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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조선과 오우치 가문
이장희 추천 0 조회 28 14.07.09 18: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시대의 대일관계사를 보면 대내전(大內殿)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일본의 특정 고위층을 지칭하는 것 같아 조사를 해봤다. 이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 태조에서 선조까지 249회 보인다. 명종까지의 248회는 모두 현안과 관련된다. 조선과 대내전과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태조 4년(1395년) 1495년 일본 대내전의 다다량이 토산물을 바친 기록으로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가 이어졌다. (대내전과의 관계는 고려시대인 1379년에 벌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태종 14년(1414년)의 경우처럼 행패를 부리는 대내전의 사신을 장형으로 다스려 보낸 일도 있지만 조선 조정은 이로 인해 대내전이 불쾌해하지 않도록 전후사정을 설명하는 등 신경을 많이 쓴다. 대마도에서 물의를 일으켜 문제를 생겼을 때도 대내전에 한해서는 일본 국왕사(國王使)에 준하는 대우를 해준다. 대내전에서도 조선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태종 8년(1408년)에는 이예 일행이 좌초한 것을 도와주기도 했고, 조선 통신사 일행이 귀환 길에 해적들에게 일본의 막부로부터 받은 선물을 털린 일이 있을 때도 도와준 일이 있을 정도였다.


대내전은 어떤 가문일까? 대내전은 일본 전국시대 초기 상당한 실력을 가졌던 오우치(大內) 가문을 의미한다. 오우치 가문은 15세기 중엽에는 7개 쿠니(스오, 나가토, 이와미, 아키, 지쿠젠, 부젠, 야마시로)를 통치해서 서부 일본의 최강자일 뿐 아니라 전국시대 전국적인 실력자가 되었다.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엘은 자신의 서신에서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력한 왕’으로 표현할 정도였고, 본거지 야마구치는 1만 세대가 사는 도시로 ‘서쪽의 교토’로 불릴 정도였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당시 무로마치 막부를 능가할 정도였다. 

 

오우치 가문 전성기의 영역

 

오우치 가문은 조선과의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그토록 사신을 자주 보낸 이유는 실상 교역에 그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조선은 이를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온 오우치 가문에 대해서는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또 오우치 가문의 역사가 조선에서 출발하므로 친근감이 더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해동제국기 등을 종합하면 백제 성명왕(聖明王) 혹은 성왕이나 무왕의 셋째 아들 임성(林聖)이 일본으로 건너가 스오주(周防州)  요시키군(吉敷郡) 다타라하마(多多良浦)에 도착하여 오우치(大內)에 살았기 때문에 그 후손이 성(姓)을 다타라(多多良氏), 씨(氏)를 오우치(大內)로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에서는 이를 중요하게 여겨 여러 번 이를 언급하며 오우치 가문에 친근감을 나타냈다. 정종 때는 땅 300결을 하사할지를 논의하기도 했다. 오우치 가문이 정말 백제 왕자의 후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조선과의 무역을 위해 백제 왕족의 후예라고 주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정종 1년(1399) 당시 일본의 6주를 차지하고 있던 오우치 가문의 大內義弘은 조선에 백제 쪽의 세계(世系)와 성씨(姓氏)를 적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 이로 볼 때 오우치 가문이 백제 도래인의 후손일 가능성은 많아 보인다. 그리고 조상으로부터 백제의 왕족의 후손이라는 말도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임성 왕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신빙성이 조금 떨어진다.


조선 초기의 조정은 일본 정세를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었다. 오우치 가문과의 친분을 유지한 것은 뿌리가 같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우치 가문이 혼슈 서남단과 큐슈 북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우치 가문의 힘으로 왜구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대마도도 이런 목적으로 관리했지만 큰 힘도 없고 늘 보채기만 하는 대마도에 비해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오우치 가문이 훨씬 믿음직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오우치 가문이 힘든 상황이 되면 조선 조정에서는 걱정해주기까지 했다.


오우치 마사히로(大?政弘, 1446년 ~ 1495년)가 관련되었던 오닌의 난(1467~1477)을 예로 들어보자. 오닌의 난은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애초에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했는데 뒤늦게 아들을 얻자 이를 번복하고 아들을 후계자로 정함으로 인해 생긴 사건으로 이로 인해 일본은 본격적인 전국시대로 들어갔다. 요시미를 지지하는 다이묘 호소카와 가스모토(細川勝元, 1430년~1473년)와 아들을 지지한 야마나 소젠/ 야마나 모치토요(山名宗全/山名持豊)의 대립이 표면화되고 지방의 다이묘들도 어느 한 쪽에 가담하여 교토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오우치 마사히로는 야마나 소젠의 서군에 가담하여 큰 무공을 세웠다.


이 때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사건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정확하다. 성종6년(1475) 조선 조정은 “대내전이 국왕과 서로 대항하고 있으므로 대내전은 어느 시기에 본토로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라고 묻자 사신 성춘(性春)은 “대내전은 산명(山名, 야마나 소젠)과 더불어 연결하여 서로 도우고 있으나, 국왕(國王,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사)의 동복 아우인 출천전(出川殿)이 국왕을 대신하려고 하는 까닭으로 현재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천전(細川殿, 호소카와 가스모토)이 대내전에게 복종하지 아니했으니, 내가 온 후에는 병화(兵禍)가 어찌되었는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정도면 조선 조정이 일본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또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오우치 가문에 대해 “산명 종전(山名宗全, 야마나 소젠)이 세천 승원(細川勝元,호소카와 가스모토 )과 서로 적이 되고부터 정홍(오우치 마사히로)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산명을 원조하여 지금까지 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소이(少貳, 쇼니씨)가 이 틈을 타서 다시 박다재부(博多宰府, 하카타) 등 예전 영지를 탈취하였다. 상세한 것은 축전주(筑前州) 소이전(少貳殿)에 나타나 있다.”라고 적어 당시의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중앙 무대의 정세 변화를 틈타 오우치 가문과 오랫동안 대립하고 있던 쇼니(少貳)씨가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는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연산군을 지나면서 명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오우치 가문에 대한 대우가 전만 못해진다. 삼포왜란의 영향도 있겠지만 왜구의 극성도 심하지 않은 터에 오랑캐 나라의 지방 실력자를 그리 잘 대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내가 보기엔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이 많이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우치 가문의 멸망과 함께 오우치 가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진다. 오우치 가문은 31대 당주 오우치 요시타카(大?義隆)대에 최고의 번영을 누리다가 가신들의 반란으로 1551년 오우치 요시타카는 자결하고 그의 장자도 살해되어 대가 끊어진다. 요시타카 사망 후 외손 중 한 사람이 가문을 이었지만 결국 모리씨에게 멸망한다. 그리고 오우치 요시타카의 아들 중 한 사람이 성을 도요다(豊田)씨로 바꿔서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자동차 회사 도요다는 아이치현의 지명이기 때문에 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오우치 가문을 멸망시킨 모리(毛利)씨 가문도 자신들은 일본 신화에 나오는 인물의 후예라고 주장하지만 조선의 문헌에는 뿌리가 백제계로 알려져 있다. 백제에서 임성태자를 따라온 수하가 모리씨의 선조라고 한다. 도요다씨나 모리씨를 만나면 뿌리가 백제계가 아니냐고 물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오우치 가문이 지배하던 일대는 후일 모리씨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에도 시대에는 조슈번이 되었다. 조슈번은 사쓰마번과 더불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명치유신을 통한 일본 근대화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지역이 되는데, 여기에는 모리씨 가문과 에도의 도쿠가와 가문의 뿌리 깊은 적대감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주요 세력들은 거의 이 죠슈번 출신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조선과 가장 가까웠던 가문이 통치하던 지역이 350년 후에는 조선 침략에 앞장선 인물들의 출신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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