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노래를 부르자!
2024년 8월 18일 겔 37:15-17
1. 내일을 사는 사람들
(1) 어제, 오늘, 내일
어제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과거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 가운데 많이 있지요. 이런 분들은 옛날 얘기만 합니다. “내가 월남에 갔을 때” 혹은 “중동에 나갔을 때”, 혹은 “내가 사업할 때”등이 주로 발어사입니다. 할머니들은 시집살이와 가족 이야기를 많이 하시지요. 목사님들은 “내가 어느 교회 시무할 때”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공통점은 모두가 다 과거 이야기란 점입니다. 어제를 사는 분들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젊은 분들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현역에서 뛰고요, 할 일이 많습니다. 가족도 부양해야 하고요, 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런 이들은 옛날 얘기 할 틈이 없습니다. 눈앞에 불이 튀고 있는데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수 없지요. 이런 분들의 관심사는 주로 일입니다. 먹고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요. 생산량, 매출액, 연봉, 주가, 집값 이런 것들이 대화의 주요 소재고 관심사들입니다.
내일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래를 앞당겨 사는 사람들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비록 현재에 살지만 그 관심이 현재보다는 미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현실에 좀 맞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노아는 당시에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일을 하였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멀쩡한 날씨에 산에 올라가 방주를 지었습니다. 내일을 사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 부류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가올 미래를 오늘의 현실에서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 예언자
그런데 문제는 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미래에 살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매우 불편한 면이 있다는 겁니다. 맑은 날에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준비한다거나, 잘 살고 있는데 전쟁의 발발과 나라의 멸망을 외치고 다닌다거나 하니 참 곤란한 겁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정신이 좀 나간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1989년 3월 25일, 고 문익환목사님이 방북한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정부의 허락 없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포옹하고 면담하고 한 사건은 당시에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한신대학원에 갓 입학한 입학생이었는데, 참으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원래 한신대 구약학 교수였고, 기장교회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이었지만, 그러나 감히 문목사님의 방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에 주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중견 목회자는 문목사님의 방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가 교회에서 호되게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 물꼬가 터지자 그 물길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임수경양 방북, 한상렬목사님의 방북 등 여러 시도들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하나같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형을 받고 수감되었지만, 그러나 그토록 두껍게 여겨졌던 금기의 벽은 서서히 균열이 되고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2,000년에는 김대중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였고, 그 후에는 노무현대통령이, 그리고 2,018년도에는 문재인대통령이 김정은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는 방북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빨갱이의 간첩 행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에 따라서 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엄혹했던 시절에 걸어서라도 평양을 가겠다고 잠꼬대 같은 시를 쓰고, 실제로 또 그것을 실천한 고 문익환 목사님은 우리 시대의 예언자였다고 생각합니다.
2. 에스겔서 37:15-17
이스라엘은 솔로몬과 그 아들 르호보암이 억압정책을 편 결과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북왕국은 일찍이 앗시리아에게 멸망했고, 남왕국만 남았다가 그마저도 바빌론에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지도자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아무 소망이 없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여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 절망적인 포로생활이 끝나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날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제2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포로 생활하던 백성에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인데, 여기엔 민족재건의 내용 가운데 특별히 분단의 극복, 통일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겔37:15-17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은 남왕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은 북왕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남왕국과 북왕국이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북과 남이 이미 망하고 다 없어진 상태이기에 통일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만 포로상태에서 풀려나 귀환하여 재건되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갈라지지 않은, 온전한 하나의 국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에스겔의 이 예언이 전해지던 그 당시는 아무 소망이 없던 때였다는 점입니다. 이때는 자기 땅에서 끌려나와 이방의 포로로 비참하게 살아가던 바로 그 때였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소망할 수 없었던 이 암울한 시기에, 아무 것도 바라볼 수 없었던 캄캄한 시기에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보았고, 들었고,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할진대 이와 같은, 앞날을 앞당겨 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3. 통일의 노래를 부르자!
(1) 비정상의 정상화
사람이 잘못된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면 그 자세가 굳어져서 그 자세가 편하게 됩니다. 분명히 잘못된 자세고 병적인 모습인데,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바른 자세를 취하면 오히려 불편하고 거북하게 됩니다. 뭐가 뒤집어져도 한 참 뒤집어진 것이지요. 저는 만세를 부르면 두 팔이 11자 모양이 아니라 영문 D자처럼 됩니다. 수술 받은 한쪽 팔의 인대가 짧아져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 팔은 굽어져 있는 것이 편합니다. 똑바로 펴려고 노력하면 힘들고 아픕니다. 구부러진 것이 편해요. 그래서 구부러진 채로 살아갑니다. 장애가 길어지면 장애가 정상처럼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게 정상이 아닌데 그게 편해지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 정서적으로 슬픔의 장애를 겪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슬픔과 눈물이 더 편한 겁니다. 즐겁고, 기쁜 감정보다 슬픔이 더 익숙한 감정이 되어버린 겁니다. 불편한 게 더 편한 겁니다. 말이 좀 이상합니다만 그래도 이것이 사실입니다. 장애가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제 남북이 함께 살자고 하면 사람들이 불편해합니다. 하도 떨어져 살고 미워하며 살도록, 상대방을 인격이 아니라 악마화 하도록 세뇌 받았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보다 갈라져 사는 것이 편한 겁니다. 으레 철조망은 처져 있어야 하고, 젊은이들은 군대 가서 총 들고 서있어야 하고, 때로는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군사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지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0년도 넘게 이리 지내니 이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과연 당연한 것인가요? 정상적인 것인가요? 아니지요. 이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비정상이지요. 같은 민족끼리 총 들고 서있는 것은 정상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극복해야할, 철저히 망가진 모습입니다. 우리 민족 전체가 벗어야 할 옷이고, 넘어서야 할 산입니다.
(2) 통일의 노래를 부르자!
주중에 광복절이 있는 지난 주일은 교단에서 정한 평화통일주일입니다. 왜 평화통일주일일까요? 광복절과 평화통일은 서로 어떻게 관련되나요? 바로, 극복되고, 회복되어야 할 모습이란 점에서 일반이지요.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는 찾는 것이 도리고, 나라의 통일을 빼앗겼을 때는 되찾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예산, 올해 60조 원 정도가 국방비로 들어가는데, 이 돈이 국민의 복지를 위해 사용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60조라고 하니 짐작이 잘 안 되지요. 우리나라 올해 복지예산 가운데, 기초생활(20조) 보육(7조) 노인(25조) 장애인(5조) 보건의료(3조)를 다 합친 금액이 60조 원 정도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을 국방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어떨까요? 제대로 알려진 통계가 없습니다만 GDP대비 국방비 지출 규모가 세계 최고 수준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국방비를 마련하자니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이지요. 남한과 북한이 모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탈북한 분들이 우리나라에 정착해서 살고 있지요. 일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3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요. 그런 분들하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하고 함께 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권력자들이 문젭니다. 이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는 남과 북의 지도자들, 그리고 이 분단 상황을 통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문젭니다. 우리가 이런 장벽들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많은 이들이 통일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끊임없이 통일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통일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것 같이 외롭고 쓸쓸할지라도, 그래도 교회는 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17절입니다.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통일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는 하늘샘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