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3대 성 중 하나인 구마모토성 (熊本城,구마모토죠)
1607년에 개축된 성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가토 이요마사가 7년에 걸쳐 완성한 일본에서 손꼽히는 성이다.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자우스야마의 언덕에 있으며,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축벽과 지상 50m 높이의 덴슈카쿠(천수각,天守閣)가 인상적이다. 덴슈카쿠는 구마모토조의 핵심으로 1960년에 복원된 것이다. 현재는 성이나 영주와 관련된 자료나 물건을 전시 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시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구마모토역에서 버스로 10분거리에 있으며 낮은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성은 구마모토시의 설립자이며 영주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蘚淸正)에 의해 7년만에 축성되었다. 성의 대부분은 소실되었으마 내성은 거의다 복원되었다. 현재의 구마모토의 상징으로 여기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두 일본의 명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과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이 임진왜란 말에 무슨 일로 싸웠으며
그 싸우게 된 원인과 싸우고 난 후의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한명 죽을때까지-_-)
제가 아는 바로는 소서행장은 화의파였고 가등청정은 주전파였는데
가등청정이 마음대로 조선에 침략하려 하였기 때문이라는데
그 전에 그 문제의 발단과 그 후의 이야기를 자세히 그리고 빨리
알고싶습니다. 여러분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두 일본의 명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과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이 임진왜란 말에 무슨 일로 싸웠으며
그 싸우게 된 원인과 싸우고 난 후의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한명 죽을때까지-_-)
제가 아는 바로는 소서행장은 화의파였고 가등청정은 주전파였는데
가등청정이 마음대로 조선에 침략하려 하였기 때문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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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행장과 가등청정
kyokushin 답변채택률 76.2%
2003.06.04 22:09
가토 기요마사는 풍신수길이 가장 총애했던 전형적인 무장으로, 상인출신인 무장인 고니시를 경멸하는 면이 있었다고 하며 - 그 시대에 인접영지를 가진 영주들간이 거의 그렇듯이 -고니시와는 대립관계였다고 합니다.
고니시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큰 수익을 얻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있어서 임진왜란은 조선과의 교역에 막대한 손해를 입을수 밖에 없어 풍신수길에게 전쟁을 방지하려는 전쟁반대파였습니다.
고니시는 소 요시모토와 함께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서 일본에 보고하는 말과 조선에 전하는 말을 달리하는 이중적인 외교를 하다가 결국 풍신수길의 분노를 사게되고, 결국 조선출병이 현실화되자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고자 조선 출병의 선봉을 맡게 됩니다.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전공을 다투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가 한강을 건너는데 이용될 나룻배를 모두 떠내 자신이 먼저 한양에 입성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고니시는 명나라와의 강화조약을 맺는데 있어서도 명나라 사신과 짜고 문서를 위조하는 등 무장으로서 우직함을 보이는 무장은 아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하, 고니시와 가토에 대한 글을 copy, 인용합니다. http://eunminim.nahome.org/imjin_japanese.htm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
고니시 유기나가(1558~1600)는 오오사가 옆에 있는 무역도시 사가이 출신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약품무역을 하는 거상의 아들이었는데, 당시 조선산 인삼과 약품을 포함한 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대마도 도주 요시도시가 그의 사위였다.
풍신수길의 부하가 되어 일본 통일전쟁 때 군수물자의 보급업무를 잘 수행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고, 우도에 있는 우도성의 성주가 되었다.
풍신수길이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사위 소오 요시도시와 풍신수길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협력하여 전쟁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가 되고, 결국 전쟁은 터지고 말았다.
일설에는 사위와 같이 조선을 여러번 다녀와서 조선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풍신수길을 사주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여러번 그러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없는 것 같다.
임진왜란때는 제 1군의 장수로 18,700명의 지휘관이 되어 참전하였다. 이때 풍신수길은 휘하 영주들을 견제시키기 위하여 유기나가에게 가토 기요마사와 공동 선봉장이 되어 추첨을 하여 1일 교대로 전투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92년 4월 14일 첨사 정발이 사수한 부산진성과 첨사 윤흥신의 결사 수비한 다대포진성을 함락시켰다. 다음날인 4월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결사 항전한 동래성을 공격하기 전에 싸우지 않고 이기고자라는 나무판자를 성 앞에 세우니, 송상현이 "싸워서 죽기는 쉽다.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 라고 쓴 나무판자 대답을 해서 공방전이 시작되어 함락시켰다.
계속 북상하여 충주에서 공동 선봉장인 가토는 좌로, 고니시는 우로 각각 다른 다른 길로 진격하여 한성 입성의 다툼을 하였다.
고니시는 조선의 지리를 잘 아는 포로를 시켜서 가토 부대가 서울에 입성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한성에 있는 나룻배를 전부 떠내려 보내 가토 부대의 도하작전을 지연시키고, 1592년 6월 5일 동대문을 지나 제1차로 서울에 입성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고니시 부대의 입성 전에 조선 민중들의 양반, 왕족들에 대한 반감으로 여러 곳에 방화하여 이미 서울은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다.
북상하여 6월 14일에 대동강을 도하,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1592년 7월 18일 조승훈이 지휘하는 명군과 싸워 격퇴하였다.
겨울이 되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온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와, 서산대사가 지휘하는 승군을 포함한 조선 의병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고니시는 봉산에 있는 오오도모 요시노리, 백천에 있는 구로다 나가마사, 우봉에 있는 고바야가와 히데가네, 개성에 있는 고바야가와 다가가게, 한성에 있는 우기다 히데이에에게 구원을 청했다. 오오도모 부대가 평양에 척후병을 보냈다. 그러나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명군만 보이고 고니시 부대는 전멸한 것 같았다. 그래서 며칠 있으면 자기들도 위험하겠다고 생각하여 무조건 후퇴해 버렸다. 한성에 있는 우기다 부대는 평양까지 가려면 5일이 걸리고, 도중에 또 큰 강도 있고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며 시일만 보내고 있었다. 평양에 부상자, 병자를 놓아두고 고니시가 후퇴하여 황해도 봉산에 도착하자, 오오도모 요시노리의 부대는 한명도 없었다. 이 보고를 받은 풍신수길은 오오도모의 영지를 몰수하는 가혹한 벌을 내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토 기요마사는 평양의 고니시를 돕지 않은 것은 오오도모나 우기다나 마찬가지라고 말하였다 한다.
고니시 부대는 겨우 서울에 후퇴했으나 병력의 2/3가 희생되고 고니시의 건강도 아주 악화되어 있었다. 평양에서 패전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고니시는 마침 전라도에서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여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는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약 3천명의 조선군을 공격할 약 4만명의 일본군 선봉장이 되었는데. 조선군이 결사 항전을 하므로 2차에 걸친 공격도 실패하고 말았다. 각지에서 패전하고, 극도의 식량난으로 아사자가 속출하여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이 일본군의 이때의 패전의 주원인이었다.
조선이 제외된 채 진행된 명, 일간의 강화회담의 일본측 대표를 고니시가 맡았는데 풍신수길은 전투의 패배를 외교로써 만회하려고 승전국 같이 행세하여 명나라가 들어줄리 없는 7개조의 국서를 명나라 사신에게 들려보냈다.
고니시는 명나라 사신과 밀약하여 오만불손한 일본의 국서를 명나라 황제에게 아부하는 내용으로 변조하여 강화 성립에 노력하였으나, 강화는 결렬되고 오히려 국서 변조 사건만 탄로나 풍신수길이 노발대발하여 고니시의 목을 치겠다고 하였다.
고니시가 "나혼자서 한 것이 아니오" 하며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보이니, 풍신수길의 측근 중신들도 국서 변조에 찬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그들까지 처벌할 수도 없어 풍신수길은 화를 삭이며 자리를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니시는 1600년 일본이 양분되어 패권을 다툰 세기가하라노 다다가이에서 패하여 참수당하고 멸문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당시 탄압 받는 천주교의 보호에 힘썼으므로 사후 천주교에서는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1562~1611)는 풍신수길과 같은 아이지겐 나가무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풍신수길의 어머니의 4촌 여동생의 아들인데, 3살 때 아버지가 죽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풍신수길의 부하가 되어 전공을 많이 세워 구마모도의 구마모도죠오 성주가 되었다.
인접해있는 우도성의 성주 고니시 유기나가와는 이해관계가 얽혀 사이기 나빴다. 풍신수길이 죽고서 세기가하라의 싸움에서 도구가와측에 가담하여 승리하였고, 고니시의 영토인 우도를 빼앗아 구마모도의 영주가 되어 지금의 구마모도죠오를 축성하였다.
현재 일본에서는 신격화되어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는데, 도구도미 소호오는 "가토 기요마사는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정도의 신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