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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답사] 거창 갈계리임씨고가(居昌葛溪里林氏古家) 탐방
이장희 추천 0 조회 67 14.05.09 21: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답사] 거창 갈계리임씨고가(居昌葛溪里林氏古家) 탐방

(2012/10/27 현재)


사)서울문화사학회의 제261회 답사지로 경남 거창군 지역 유적지중,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1167 에 있는 거창 갈계리임씨고가(居昌葛溪里林氏古家)
전경 입니다.이곳은 대부분이 임씨로 씨족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갈천(葛川) 임훈(林薰) 선생이 거처하던 가옥으로, 중종(中宗)
2년(1507)에 건립 되었습니다. 갈천 선생은 연산군(燕山君) 6년(1500)에 거창군(居昌郡)
북상면(北上面) 갈계리(葛溪里)에서 출생하여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을 역임하다가 노부(老父)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辭職)하였고,
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60세의 노구(老軀)에도 지성을 다하여 그 효성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졌으며 후에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제수되었습니다. 가옥은 솟을대문채와 선생의
자호(自號)를 딴 자이당(自怡堂)과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 옆에 갈천 선생과 그의
동생 임예(林藝) 선생의 문집책판(文集冊板) 장판각(藏板閣)과 사당이 있으며, 홍문(紅門)의
초석(礎石)이 거머리로 조각된 것이 흥미롭습니다. 주변에 첨모당 임운 선생이 살던 서간소루
(西澗小樓) 와 은진임씨정려각(恩津林氏 旌閭閣) 갈천서당(葛川書堂) 이 있습니다


 

 

 

 

 

 

 

 

 

 

 

 

 

 

 

 

 

 

 

 

 

 

 

 

 

 

 

 

 

 

 

 

 

 

 

 

 

 

 

 

 

 

 

 

 

 


거창 갈계리 임씨고가(居昌 葛溪里 林氏古家)   


-종    목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85.01.14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1167

-관리자(관리단체) 임견종   


이 건물은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이며 효자(孝子)로 이름이 높았던 갈천(葛川) 임훈(林薰) 선생의 집이다. 중종 2년(1507)에 지었으며, 안채, 사랑채, 사당, 장판각,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 정면에 사랑채가 있고 안채 오른쪽 뒷편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방·대청·방·부엌으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대청과 방 2칸으로 이루어졌다. 대문채는 방·대문·헛간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랑채의 앞면에 자리 잡고 있다.


 갈천 선생은 연산군(燕山君) 6년(1500)에 거창군(居昌郡) 북상면(北上面) 갈계리(葛溪里)에서 출생하여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을 역임하다가 노부(老父)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辭職)하였고, 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60세의 노구(老軀)에도 지성을 다하여 그 효성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후에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가옥은 솟을대문채와 선생의 자호(自號)를 딴 자이당(自怡堂)과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 옆에 갈천 선생과 그의 동생 임예(林藝) 선생의 문집책판(文集冊板) 장판각(藏板閣)과 사당이 있다. 홍문(紅門)의 초석(礎石)이 거머리로 조각된 것이 흥미롭다.


▶임훈 [林薰]-1500(연산군 6)~ 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주자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중성(仲成), 호는 자이당(自怡堂)·고사옹(枯査翁)·갈천(葛川). 아버지는 진사 득번(得蕃)이며, 어머니는 강득구(姜得求)의 딸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노진(盧愼) 등과 교유했다. 일찍이 어머니의 상을 당해 수묘(守墓) 3년 동안 수질(首?)을 벗지 않았다.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합격했다. 1553년(명종 8) 사직서참봉이 되었다가 이듬해 집현전참봉으로 옮겼다. 이후 제용감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으며, 아우와 더불어 80세의 아버지를 정성껏 모셔 1564년 정려문(旌閭門)이 내렸다. 1566년 효행으로 천거되어 언양현감으로 발탁되었다. 그뒤 군자감주부· 비안현감· 장악원정·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임금이 정치의 도리를 묻자, 정심(正心)·수신(修身)이 제일이라고 진언(進言)했으며 학자의 자세에 대해서도 수신을 강조하는 한편 학자들이 고사(古史)만을 찾아보면서 우리나라의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널리 구하여 알고자 했다. 저서로는 〈갈천집〉이 있다.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안의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거창선비< 갈천 임훈 > 학문 요체는 '正心修身'


거창 북상면 갈계리(葛溪里)에 사는 후손과 마을 사람들은 선생이 이 마을에 사셨다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며, 숭모하는 마음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마을에는 선생의 종택(宗宅), 정려비(旌閭碑), 서당(書堂), 장판각(藏板閣), 별묘(別廟) 등 선생의 덕을 기리는 유적이 많은데  한결같이 잘 정리되어 찾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또한 이들은 타지 사람이 와서 선생에 대해 물으면 안내자가 되길 서슴지 않는다.  13대 종손 현종(見鍾)씨, 후손 지종(芝鍾) 종악(鍾岳)씨, 은진임씨(恩津林氏) 의령공파(宜寧公派) 종회(宗會) 회장 영찬(永贊)씨가 그들이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바쁜 농사철임에도 불구하고 종중 사람들이 모여 갈천선생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들은 갈천선생과 그 형제분의 후손들로서,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3형제분의 우의를 기리며 집안끼리 우애 있게 지내고 있다 한다. 현재 이곳에는 31세의 나이로 요절한 둘째 도계공(道溪公)의 자손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다 하니, 생전에 못 다한 복이 사후에 자손들이 번성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후손 지종씨는 {경상 좌도에 회재, 퇴계가 있었듯이 우도에는 갈천과 남명이 있었다} 라고 하면서 갈천의 학문이 남명, 퇴계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그는 선생이 당시 온 나라 선비들을 통틀어 그 중 육현(六賢)으로 선발되어 벼슬을 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선생의 증직과 시호를 청하는 상소를 보면 {우리 조정의 문물의 밝음이 명종과 선조조때 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습니다. 도내의 판결사(判決事) 임훈과 징사(徵士) 임운 형제는 문순공(文純公) 이황과 문정공(文貞公) 조식과 더불어 같은 때 태어나서 유학을 부르짖어 밝히고 도의를 강마하여 우리 동방의 큰 종사였는데, 문순공 이황은 이미 승무(문묘에 배향되는 것)의 특전을 받으셨고, 문정공 조식 역시 증직과 시호를 받는 특전을 입으셨는데,


유독 임훈 형제분께서 여태까지 증직과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지 못했으니, 일반인들의 탄식하고, 한스러워 함이 날이 오래될수록 더욱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이에 만 번 죽음을 당할 것도 무릅쓰고 천리 먼 길을 여행하여 임금님 가시는 길옆에서 부르짖으며 일제히 여쭙나이다}라고 하여 선생을 남명, 퇴계와 더불어 같은 때 태어나서 유학을 밝히고 도의(道義)를 연마하여 우리 동방의 큰 학자였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후 갈천은 유림들이 올린 상소로 말미암아 효간(孝簡)이란 시호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일찍이 남명은 갈천이 부친상을 당하자 몸소 3년상을 치르고 있는 여막으로 문상을 갔다. 이때 갈천의 나이 60세가 이미 넘었는데도 예를 너무 지나치게 지킨다고 남명이 생각할 만큼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예를 치르고 있었다. 남명이 문상을 간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三洞의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구경할만 합니다}라고 하자 남명은 {이번 걸음은 주인을 위문하기 위함이니 다른 날 놀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갈천의 슬픔을 같이 느끼고자 하였다. 두 현인의 돈독한 정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또한 남명은 안음(安陰. 현 安義) 옥산동(玉山洞)으로 유람할 때, 모촌(茅村) 이정(李瀞), 옥계(玉溪) 노진(盧 ), 개암(介庵) 강익(姜翼) 등 당시 이 지방 이름난 선비들과 갈천을 찾아 함께 유람하면서 갈천정사(葛川精舍)에서 하루 밤을 지내기도 하였다.


경오년(1570)에 선조는 갈천을 대궐로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물었다. 선조가 묻기를 {그대는 學行이  있다 하니 만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하라} 이때 갈천이 대답하기를 {선대왕(명종)때 小臣이 부르심을 받아 한차례 선대왕을 만났습니다. 그때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묻기에 소신은 감히 正心修身의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또 신이 오늘 물음을 받자와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사옵고 또 다시 正心修身을 말씀드릴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갈천은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선 임금 자신부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바르게 닦아 만백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한 것이다. 즉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다스리는 사람이 먼저 솔선 수범을 보일 때 백성들이 이를 본받아 온 나라가 태평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갈천은 또 선조에게 이르기를 {신이 보는 바로는 예로부터 제왕들이 正心修身에 힘쓰지 않은 것은 아니오나 그 나타난 효과가 적은 것은 두 가지 병폐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두 가지 병폐를 임금이 선비들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성찰하지 않는 것과 임금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 해이하게 된 점을 들었다. 하찮은 선비의 말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귀담아 들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여 성군의 길을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때 갈천이 퇴계가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간 것을 애석하게 여기자, 선조는 갈천에게 물었다 {그대가 이황을 아는가} 갈천이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 그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어찌 그 사람이 어진 줄 모르겠습니까} 하니 선조가 묻기를 {이 사람이 집생각만 하고 기어이 떠나가더니 간 뒤에 어떻게 지내는고} 대답하기를 {신이 사는 곳과 이황이 사는 곳과는 6,7일 일정이 되기에 그 자세함은 알 수 없으나 대개 병없이 지내는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갈천과 퇴계는 평생 만난 적은 없으나 서로 마음으로 학덕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는 대목이다.    


갈천의 학문 요체는 바로 [正心修身]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대학(大學)의 첫머리에 나온다.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다듬고 그 집안을 가다듬고자 하는 자는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마음이 바르게 되면 어떠한 사사로운 욕심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므로 몸이 저절로 닦여진다. 이것이 갈천이 주장하는 [正心修身]의 뜻이다.

    

 갈천은 평범한 이 말을 평생 학문의 요체로 삼고 임금에게까지 이를 실천할 것을 직언 하였다. 자신도 고을의 원님으로 벼슬에 나갔을 때 이를 몸소 실천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주는 일에 앞장을 섰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산이 옮겨지고 골짜기가 변한다 해도 선생의 이름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라고 하여 선생을 추모하였다. 병자호란때 적에게 인조가 항복하려 하자 할복으로 기개를 보인 동계의 말이 아니더라도 선생의 학덕(學德)은 면면히 이어져 후대인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1996.7.19 경남일보) 

              

▶갈천선생문집책판및첨모당선생문집책판(葛川先生文集冊板및

                   瞻慕堂先生文集冊板)-경상남도유형문화재제168호


이곳에는 갈천 임훈(1500~1584)과 첨모당 임운(1517~157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 177매가 보관되어 있다. 두 문집은 1665년(현종 6년)에 그의 후손이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며, 송시열이 서문을 썼다.


4권 2책으로 구성된 <갈천집>에는 선생이 쓴 시를 비롯하여 상소문과 잡문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언양진폐소"는 선생이 언양현감으로 있을 때 고을의 어려운 실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해결을 촉구한 글로, 가혹한 세금 때문에 고통 받는 농민의 생활상을 호소하고 있어 당시 언양 지역의 사회 실정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3권 2책으로 구성된 <첨모당 문집>역시 시와 문장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으며, 특히 유학을 장려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글을 실어 조선시대의 사상적 경향을 잘 전해주고 있다. 두 문집에는 또한 지역 사회에 관한 글들이 다수 실려 있어, 거창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서간소루(西澗小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52호 


서간소루는 첨모당 임운(林芸)선생의 아들인 서간(西澗) 임승신(林承信)선생이 덕행과 학문을 닦던 곳이다. 서간소루가 있는 경남 거창군 갈계리는 대부분이 임씨로 씨족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서간소루는 이 마을의 종가 구실을 하고 있는 임씨 고택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살림채 없이 대문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으로, 본래 임씨 고택과 서간소루가 하나의 주거 영역이 아니었나 추측하게 한다.



거창 갈계리 은진임씨 정려각(居昌 葛溪里 恩津林氏 旌閭閣)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34호      

-지 정 일 2008.02.05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1444-1  

-소유자(소유단체) 은진임씨 대종회


갈계리 정려각은 조선 명종 계해(1563)년에 안음 현감 박응순이 임훈, 임운 형제의 효행을 널리 알려 생전에 내려진 생정려 2위와 순조 임진년(1832)에 정려된 임한신과 한신의 처 고령 박씨, 고종 28년 신묘년(1891)에 정려된 임경원, 광무 9년(1905)에 정려된 임지예를 추가하여 모두 6위의 정려를 모시는 정려각이다. 하지만 6위의 정려 현판은 물론 정려기 현판도 전해지지 않고 현재 6기의 비석이 서있다. 이 정려각의 초창은 1564년 현감 이효언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1600년에 중수가 있었다고 하나(정온의 정려각중수기) 현존 건물은 1905-191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갈계리 정려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다진 지반위에 통돌로 초석을 놓고 아래는 방형으로 위는 육각으로 깎아 그 위에 굵은 원주를 세웠다. 벽체는 배면은 판벽, 좌우면은 중방상부 살창 중방하부 판벽으로 하였고 정면은 중방상부 살창 중방하부 교살로 처리하여 환기를 고려하고 정면성을 살렸다. 내 2출목 외 1출목의 공포를 두고 주칸 사이에도 공간포를 두었으며 이를 위하여 창방위에 평방을 올렸다.

 

정려 현판 없이 비석으로만 남아 정려각의 요건으로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건축물의 규모와 양식적 완성도는 경남지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수준 높은 건축물이다. 또한 학자이자 효자로 이름 높은 임훈, 임운 형제와 관련된 인물유적이기도 하므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후손에 대한 전통문화 교육자료와 건축역사 연구자료로 보존함이 마땅하리라 사료된다.



▶갈천서당(葛川書堂)-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5호  


이 서당은 조선 명종(明宗) 때 육현신(六賢臣)의 한 사람으로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낸 갈천(葛川) 임훈(林薰)이 후학 양성을 위하여 그의 아우 임운(林芸)과 1573년에 건립하였다. 그 후 1878년에 후손들이 중건(重建)한 목조와가(木造瓦家)건물이다. 건물 구성은 강당과 대문으로 되어 있는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 홑처마이고 양측 면에 풍판(風板)을 달았다. 처마 밑에는 그 당시 사용하던 큰북의 외통이 걸려 있다. 대문은 맞배지붕 솟을대문이며 뜰에는 후손들이 세운 두 형제의 신도비(神道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용암정(龍巖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53호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북상면 간계리 63 

  -소유자(소유단체) 은진임씨 종중


용암정은 조선 순조 1년(1801)에 용암 임석형(1751∼1816) 선생이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이다. 임석형이 지은 『용암정 창건기』와 이휘준의 『중수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고종 1년(1864)에 보수 공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자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중앙에 방 1칸을 만들어 마루 아래에서 불을 땔 수 있게 하였고, 둘레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고결한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자 안에는 ‘용암정(龍巖亭)’, ‘반선헌(伴仙軒)’, ‘청원문(聽猿門)’, ‘환학란(喚鶴欄)’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용암(龍巖) 임석형(林碩馨)(1751-1816) 선생이 1801년에 건립하였으며 1864년에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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