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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경姜武景 (1896~1983)】 " 鉉秀風雲造化 飛上空 "
다음은 강무경 의병장이 사형당하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꿈에서조차 그리던 나라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철천지 원수의 총칼에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오호 애재라! 내 혼백과 육신의 혈흔이라도 이승의 청강석이 되어 못 다한 천추의 한을 풀리라”
1878년 전라북도 무주군(茂州郡) 풍면(豊面) 설천(雪川)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강무경(姜武京)·강현수(姜鉉秀)이다. 필묵상(筆墨商)으로 활동하였다. 부인은 전라남도 영암(靈巖)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함께한 양방매(梁芳梅)이다. 장인은 영암 금정면의 선비인 양덕관(梁德寬)이며, 처남은 의병 활동을 함께한 양성일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나라의 주권을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을 때 심남일(沈南一) 의병장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받았다. 이에 호응하여 심남일 의병장과 형제를 결의하였다. 1907년 10월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김율 의병부대에 심남일과 함께 참여하였다. 김율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장성(長城)·영광(靈光)·함평(咸平)·남원(南原)·보성(寶城)·장흥(長興)·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高敞) 등지에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통해 적지 않은 전과를 거두었다.
호남창의동맹비(전남 장성) [판형3] |
1907년 10월 29일 고창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무기를 획득하였으며, 이어서 법성포의 사창(社倉)을 공격하여 군량미를 보충하였다. 김율 부대에서의 활동은 다음해에도 이어져 1908년 1월 3일 100여 명의 의병부대원과 함께 함평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무기와 금품을 획득하였다. 또 1월 22일에는 기삼연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재차 함평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순사 하타노(波多野)를 사살하였다. 이어 창평(昌平, 지금의 전남 담양)에서 일본군 대대장 요시다 카쓰사부로(吉田勝三郞)가 이끄는 일본군 기병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2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전사한 이후 김태원 의병장과 김율 의병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며, 광주 일원에서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김율 의병장이 1908년 3월 광산(光山) 송정읍(松汀邑)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된 후 곧바로 심남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병부대를 재정비하고 선봉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심남일 의진의 선봉장이 되어 70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활약하여 호남을 대표하는 의병부대가 되었다.
1908년 3월 선봉장으로서 강진면 오치동(吾治洞)에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아침 6시부터 저녁 19시경까지 치열한 교전을 전개한 끝에 수십 명을 사상케 하고 다수의 무기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4월 15일에는 장흥으로부터 쳐들어온 일본군 수비대를 맞아 장흥 곽암(藿岩)에서 치열한 교전을 치렀다. 6월 19일에는 남평(南平) 장담원(長淡院)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을 사상하고, 남평 철천(鐵川)으로 이동하였다. 6월 25일에는 능주 노구두(老狗頭)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일본군을 사상시키고 군마를 비롯하여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7월 30일에는 영암(靈巖) 사촌(沙村)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으며, 8월 1일에는 나주로 이동하여 반치(盤峙)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기마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치열한 교전을 전개한 후 격퇴하였다. 9월 20일에는 장흥 신풍(新豊)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0월 9일에는 해남(海南) 성내(城內)에서 일본군 헌병분대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전개한 후 대둔사(大芚寺)로 퇴진하였다. 10월 27일에는 능주(綾州)로 이동하여 돌정[石亭]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이처럼 3월부터 10월까지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 등과 수십 차례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능주 돌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병석에 눕게 되어 의병 활동을 하지 못하고 은신하였다.
1909년 3월 몸을 회복하고 다시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1909년 3월 8일 박봉주(朴奉柱)·박채홍(朴彩洪) 등과 나주 월교리(月橋里)에 주둔하였다가 그날 밤 남평(지금의 나주시 남평읍) 운삼동(雲三洞)을 거쳐 선동(船洞)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정찰을 나간 탐마대(探馬隊)로부터 일본군 수비대가 공격해 들어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에 주요 매복 지점에 미리 부하를 배치하고 일본군 수비대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공격을 가해 일본군 5명을 사살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영산포(榮山浦)로 후퇴하였다. 이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영산포의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인근에 주둔하던 각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연합작전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격문을 받고 전수용(全垂鏞)·이대극(李大克)·오인수(吳仁洙)·안규홍(安圭洪)·김여회(金如會)·유춘신(柳春信) 등이 연합작전에 호응을 하였다. 특히, 안규홍 의병부대와는 끝까지 유기적 관계를 맺었다. 한편,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이동하였다는 정찰 보고를 받고 공격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본진은 장암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부대원을 5개 부대로 나눠 동쪽의 대치(大峙)를 비롯하여 대항봉(大巷峯), 월임치(月任峙), 덕룡산(德龍山) 꼭대기, 병암치(屛岩峙)에 각각 매복시켜 놓은 후 유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다음 날 새벽 유인 작전에 걸려든 일본군 수비대는 능주·광주·나주·남평·영암 방면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미리 준비한 작전대로 대응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이 거성동(巨聲洞) 전투에서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총독 박기춘(朴基春), 좌익장 박여홍(朴汝洪), 우익장 박태환(朴泰煥)이 전사하는 피해도 입었다.
4월 2일에는 장흥 우산(牛山)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그곳은 능주 일본군 헌병대가 매달 5차례씩 통과하는 곳이었다. 이날도 일본군 헌병대가 통과한다는 정보에 따라 2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매복 공격하도록 계획하였다. 일본군 헌병대가 나타나자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 여럿을 사상케 하고 대포를 비롯한 다수의 무기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생포된 호남의병장들(1열 5번째 강무경, 1909) [판형2] |
5월 12일에는 보성 천동(泉洞)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 주둔하고 있을 때 안규홍 의병장과 석호산(石虎山, 보성군 미력면)에서 만나 연합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중군장 안찬재(安贊在)와 통장 김도숙에게 군량미를 운반해오도록 하고, 후군장 김성재(金聖載)와 호군장 강달주(姜達周)에게 군사들의 훈련을 지시하였다. 이때 보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기습 공격해 들어왔다. 50여 명의 대규모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한 결과 일본군을 사상시키는 전과를 올리고 격퇴하였다. 천동 전투 이후 안규홍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비롯한 향후 전략에 대해 기획할 때 이세창(李世昌)이 일본군의 규모가 크니 전라남북도의 의병을 합치는 연합 의병을 건의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각지의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연합 의병을 구축하던 중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의 조칙이 내려졌다. 황제의 조칙이 일제의 협박으로 내려진 조칙인 줄 알았지만 받아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자진 해산하였다.
의병을 해산한 후 심남일 의병장과 함께 신병 치료차 이전의 격전지였던 능주 풍치(風峙) 산중에 있는 바위굴(장흥군 월정장(月亭場) 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은신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1909년 10월 9일 오전 6시 40분경에 장흥과 능주의 경계인 봉산사(鳳山寺) 일대를 정찰 수색하던 제2연대 2중대장 사타케(佐竹)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심남일, 부인 양방매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0월 15일 광주로 이송되었다가 12월 15일에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10년 10월 4일 대구감옥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78년 전라북도 무주군(茂州郡) 풍면(豊面) 설천(雪川)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강무경(姜武京)·강현수(姜鉉秀)이다. 필묵상(筆墨商)으로 활동하였다. 부인은 전라남도 영암(靈巖)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함께한 양방매(梁芳梅)이다. 장인은 영암 금정면의 선비인 양덕관(梁德寬)이며, 처남은 의병 활동을 함께한 양성일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나라의 주권을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을 때 심남일(沈南一) 의병장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받았다. 이에 호응하여 심남일 의병장과 형제를 결의하였다. 1907년 10월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김율 의병부대에 심남일과 함께 참여하였다. 김율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장성(長城)·영광(靈光)·함평(咸平)·남원(南原)·보성(寶城)·장흥(長興)·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高敞) 등지에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통해 적지 않은 전과를 거두었다.
호남창의동맹비(전남 장성) [판형3] |
1907년 10월 29일 고창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무기를 획득하였으며, 이어서 법성포의 사창(社倉)을 공격하여 군량미를 보충하였다. 김율 부대에서의 활동은 다음해에도 이어져 1908년 1월 3일 100여 명의 의병부대원과 함께 함평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무기와 금품을 획득하였다. 또 1월 22일에는 기삼연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재차 함평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순사 하타노(波多野)를 사살하였다. 이어 창평(昌平, 지금의 전남 담양)에서 일본군 대대장 요시다 카쓰사부로(吉田勝三郞)가 이끄는 일본군 기병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2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전사한 이후 김태원 의병장과 김율 의병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며, 광주 일원에서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김율 의병장이 1908년 3월 광산(光山) 송정읍(松汀邑)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된 후 곧바로 심남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병부대를 재정비하고 선봉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심남일 의진의 선봉장이 되어 70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활약하여 호남을 대표하는 의병부대가 되었다.
1908년 3월 선봉장으로서 강진면 오치동(吾治洞)에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아침 6시부터 저녁 19시경까지 치열한 교전을 전개한 끝에 수십 명을 사상케 하고 다수의 무기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4월 15일에는 장흥으로부터 쳐들어온 일본군 수비대를 맞아 장흥 곽암(藿岩)에서 치열한 교전을 치렀다. 6월 19일에는 남평(南平) 장담원(長淡院)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을 사상하고, 남평 철천(鐵川)으로 이동하였다. 6월 25일에는 능주 노구두(老狗頭)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일본군을 사상시키고 군마를 비롯하여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7월 30일에는 영암(靈巖) 사촌(沙村)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으며, 8월 1일에는 나주로 이동하여 반치(盤峙)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기마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치열한 교전을 전개한 후 격퇴하였다. 9월 20일에는 장흥 신풍(新豊)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0월 9일에는 해남(海南) 성내(城內)에서 일본군 헌병분대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전개한 후 대둔사(大芚寺)로 퇴진하였다. 10월 27일에는 능주(綾州)로 이동하여 돌정[石亭]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이처럼 3월부터 10월까지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 등과 수십 차례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능주 돌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병석에 눕게 되어 의병 활동을 하지 못하고 은신하였다.
1909년 3월 몸을 회복하고 다시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1909년 3월 8일 박봉주(朴奉柱)·박채홍(朴彩洪) 등과 나주 월교리(月橋里)에 주둔하였다가 그날 밤 남평(지금의 나주시 남평읍) 운삼동(雲三洞)을 거쳐 선동(船洞)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정찰을 나간 탐마대(探馬隊)로부터 일본군 수비대가 공격해 들어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에 주요 매복 지점에 미리 부하를 배치하고 일본군 수비대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공격을 가해 일본군 5명을 사살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영산포(榮山浦)로 후퇴하였다. 이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영산포의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인근에 주둔하던 각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연합작전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격문을 받고 전수용(全垂鏞)·이대극(李大克)·오인수(吳仁洙)·안규홍(安圭洪)·김여회(金如會)·유춘신(柳春信) 등이 연합작전에 호응을 하였다. 특히, 안규홍 의병부대와는 끝까지 유기적 관계를 맺었다. 한편,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이동하였다는 정찰 보고를 받고 공격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본진은 장암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부대원을 5개 부대로 나눠 동쪽의 대치(大峙)를 비롯하여 대항봉(大巷峯), 월임치(月任峙), 덕룡산(德龍山) 꼭대기, 병암치(屛岩峙)에 각각 매복시켜 놓은 후 유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다음 날 새벽 유인 작전에 걸려든 일본군 수비대는 능주·광주·나주·남평·영암 방면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미리 준비한 작전대로 대응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이 거성동(巨聲洞) 전투에서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총독 박기춘(朴基春), 좌익장 박여홍(朴汝洪), 우익장 박태환(朴泰煥)이 전사하는 피해도 입었다.
4월 2일에는 장흥 우산(牛山)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그곳은 능주 일본군 헌병대가 매달 5차례씩 통과하는 곳이었다. 이날도 일본군 헌병대가 통과한다는 정보에 따라 2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매복 공격하도록 계획하였다. 일본군 헌병대가 나타나자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 여럿을 사상케 하고 대포를 비롯한 다수의 무기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생포된 호남의병장들(1열 5번째 강무경, 1909) [판형2] |
5월 12일에는 보성 천동(泉洞)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 주둔하고 있을 때 안규홍 의병장과 석호산(石虎山, 보성군 미력면)에서 만나 연합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중군장 안찬재(安贊在)와 통장 김도숙에게 군량미를 운반해오도록 하고, 후군장 김성재(金聖載)와 호군장 강달주(姜達周)에게 군사들의 훈련을 지시하였다. 이때 보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기습 공격해 들어왔다. 50여 명의 대규모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한 결과 일본군을 사상시키는 전과를 올리고 격퇴하였다. 천동 전투 이후 안규홍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비롯한 향후 전략에 대해 기획할 때 이세창(李世昌)이 일본군의 규모가 크니 전라남북도의 의병을 합치는 연합 의병을 건의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각지의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연합 의병을 구축하던 중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의 조칙이 내려졌다. 황제의 조칙이 일제의 협박으로 내려진 조칙인 줄 알았지만 받아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자진 해산하였다.
의병을 해산한 후 심남일 의병장과 함께 신병 치료차 이전의 격전지였던 능주 풍치(風峙) 산중에 있는 바위굴(장흥군 월정장(月亭場) 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은신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1909년 10월 9일 오전 6시 40분경에 장흥과 능주의 경계인 봉산사(鳳山寺) 일대를 정찰 수색하던 제2연대 2중대장 사타케(佐竹)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심남일, 부인 양방매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0월 15일 광주로 이송되었다가 12월 15일에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10년 10월 4일 대구감옥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