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기록 ‘묘지석’의 한글자 ‘붕(崩)’의 힘!
그것은 우연이었다.
벌써 41년전 1971년 여름 7월 5일, 공주 송산리 고분단지에서 배수로를 파던 인부가 흙속에서 무덤의 입구를 발견한 것은 하늘이 시킨 역사적 우연이었다.
무령왕릉 발견! 한국의 놀라움과 기쁨! 그보다 더 크게 놀란 것은 일본이었다.
무령왕이 누구인가. 일본 천황가의 중간시조라 할 위대한 백제대왕, 그 왕릉이 발견되었으니 한일 고대사를 왜곡 조작한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무령왕릉서 나온 '묘지석'은 국보163호. 가운데 작은 구멍아래 보이는 글자 '붕(崩)이 일본의 역사 위조를 만천하에 폭로한 결정적 증거물이다..
그렇게도 증거물을 없애려 총력을 기울였건만!
명치유신이후 <천황 만세일계(天皇萬世一系)>를 창작해냈던 일본은 한일병탄을 하자마자 총독부에 역사 팀을 구성했다. “천황이 한국계란 증거를 샅샅이 뒤져 말소하라!” 역사기록물 수십만 권을 압수하고 불태우고 백제지역 고분군을 여기저기 도굴해간 총독부 아닌가. 완전범죄란 없다. 총독부 조사단은 송산리 고분이 전통적인 백제형식과 다른 ‘벽돌무덤’임을 알자 “왕릉 아니다”고 발굴을 포기, 무령왕릉은 일제의 곡괭이를 피해 고스란히 우리 손으로 발굴 된 것이다. 유물 4600여점,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만 17점이나 된다.
그중 핵심은 바로 묘지석(墓誌石)이다. 기왓장 크기의 얇은 돌에 새겨진 피장자 설명문!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62세 계묘년 5월7일 붕어. 을사년 8월 12일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 이와같이 기록함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무령왕은 523년 5월에 붕어, 525년 8월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 임종, 529년 2월 합장했다.
▲원형보존을 위해 폐쇄한 무령왕릉 입구.
▲한일 고대사 최대의 발굴, 공주 무령왕릉 내부. 종래의 백제고분 양식과 다른 '벽돌식'은 양나라 형식을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경천동지(驚天動地)! 한국 아닌 일본에 제3의 원자탄이 떨어졌다.
무서운 글자 하나 ‘붕’(崩)! 역사 범죄집단 일본 사학계엔 핵폭탄! 왜 그런가.
아무에게나 ‘붕’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학자이며 역사학자 소진철(蘇鎭轍)씨는 그의 책 <백제 무령왕의 세계>(2008,주류성출판사)에서 이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사서(四書)의 ‘예기’(禮記)에 이렇게 정해놓았다. 『천자사왈붕(天子死曰崩), 제후왈훙(諸侯曰薨), 대부왈졸(大夫曰卒), 사왈부록(士曰不錄), 서인왈사(庶人曰死)』-그리고 실제로 천자가 죽었을때 사관에게 「붕은 천왕의 붕(崩曰天王崩」이란 기록을 남기도록 관례화했다. 그후 사마천(史馬遷)은 ‘사기’(史記)에 「진시황붕(秦始皇崩), 주왕훙(周王薨), 공자졸(孔子卒)」로 그 지위와 신분에 따라 표기의 차별화를 정착시켰다. 이것은 한중일 3국에서 오랜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따라서 무령왕의 죽음을 ‘붕’으로 표기한 지석은 그가 천자, 내지 천자급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물인 것이다.
여기서 '일본서기‘를 펼쳐 보자.
일본이 자랑하는 최대의 사서, 그러나 언제 누가 편찬했는지 불분명한 채 AD720년 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역사 아닌 역사서’가 ‘일본서기’다.
서기는 역대 천황의 즉위와 몰년(歿年)을 기록한 서기는 백제왕의 즉위와 몰년도 함께 기록해 놓았다.
소위 ‘신공기’(神功紀: 삼한정벌 여왕)를 창작하면서 천황의 죽음은 ‘붕어’(崩御)로 쓰고 백제왕은 ‘훙거’(薨去)로 표기해 놓은 일본서기, 무령왕도 예외가 아니어서 「백제25대 사마왕(斯麻王, 시호 무령)훙거」다. 자기나라 역사책에 이웃나라 백제왕의 즉위-사망연도를 함께 기록한 것도 ‘도둑이 제발 저린’ 것이거니와, 그 상하 위치를 반대로 뒤바꿔 놓은 역사 쿠데타가 아닐 수 없다. 이 조작을 지석(국보163호)으로 폭로한 이가 무령왕이다. 그는 죽은 지 1400여년만에 글자 하나로 일본의 거짓을 쳐부순 것이었다.
일제시대 유명한 관학자(官學者) 스에마쓰(末松保和)는 “백제왕의 즉위와 훙거를 일본서기에 동시 기록한 것은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스에마쓰는 조선총독부에 파견되어 한일고대사 현장파괴와 개편작업에 종사했던 그룹멤버이다.
‘일본서기’가 집권층이 바뀔 때마다 개작되었다는 주장은 이미 소개했거니와, 가장 많이 왜곡된 시기로 한일병탄 전후, 식민지시대를 꼽는다. 백제-가야등의 한반도 역사를 뒤집어 「일본이 예부터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공식을 만들고, 백제왕들이 일본에서 파견한 속국왕인 것처럼 둔갑시킨 폭거의 중심에 조선총독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무령왕 붕(崩)’을 기록한 지석을 보자 기절초풍했던 일본 사학계는 그후 아예 무시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무대응인 한국 사학계는 또 뭣하는 사람들인가.
▲백제멸망 1400여년만에 재현된 부여 사비궁, 능산리 사찰에 있던 백제5층목탑이 처음 복원되었다.
중국 땅에 분국 백제 담로(擔魯)를 두어 송(宋) 양(梁)과 교류하고 왜(倭)를 직할 식민지로 지배했던 ‘해양왕국’ 전성기의 주역 무령왕! 그 벽돌무덤 양식은 양나라 것을 도입해 실용화 한 것이었다. 목관(木棺)은 왜에서 보낸 금송(金松), 당시 왜왕은 무령왕의 동생, 훗날 계체(繼體)천황이란 이름을 단다.
무령왕은 자신을 이어 왜왕이 된 동생에게 신임장으로 수여한 동거울에 ‘남제왕(男弟王)의 장수를 빌며 만들어 준다’고 친필로 새겼다. 이것을 일본은 백제왕이 천황에게 헌상한 것이라고 역사를 위조해 놓은 것. 속국왕의 헌상품이라면서 신사를 지어 모셔놓고 낡은 거울을 신성불가침 '신물(神物)'로 떠받들고 있는 것이 일본이다.
무령 자신도 16세때 왜왕이 되었다. 백제대국 '천왕(天王)'이 되기 전 식민지 경영 수업 코스, 그때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절치부심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아버지는 개로왕? 아니면 삼촌 곤지? 섬에서 태어난 그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인가? 이를 가려줄 증언은 무령이 왜왕 ‘무(武)’일때 양나라에 보낸 상표문에 나와 있다.
“부모 형제를 죽인 고구려에 원수를 갚도록 도와주십시오.”
고구려 장수왕 침략군에 살육당한 한성백제 마지막 개로왕의 원수를 갚겠으니 군사원조를 해달라는 말. 신라 김춘추보다 200년 앞선 국제외교술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