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에서 식물은 고통을 느낀다고 하기 전에.. 그것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기에 채취를 하면서도 살생이란 악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기에 중생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제는 식물 또한 고통을 느낀다는 게 밝혀졌다.
따라서 동물은 물론 식물을 채취하여 음식으로 섭취래도 괜찮은지?. 하는 질문 앞에 섰다.
https://www.hani.co.kr/arti/well/well_friend/1058998.html
애초 출가자들은 동냥으로 식사를 했으므로.. 주는 대로 받아야 했기에..
만일 주는 자가 별생각 없이 채식이 아닌 육식이나 생선을 주면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아마 부처님 당시부터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았다면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으리라..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는다는 바탕에는.. 살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조금은 비겁함이 있지만..
동냥받으면서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된다고 하는 게 말이 되나?.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면서 받아야지.^^.
그런데 동 아시아에서는 출가자라 해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고 가르치듯 절에서도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한다.
농사는 채식인데.. 감자든 콩이든 식물이 생명체로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답은 글쎄이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다른 생명체의 생기를 먹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처음부터 생기를 가진 자를 살생하여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다른 생명체의 생기를 먹어야만 하는 존재라면
그것이 식물이든 심지어 동물이라 하더라도 먹는 것 자체가 업[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즉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업이 되느냐 아니냐는.. 먹는 음식에 있는 게 아니다.
업은 먹는 것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겠지만..
말하고, 생각하고, 몸으로 행위하는 3가지 행위에 의해 생긴다 했다.
업보는 어떤 마음을 먹고 행하느냐가 어떤 음식을 먹느냐 보다 더욱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음식을 먹을 때는 음식 맛이나 양에 탐착 할 게 아니라..
내가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음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하고..
그 고마움을 밖으로 표시해야만 한다는 다짐도 음식을 준 고마움으로 답해야만 한다.
그뿐인가..
우리는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마시고 내쉬는 숨은 자연에서 가능하다.
그러니 자연은 나의 일부요, 나는 자연의 일부다.
나를 보호한다는 것은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자연을 마치 어머니처럼 그저 받아내려만 하고 나만 즐기려 한다.
어머니같은 자연은 어떻게 되건 말건..
나무를 분재로 만들 때.. 내가 당하는 듯한 고통이 나무에 전해져.. 나무가 고통스러워할 거라는 것은 세 살 먹은 애도 안다.
그런데 우리 욕심을 채우고자 언제까지 분재를 만들 것인가..
멋진 잔디를 가꾸려면 허가 없이 함께 자라는 번신력이 잔디보다 강한 클로버나 민들레를 사정없이 뽑아 버려야 한다.
그래도 되나?.
들은 얘기다. 캐나다에서는 잔디 가꾼다며 잡초라 하여 함부로 뽑아내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했다고..
누나는 이렇게 말한다. 잔디랑 클로버를 함께 관리하니 보기에도 나쁘지 않은데.^^.
내가 미안해진다. 그간 시간 나면 땀까지 흘리며 클로버와 민들레와 잡초라 불리는 것들을 뽑아낸 게..
그렇다고 호박이나 고추, 들깨를 키울 때 잡초를 그냥 두면.. 호박 등이 잘 자라지 못하는데?..
살생유택.. 살생은 가려서 해라.. 우리 선배이신 신라 원광스님의 세속 5계 가운데 하나인데..
감초처럼 곳에 따라 그 쓰임이 정말 훌륭하지 아니한가!.
그렇다. 삶은 너무 과하지 않고 너무 적지도 않는.. 적당함이 미덕이다.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은 미소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고통받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아닐까. / 본문에서
가난한 자는 복을 받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라 했는데..
연민이 없는 사람이 간난하다고 하니 천국을 일등으로 그들이 가는 걸까?^^.. 그럴 리가!.
말은 문맥으로 봐야지.. 문자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
사람은 다 같다. 분재를 키우는 사람이라 하여 어찌 연민이 없으리오.
그런데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와 가정을 이끌고 있는 자라면 분재가 아니라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하는 게 아닌가..
연민보다 우선하는 게 마음이 아닌 몸의 가난이니..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건.. 생존 앞에 당면한 사람들이 아닌..
이미 넉넉한 머니나 권력을 갖고 있음에도 더욱 탐욕을 채우려는 자들이 아니던가.
이번에 다친 겁나게 큰 태풍 앞에 많은 사람들이 공포를 느꼈으리라.
그런데 뉴욕은 앞으로 허리케인이 시작하겠지만.. 아직은 비가 넘 오지 않아 초목이 말라가고.. 물 부족이 일어나고 있다.
물은 필요한 것인데.. 너무 많아도 문제요, 너무 적어도 문제다.
댐을 만드는 것은 태풍처럼 비가 많이 올 때는 저수를 하고.. 물 부족이 일어나면 댐 문을 열어 가뭄을 풀어주려는 것.
우리를 겁나게 하는 건 보이는 태풍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태풍도 있다.
지금 자본주의 국가의 겁나는 문제는 부익부라 하여 머니와 권력을 5% 미만의 소수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
종교인이나 종교단체가 활빈당은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민주제가 되도록..
머니와 권력을 다수인 시민이 제법 가질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하는 게 아닌지..
아직도 우리나라 보수는 누군가가 민주제를 말하고 앞장서면..
그는 공산주의자요 빨갱이라고 발라 버린다는 것.
그러기에 고진하님 같은 시인이며 목사인 민주적 종교인은..
노인이나 식물의 고통을 주로 보여줄 뿐.. 정작 보여주어야만 할 것 같은
상위 5%의 정치적인 야욕에 무지를 휘두르는 권력자나 머니로 빛을 내는 갑질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게 몸이 가난한 자를 사람 취급해야 한다고 앞장섰기 때문인가..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권력자를 비판하다 그리 되었다.
명박근혜 시절 두 명 스님이 정부 권력을 비판하며 분신으로 뜻을 보여주었는데..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소문도 나지 않았다.
그 무엇이 민주적인 행동에 장막을 치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자유로이 말하고 표현하는 자유.. 결사 집회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대통령은 입만 열면 국민의 자유, 자유 하는 데..
그가 말하는 자유란 상위 5% 국민만의 자유가 아닌지..
그걸 지키고자 검찰이 앞장서고 있는 게 아니냐 말이다.
그대가 민주제를 바라는 시민이라면
고통받는 자의 울음을 멈추게 하려는 첫 단추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