 한국으로 날랐고 그렇게 우리가 보았던 그 비디오가 완성된 것일세. 독일 기자는 한국에서, 한국 신부는 독일에서 그렇게, 어둠속에서 빛 속으로 진실을 가져다놓았네. 그리하여 두레박 밑에 덮어둔 등불은 지붕으로 올라가고 어둔 밤 구석에서 소곤거리던 말들은 지붕 위의 외침으로 퍼져나갔네.
그뒤 힌츠페터 씨는 한국에 드나들며 수많은 시위를 취재했네. 아마도 우리가 광화문 어딘가에서 화염병을 들고 뛰다가 그와 어깨를 부딪쳤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나는 그때 처음 했네. 그는 다큐멘터리가 끝나자 빙그레 웃었어. 수고했다는 표시 같았네. 그렇게 살인정부의 눈 밖에 난 그는 1986년 드디어 광화문에서 카메라를 들고 찍다가 골목으로 끌려가 무자비하게 폭력을 당하네. 그때 부러진 목과 척추가 오늘 바로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트루머 교수가 덧붙이더군. 힌츠페터 씨는 나를 보고 다시 웃었어. 미안해하지 말라는 말처럼. 나도 웃어주었지. 고맙다는 말처럼. 하지만 친구, 나는 부끄러웠네.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게 내 죄인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막을 수가 없어서 나는 잠시 집밖으로 나와버렸네. 호수에는 여전히 요트가 떠가고 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날아갔네. 담배를 물고 하늘을 보니까 아주 푸르더군. 그해 오월처럼.
그날 저녁 나는 베를린으로 돌아왔네. 긴긴 여름해가 지지 않고 떠 있더군. 가슴속이 뒤죽박죽된 그런 기분이었네. 오래된 상처들을 헤집고 그 속에 든 고름이랑 구더기랑 썩은 피들을 막상 내 눈으로 보고야 만 그 느낌이라고나 할까. 바퀴 달린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조용히 미소짓던 힌츠페터 씨의 마지막 웃음이 떠올랐네. 그는 분명 나를 향해 미소지으며 우리는 형제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나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처럼 쓰라리고 서러웠네. 나는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뒤져 오래 전 유학 오기 전 친구들이 준 테이프를 찾아냈네. 테이프는 오랜 시간이 흐른 듯, 갈라지고 늘어진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나는 볼륨을 가장 크게 틀고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노래했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힌츠페터 씨는 왜 광주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을까, 그는 거기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많은 죽음과 살육을 목격했는데, 통곡과 신음과 비명을 들었는데…… 그는 거기서 가엾은 신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무력한 사제와 무식한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그는 그 일 때문에 척추에 중상을 입고 거기에 플라스틱을 박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 채로 어쩌면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르게 되었는데…… 아마 가장 많은 주검이 나동그라진 곳에서 그는 어쩌면 가장 뜨거운 생명, 뜨거워서 영원한 생명을 보았기 때문인가. 그의 마지막 말, 내가 이를 악물고 통역해야만 했던 말들이 떠올랐네.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노래는 계속되었네. 너무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끊어지다 이어지고 끊어지다 이어지고 있었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내 목청은 핏대를 올리고 있었고 내 팔뚝에는 다시 신선한 소름들이 돋아났네. 결국 지난 이십년은 나 자신과 싸우던 나날들이었네. 자네는 어떠한가. 나는 타협하고 싶었네. 나는 이제 고만 성공하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네. 귀를 막아 그 모든 소리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네. 돈을 벌어 예쁜 아내를 얻고 포도주를 부어 우리의 젊음, 때리고 던지고 찢기고 투옥되던 잿빛 젊은날을 금빛으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네. 그러나 그 힌츠페터 씨의 어리석음이 나를 깨우고 있었네. 그의 불구가 내 멀쩡한 팔을 당기고 나를 엎어지게 만들고 휘감아 돌려 땅에다 메어꽂았네. 그때 아내로부터 휴대전화가 왔네. 베를린 쿠담 가 카데베 백화점 앞에서 친구를 만나고 있으니 지나가는 길에 자신을 좀 픽업하라고 말일세. 나는 테이프를 껐네. 그리고 이제 어린 아내를 너무 원망하지 말자고 결심했네. 잿빛 나날을 금빛으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포도주. 그래, 이천년 전에 유대 나라에 살았던 예수라는 젊고 어리석은 인간은 제 피로 붉은 포도주를 만들어 잿빛 세상을 금빛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겠나.
나는 약속대로 베를린 쿠담 가 카데베 백화점 앞에 도착했네. 거기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 중에 내 어린 아내를 찾고 있었지. 그런데 문득 그곳 U반 비텐베르크 플라츠 역 앞에 서 있는 검은 간판이 눈에 보였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지. 우리를 전율케 하는 다음의 장소들. 아우슈비츠, 다하우, 비르케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 나는 이곳에 많이 왔었고 이곳에 여러 번 서 있었네. 예전에 베를린에 처음 도착해서 저 간판을 선배가 가르쳐준 적도 있었네. 이곳은 베를린의 중심가, 우리가 농담으로 독일 최고의 음식이라고 부르는 커리 가루를 친 소시지를 파는 노점이 있는 곳이었네. 그런데 내게 오늘 그 글자는 처음으로 와서 박혔네. 내 꿈속의 검은 탄광 혹은 굴 속처럼 검은, 그런 바탕에 씌어 있는 저 글자. 글자는 참혹한 지명을 표기하고 있네만 저것을 새기게 한 그 마음, 그 회한, 그 부끄러움, 그 각성의 각오들이 내게 다가왔다네. 친구여, 만일 우리의 옛 동지가 서울이나 광주의 시장이 되면, 아닐세, 그건 반드시 서울이어야 하네, 그러면 우리는 광장 한복판 사람들이 오가는 역 앞에 그런 간판을 세울 수 있을까. 우리를 전율케 하는 다음의 장소들. 광주, 거창, 함평, 제주
베를린엔 오늘도 하늘에 두꺼운 뚜껑이 덮이고 비가 내리네. 방금 이 편지를 쓰는 동안 트루머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네. 그날 내게 너무 힘든 일을 시킨 것은 아닌가 하고 묻더군. 그러고는 한국에서 힌츠페터 씨의 투병소식이 알려진 후 많은 젊은이들이 광주 오월 묘역에 그를 안장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고, 아니 꼭 광주에 모셔야 한다고 인터넷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고. 수많은 격려와 위로의 메일을 받았다고 했네. 그러고는 놀랍게도 그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했네. 나는 고립된 무인도처럼 외로운 광주시민들에게 신문을 가져다주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네. 그것을 받아들고 우리는 외롭지 않다고 기뻐하던 광주시민들의 얼굴도 떠올렸네. 진정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것은 아마도 외롭지 않다는 사실, 외롭다고 느낀다면, 고립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죽음을 이마에 대고 있는 것…… 그때 힌츠페터 씨에게 신문을 받아든 사람들, 아마 그들 중 더러는 죽고 더러는 이 땅을 떠나갔겠지만 그렇게 그는 다시 그 답장을 그들로부터 받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 힌츠페터 씨는 독일에서 암흑의 광주로 갔었으니,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텐가? 아프가니스탄 혹은 이라크…… 지난번 아우슈비츠에 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네만 선한 것들, 진실들, 정의들은 이상하게 아주 작아. 아우슈비츠는 크고, 그것을 묘사한다는 것은 “대서양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는 것처럼, 지구를 포옹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네. 폭력은 수용소처럼 거대하고 때로는 범국가적이지만, 사람을 살게 하는 것들은 웃음들, 편지들, 따뜻한 말들, 혹은 한 통의 필름들, 하나의 작은 마음들, 진실을 향한 결단들 혹은 당신은 잊혀지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따스한 음성들…… 선한 일은 맨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네. 내가 너무 센티해졌나보네. 오랫동안 잊었던 단어들을 쓰고 있노라니, 다시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네. 젠장, 이 소름은, 이 소름이 돋던 처음의 기억은 이미 우리 세대의 유전자에 새겨져버린 것인지…… 그래, 새겨져버렸나보네. 다음에 한국에 나가면 우리 작은 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하세. 어쩌면 잊혀진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까, J에게 짧은 편지 한 통 띄우려 하네. 그냥 잘 있느냐고 물어보려고 하네. 나도 잘 있다고, 너를 잊지 않고 있다고, 우리들의 깃발과 함성과 노래처럼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다음 챕터로 넘어갈 뿐이라고.
사랑하는 친구 소식 바라네.
한국의 햇살을 그리워하며, 어느 오월에 베를린의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