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남명승첩.hwp
嶠南名勝帖
전영우, ‘겸재화 교남명승첩의 경주골굴석굴도’(<고고미술> 제5권 제2호)에 의하면, 본 겸재화 <교남명승첩>은 선고가 1931년 10월 19일 당시 永樂町에 있었던 荒木朴堂이라는 고미술상에서 오봉채 씨를 통해서 입수한 두 권으로 된 화첩으로서 합천 해인사를 비롯한 안동의 청량산, 동래의 해운대 등의 영남 각처의 명승 절경을 그린 것으로 표제의 ‘교남’도 ‘영남’을 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권은 30면 그 2권은 28면, 도합 58면. 비교적 큰 화첩으로 후미에 제발 1면을 가하고 있다. 크기 38×26cm의 지본에 담채한 것으로서 겸재 57세 때의 작품이다.(?)
* 현재까지 전체가 공개된 적은 없음. 따라서 학술적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임
[별첨]
畵題
1. 聞慶 仙游洞
2. 仁同 東洛書院
3. 仁同 天生山城
4. 仁同 砥柱碑
5. 漆谷 架巖山城
6. 順興 白雲洞書院
7. 順興 浮石寺
8. 禮安 陶山書院
9. 安東 落淵
10. 安東 河回書院
11. 安東 淸涼山
12. 安東 暎湖樓
13. 比安 望北亭
14. 大丘 達城
15. 大丘 霞鶩(목)堂
16. 靑道 玉井巖
17. 密陽 嶺南樓
18. 東萊 沒雲臺
19. 東萊 太宗臺
20. 東萊 海雲臺
21. 釜山 永嘉臺
22. 密陽 盤龜臺
23. 慶州 玉山書院
24. 慶州 鳳凰臺
25. 慶州 骨窟石窟
26. 永川 朝陽閣
27. 彌勒庵 動石
28. 淸河 內延山瀑布
29. 寧海 觀魚臺
30. 盈德 淸心樓
31. 尙州 觀水樓
32. 尙州 龍游洞
33. 善山 梅鶴亭
34. 南海 錦山九井峰
35. 固城 床巖
36. 統營 閑山島制勝堂
37. 統營 洗兵館
38. 善山 金烏山城
39. 善山 鸕鶿(노자)亭
40. 善山 月波亭
41. 星州 檜淵書院
42. 高靈 開湖亭
43. 陜川 涵碧樓
44. 陜川 紅流洞
45. 陜川 海印寺
46. 陜川 落花潭
47. 陜川 黃溪瀑布
48. 陜川 換鵝亭
49. 安陰 花林洞
50. 安陰 愁送帶
51. 丹城 赤壁
52. 安陰 長水寺龍湫
53. 晋州 矗石樓
54. 河東 智異山天王峰
55. 河東 佛巖瀑布
56. 河東 新興寺
57. 宜寧 鼎巖
58. 宜寧 十翫亭
* 교남명승첩은 작품에 제발과 낙관이 없어서 제작 시기와 작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1) 초기에는 吳世昌이 쓴 <謙齋畵嶠南名勝帖>이라는 畵題 때문에 鄭敾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현재는 양식 상 그의 손자 정황의 작품이라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2)
정선과 정황, 그리고 <교남명승첩>이 서로 같은 장소를 그린 것이 있는데, 이들의 비교를 통해 작가를 추정해 보기로 하자. 정선의 ‘달성원조도’3)와 정황의 ‘대구달성도’, <교남명승첩>의 ‘대구 달성’은 모두 같은 대구 달성을 그림 것이다. 구도상으로 보면 전체적으로 근경에 언덕을 배치하고 중경에 대구 읍내의 모습을 조망하고, 원경에 원산을 배치한 점이 유사하다. 그러나 정선의 것이 원근감이 자연스럽고 경물이 공간 속에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면, 정황의 것은 대구 읍내 부분을 다른 경치와 구분하였고, <교남명승첩>의 ‘대구 달성’은 정황의 것과 유사하지만, 삼원경을 더욱 뚜렷이 구분하였다는 점에서 도식화 경향이 강하다. 소나무의 표현이나 산의 미점 표현에 있어서도 <교남명승첩> ‘대구 달성’의 필체는 정선의 것보다 정황의 것에 더욱 가깝다. 이처럼 같은 대구 달성을 그린 것으로 <교남명승첩>의 ‘대구 달성’을 정선, 정황의 작품과 비교해 본 결과 <교남명승첩>이 정선의 필치와 구도보다는 정황의 것에 더욱 가까움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嶠南名勝帖>을 鄭榥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보다 圖式化된 鄭敾派 畵風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교남명승첩>은 전체가 58엽으로 지명과 함께 명소를 적어 表記하였다.4) 이들은 34개 지역 58개의 명소로서 경상남북도를 거의 통괄하고 있다. 58개의 명소는 지리산이나 소백산, 청량산 등을 중심으로 뭉쳐 있어, 부분적으로는 조선 중기부터 유람되어온 코스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藏帖되어 있는 순서를 보면, 動線을 전혀 연결시킬 수 없을 정도로 인접지역이 서로 떨어져 있어 실제적인 동선의 추적은 불가능하다.5)
<교남명승첩>의 각 엽은 지명과 명소가 함께 명시되어 있는데, 이를 보아 명승의 파악이 각 縣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명승지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 바다나 계곡을 조망할 수 있는 臺나 樓․亭이 주를 이루고, 서원과 불사, 그 밖의 역사유적이 포함되어 있다.
1) <嶠南名勝帖> 중 ‘骨窟石窟圖’에는 1753년에 李顯坤(1713~1757, 碧梧堂)에게 써준 鄭敾의 題畵詩가 붙어 있다. 그러나 이는 본 첩과는 상관없이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2) 최완수는 처음에는 이 화첩을 鄭敾의 것이라고 하였다가, 후에 곧 양식상 정선의 작품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번복하였다. 한편 이태호와 유홍준은 <교남명승첩>을 정선이 아닌 鄭榥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3) 정선의 ‘達城遠眺圖’는 李秉淵과 趙榮祏의 별지가 붙어 있어 ‘雙島亭圖’와 함께 <嶺南帖>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유홍준)
4) 상, 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별첨]과 같다.
5) 최완수에 의하면 현재 장첩된 순서는 근대기에 간송미술관에 전해진 이후로 바꾸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처음 제작 이후 어느 시점에선가 서로 뒤섞였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본래 화첩 순서가 일정한 여정에 다른 것이라면 이 화첩이 여행을 토대로 그려진 紀行寫景圖일 가능성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단정할 수 없다.
* 윤상호1은 정선의 화풍을 따르는 영남지역의 지방화가로 추정하고 있음.
脫皮 중인 리톱스 種의 '알비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