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자평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이 命理學을 공부하면서도 왜 命理學을 子平命理學이라고 하는지? 徐子平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命理學의 發展과 展開
人間은 그 자체나 그가 속한 集團 또는 社會, 國家 등의 未來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초기에는 統治를 위한 수단으로 占이나 기타의 方法을 동원한 것 같습니다. 中國에서는
그 歷史의 始原으로 보는 三皇때의 복희씨(伏犧氏)가 河水에서 머리는 龍이고 몸은 말의 형태를
한 龍馬의 옆구리에 그려진 점들로 만들어진 그림을 보고서 宇宙 變化의 原理를 깨달아 八卦를
만들면서 易의 起源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복희씨는 동이족이라고 서술
하였으니 아마도 우리의 조상일 것입니다.) 그 후 炎帝 신농씨(神農氏)가 六十四卦의 연산역(連山易)
을 만들고, 黃帝 헌원씨(軒轅氏)가 귀장역(歸藏易)을 集大成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周나라를 세운
文王과 그 아들 단공이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지음으로서 周易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春秋時代에 孔子는 周易에 주석을 달아 쉽게 정리한 十翼을 지어 오늘날까지 周易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후 占이나 기타의 方法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하여 天地間의 氣運들이 어떻게 造化를
이루고 變化가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硏究하여 보다 科學的이고 說明 可能한 方法들을
생각해 낸 것이 命理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命理學의 근원은 원래 戰國時代의 낙록자(珞綠子), 귀곡자(鬼谷子)가 있으며 漢代의 동중서(董仲
舒), 사마계(司馬季), 동방삭(東方朔), 엄군평(嚴君平)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관로
(菅輅), 진대(晉代)의 곽박(郭璞), 위정(魏定) 등이 있고, 그 후 당대(唐代)의 원천강(袁天綱) 一行,
이필(李泌), 이허중(李虛中) 등을 命理學의 始祖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唐代의 이허중(李虛中)은 李虛中命書 3권을 지어 命理學을 획기적으로 發展시키는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는 四柱上 五行의 旺相休囚死와 納音五行, 年干과 日柱 위주의 논명방식으로 四柱
를 논하였는데 당시 日柱가 日干을 규정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日柱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日柱의 現代的 意味가 이미 李虛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후 五代와 宋나라 初期
에 걸쳐 活動하신 徐子平에 의하여 現代的 意味의 日干을 위주로 한 그야말로 現代에도 널리 쓰이
는 命理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럼 과연 徐子平이란 분은 누구인가?
2. 徐子平은 누구인가?
徐子平이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學說이 있습니다. 그 중 서거이(徐居易)라는 說과 徐升
이라는 說이 크게 대두되는 데 이에 대하여 조금 살펴보면
첫째, 徐居易라는 說
明의 만육오(萬育吾)는 그의 저서 『三明通會』 제7권 『子平說辨』에서 徐子平이 五代의 徐居易
라고 보고 있다. “탁영필기(濯纓筆記)에 보면 子平은 姓은 徐, 이름은 居易이고, 子平은 그의 字이
다. 東海人이고 別號는 사척선생(沙滌先生)인데 봉래수(蓬萊叟)라고도 하며, 太華의 서쪽 당봉동
(棠峰洞)에 은거하였다. 子平之法은 出生 年月日時로서 그 祿命을 추리하였는데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다. ⋯ ” 라고 하여 徐子平에 대하여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삼아 徐子平이
徐居易라고 하는 學說입니다.
둘째, 徐升이라는 說
明代에 양종(楊淙)이 增校한 『淵海子平』의 추천사에서 “子平淵海의 理致는 唐의 대부 虛中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人間의 出生 年月日時의 生剋旺相과 休囚制化로써 사람의 禍福을 決定하는데 그
응험함이 鬼神과 같았다. ⋯ 宋의 서공승(徐公升)은 다시 사람의 生日을 위주로 하여 六事를 나누
어 議論을 精微하였으며 『淵海』의 책을 지어 諸儒의 뜻을 모아 지금까지 傳布하므로, 모두의
組宗이 되었다. 후에 여러 사람의 文集인 『淵源』이 있었지만 理義와 扁章이 附和雷同하여 지금
까지 수백년이 되었고 版籍에 글자의 誤謬가 많아서 學者들이 그 뜻을 알기가 어려웠다. 오늘날 당
금지(唐錦池)군이 이 理致에 正統하여 이 두 券의 책을 합치고 ⋯ 인쇄해서 世上에 내어 놓으니
後學들이 이것을 익혀 故人의 遺範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책을 완성한 唐錦池君이 나에게
부탁하기에 여기에 추천사를 쓰는 바이다. 崇禎七年 초겨울 吉日에 重梓를 하면서.” 라고 하여
徐升이 『三明通會』에서 言及한 서대승(徐大升 혹은 徐大昇, 徐彦昇)과 同一 人物일 可能性이
크다는 것 입니다. 추천사에서 唐의 李虛中과 徐升사이에 살았던 徐居易의 存在에 대하여 言及
하지 않았고 그 책 3권 『五行原理消息賦』를 주석하면서 徐升이 錢塘에 居하였는데 後世 사람들
이 그를 徐子平이라고 불렀다고 하여 徐升이 곧 徐子平이라고 하는 學說이 있습니다.
그 外에 다른 學說들도 있으나 대부분 소수의 學說이고 現在는 이 두가지 學說이 竝存하고 있습
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徐居易와 徐升(또는 徐大升) 두 분의 字號가 모두 ‘子平’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되었든 日干 위주로 四柱를 보는 것을 子平命理學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는 現在까지도
使用되고 있답니다. 아마도 推論컨대 徐居易가 子平學을 創始하고 徐升이 子平學을 繼承 發展시켜
널리 알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3. 徐子平의 著書
『낙록자삼명소식부주(珞琭子三命消息賦註)』, 『옥조신응진경주(玉照神應眞經註)』, 『통명부
(通明賦)』
이 중 낙록자삼명소식부주(珞琭子三命消息賦註)』와 『옥조신응진경주(玉照神應眞經註)』는 주석
을 달면서 자신의 意見을 피력한 것이고 『통명부(通明賦)』는 徐子平의 著書라고 알려져 있습니
다. 이 중『낙록자삼명소식부주(珞琭子三命消息賦註)』는 徐子平이 註釋을 달면서 새로운 子平命
理學의 眞面目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아주 重要하답니다. 『옥조신응진경주(玉照神應眞經註)』는
東晋의 곽박(郭璞)이 주로 六壬의 原理를 이용하여 저술했다고 알려진 옥조신응진경(玉照神應眞
經)에 註를 단 것으로 ‘四柱’라는 명칭이 최초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통명부(通明賦)』는 徐子
平이 저술한 것이라고 『三命通會』에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