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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년의 사랑 그리고 행복 원문보기 글쓴이: 왕언냐
11/29 [수]
2001 - '비틀스'의 멤버 해리슨(Harrison, George, 1943~2001) 세상 떠남
영원한 장발 청년. 세상을 뒤흔들었던 영국 출신의 팝 그룹 '비틀스' 멤버 조지 해리슨이 2001년 11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친구 집에서 사망했다. 영원히 청년으로 기억될 그의 나이는 58세. 후두암 투병 끝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모국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큰 슬픔을 표했고, 앙골라·아일랜드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더블린을 방문 중인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도 애도를 표했다.
1943년 영국 리버풀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난 해리슨은 1958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첫 그룹인 '더 쿼리 멘'에 합류하면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960년 '비틀스' 창립 멤버가 됐다. 그는 개성강한 '비틀스' 멤버 가운데서도 가장 선량한 인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Something' 'Here Comes The Sun' 등 걸작을 남겼다. /조선
반달가슴곰이 지리산에서 방송사 카메라에 촬영됐다. 국내에서 야생 반달곰의 실체가 확인된 것은 1983년 설악산에서 총에 맞은 상태로 발견된 뒤 처음이다.
진주MBC는 이날 "지리산에 설치한 무인 카메라에 야생으로 추정되는 반달가슴곰이 샘에서 물을 마시는 장면이 3차례에 걸쳐 약 30초간 촬영됐다"고 밝혔다. 진주MBC는 "지리산에서 곰을 봤다는 주민 제보를 받고 1998년부터 센서를 장착한 무인 디지털 카메라를 등산로에서 떨어진 숲속에 설치, 촬영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국립환경연구원은 "머리와 몸통, 행동거지로 미뤄 10~15살쯤 된 야생 반달가슴곰으로 추정된다"며 "몸 길이는 1m50cm, 체중은 180kg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밀렵꾼들로부터 반달곰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단속에 나섰다. /조선
2000 - 경주 역사유적 지구와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경주 역사유적 지구와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2000년 11월 29일 호주 케언즈에서 총회를 열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는 경주유적이 신라시대 천년의 문화적 업적과 불교 및 세속건축의 발달을 보여주는 뛰어난 유적이며, 고인돌 유적은 기원전 2-3천년 전의 장례및 의식유적으로 선사시대 기술과 사회발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했다. 이에따라 우리나라는 1995년 불국사-석굴암,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1997년 수원화성, 창덕궁에 이어 모두 7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이번에 등록된 경주 역사유적지구는 경주 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농원지구, 황룡사지구, 산성지구로 칠불암 마애석불과 첨성대, 분황사석탑, 황룡사지, 명활산성 등의 문화재가 위치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은 세계문화유산위원회가 인류전체를 위해 보호돼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일람표에 등록하는 문화재로 2000년 11월 현재 118개국 630건이 등재돼 있다. /조선
1995 - 전두환 전대통령, 합천서 검찰수사관에 의해 구속 집행. 안양교도소 수감
1989 - 루마니아의 체조요정 코마네치(Comaneci, Nadia) 헝가리로 망명
1961년 11월 12일 루마니아 게오르게 데지에서 태어나 1967년 벨라 카롤리 코치에게 발탁되어 체조를 시작하였다. 1976년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제21회 올림픽경기대회의 이단평행봉에서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기록하였고, 이 대회에서 7차례나 10점 연기를 펼치며 개인종합과 평균대, 이단평행봉 등 3관왕에 올랐고 단체전에서 은메달, 마루운동에서 동메달 등 5개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경기대회에서는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개인종합 준우승을 하였다. 이로써 코마네치는 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 3개의 은메달, 1개의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코마네치의 연기는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과감하면서도 우아하여 인간 육체 표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4년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에서 2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스포츠 광장에서 은퇴하였으며, 그해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경기대회에는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한 가운데 루마니아 코치로 참석하였다. 1989년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1993년에는 1988년의 올가 코르부트에 이어 두번째로 체조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였다. 1996년 미국 체조선수 출신인 버트 코너와 결혼하여 현재 오클라호마주 노먼에서 남편과 함께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모델과 자선활동을 하고 있다.
1989 - 라지브 간디 인도총리 사임
5년동안 인도내각을 이끌어온 라지브 간디총리!
1989년 오늘
며칠전 실시된 의회선거에서의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 사임을 발표한다.
이로써 40년에 가까운 네루-간디 왕조의 지배가 막을 내리게 됐다.
라지브 간디는 1989년 10월 모친인 인디라간디 총리가 암살되자마자 총리 자리에 오른 뒤 국민회의당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일주일전 실시된 의원선거에서 과반수 의석확보에 실패했다.
라지브 간디는 전통을 무시한채 너무 빠르게 개혁만을 추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라지브 간디는 1991년 6월 타밀민족주의자의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YTN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KAL) 858편 보잉 707기가 공중폭발했다. 11월 28일 밤 11시 27분(현지시간)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편은 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인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그러나 이 비행기가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방콕에 도착하지 않자 당국에서는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사고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근로자가 대부분인 한국인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사고대책본부는 기체의 잔해를 발견했다는 타이 내무부의 발표에 따라 30일 오후 858편의 추락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사고 항공기에 위조 여권을 지니고 탑승했다가 도중에 내린 '마유미'가 잡히면서 수사는 급진전했다. 그의 본명은 김현희(당시 26세)로서 김정일의 친필 공작령을 받고 대한항공 858편 기내 좌석 선반에 라이터와 술병으로 위장한 폭발물을 놓고 내려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했다고 자백했다. 이 사건은 결국 김정일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브리태니커
수원성곽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長安區)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석전교축(石塼交築) 읍성이다. 둘레 5520m. 서쪽으로 팔달산(八達山)을 끼고 동쪽으로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한 평산성(平山城)으로서 창룡문(蒼龍門)·화서문(華西門)·팔달문(八達門)·장안문(長安門)의 사대문을 비롯하여 암문(暗門)·수문(水門)·적대(敵臺)·공심돈(空心墩)·포루(砲樓)·장대(將臺)·각루(角樓)·포사 등의 각종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정조의 명에 의해 1794년 2월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의 주도로 성역(城役)에 착수해 1796년 9월 완공하였다. 축조방법은 전통적인 축성경험을 바탕으로, 유형원(柳馨遠)과 정약용(丁若鏞) 등의 과학적 지식과 중국 성제의 장점을 활용하였다. 종래의 조선시대 성곽이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하고 있는 반면, 화성은 산성을 설치하지 않고 읍성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1975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실시한 복원공사로 원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1996년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작업으로 <수원성곽>에서 <화성>으로 옛이름을 되찾았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등록되었다. 사적 제3호.
1968년 11월 29일 오후 6시 서울시영 389호 대형 '보기'전차가 왕십리를 떠났다. 변두리 노인네들과 채소, 과일을 잔뜩 머리에 인 아낙네들이 손님의 대부분이었다. 이 차는 70년을 이어온 서울전차의 종차(終車)였다.
서울의 전차는 고종황제 때인 1898년 1월 18일 미국인 믈브란씨와 보스트 웍씨가 한미합작으로 총75만원을 투자,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발족하면서 시작됐다.
그 해 12월 25일부터 40인승 시민용전차 8대와 황실 귀빈차 1대로 청량리~서대문간에 첫 운행을 했다. 오전8시부터 오후6시까지 '땡땡'거리며 운행한 전차는 어느 골목에서나 승객이 손만 들면 태워주었다. 물론 청량리까지 엽전 닷돈 등 구간에 따라 요금의 차등이 있었고 차장도 있었다. 전차는 개통순간부터 대인기였다. 그러나 전차는 해방 후 언제나 적자를 면치 못해 결국 이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조선
1954 - 이승만, 사사오입개헌 강행
1954년 11월 29일 집권당이던 자유당은 1표 차이로 부결되었던 개헌안을 사사오입이라는 기묘한 논리를 내세워 통과시켰다. 1954년 이승만의 자유당은 내각 책임제적 요소의 전면 삭제에 의한 순수 대통령 책임제, 초대 대통령 3선제한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며 이에 맞섰다. 이 개정안은 11월 27일 표결에 부쳐져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이틀 뒤 이른바 '사사오입'의 논리에 입각해 반올림을 한 결과 개헌안이 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이 개헌 파동으로 자유당의 소장파 의원 12명이 무더기로 탈당하는 한편, 민주국민당은 무소속 국회의원들을 규합하여 '호헌동지회'를 구성하고 민주당 창당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승만의 이같은 독재정치는 이후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을 거쳐 대통령직 사임과 해외 도피로 귀결되었다. /브리태니커
1948 - 유고슬라비아의 티토(Tito, Josip Broz) 수상, 독자적인 공산주의 노선 선언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독일 ·이탈리아 양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후에는 80만 명의 빨치산을 거느리고 그들과 싸웠으며,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서서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43년에는 해방전국위원회(임시정부) 의장에 취임하였고 원수(元帥)의 칭호를 받았다. 조국이 해방된 1945년부터는 수상과 국방상을 겸임하였고, 1953년에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48년 6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코민포름에서 제명되고 그의 정강(政綱)은 수정주의라는 낙인이 찍혔으나, 그는 독자적인 사회주의를 목표로 한 비동맹중립외교의 정책을 굳게 지켰다. 1969년에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974년 5월 연방의회에서 종신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적 ·종교적으로 복잡한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을 지키며 경제건설을 추진하였다.
1945 -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선포
1945년 3월 티토를 수반으로 하는 망명정부의 대표 3인을 포함하는 유고슬라비아민주주의연방 임시정부가 형성되어 국제적인 승인을 얻었다. 이해 11월 제헌의회의 선거가 실시되어 인민전선이 압도적인 지지를 획득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연방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선포되었으며, 국왕 페타르 2세(재위 1934~1945)의 모든 권한은 박탈되었다. 1948년 코민포름에서 축출되기까지, 유고슬라비아는 소련형 사회주의건설에 전념하였다. 축출당한 뒤 사회주의 이론을 밑바닥에서부터 재검토하는 가운데 노동자 자주관리형의 분권주의적인 사회주의가 탄생하였으며,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인 비동맹주의와 함께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두 기둥이 되었다.
1932 - 프랑스의 정치가 시라크(Chirac, Jacques Rene, 1932~ ) 태어남
1932년 11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1954년 파리의 정치학연구소 졸업 후 알제리 주둔군에서 복무한 뒤, 1959년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하였다. 1962∼1965년 G.퐁피두의 개인비서실장, 1967년 하원의원에 당선, 파리 시장을 지냈다. 1972∼1974년 농업장관 및 내무장관을 거쳐 1974년 후견인이던 대통령 퐁피두의 사망 후, V.지스카르 데스탱의 대통령 당선에 큰 공헌을 하고, 새 정부의 총리가 되어 1976년까지 역임하였다.
1976년 RPR(공화국연합당)이 창설되자 총재에 취임하였는데, 1977년 다시 파리 시장으로 있다가 같은 해에 상원 외교위원장이 되었다. 1981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낙선되었으나, 1986년 총선에서는 RPR이 보수 제1당이 되어, 파리 시장 재임 중 미테랑 정부의 총리에 취임하였다. 1988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미테랑에게 패배, 총리에서 물러났으나, 1995년 5월 L.조스팽과 E.발라뒤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르펜을 누르고 당선되어 프랑수아 미테랑에 이어 두번째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핵실험, 사회보장제 개혁 강행 등 강국화를 추진하고 있다.
1929 - 미국의 해군소장, 탐험가 버드, 최초로 남극 횡단 비행 성공
버지니아 군사연구소와 버지니아대학교 등에 다니고, 1912년 해군대학을 졸업하여 1918년 해군장교가 되었다. 1926년 비행기로 북극 상공에 처음으로 도달하여, 대통령 쿨리지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1927년 6월 29일∼7월 1일 뉴욕에서 프랑스까지의 대서양 횡단비행을 감행하여, 42시간의 기록으로 성공하였다. 1928년 남극대륙에 도달하고, 로스해(海)의 고래만(灣) 언저리에 기지(基地) ‘작은 미국(Little America)’를 설치하여 거기서부터 극점 왕복비행에 성공하였으며, 소령에서 소장으로 특별진급하였다. 1929년 11월 29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남극 극점 상공에 비행기로 도달하였다. 그뒤에도 몇 차례 남극탐험을 하여 기상학·극광(오로라) 연구와 빙하·산맥·광물자원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모아, 남극탐험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6년 국제지구관측년(國際地球觀測年)에는 미국 관측대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1925 -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 태어남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42년 배화여고(培花女高)를 졸업, 옥천여중 교사를 지냈다. 1950년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하였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각종 사회 ·육영사업을 벌였다. 자선봉사단체인 양지회(陽地會) 결성, 전국 9개소에 여성회관 건립, 미망인회(未亡人會) 자활공장 설치 등을 하였으며, 헌혈운동 등 적십자사 활동에도 솔선 ·참여하였다.
육영사업 일환으로 어린이대공원 ·어린이회관 건립을 주도하고, 소년소녀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였다.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보도를 위한 정수직업훈련원(正修職業訓練院)을 설치하고, 서울대학교에 기숙사 정영사(正英舍)를 설치하였다.
양로 ·구호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여, 월요경로회(月曜敬老會)를 만들어 노인 위로연을 개최하고, 나환자촌에 자활사업지원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중앙극장 단상에서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되어 죽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집행,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박정희와의 사이에 지만(志晩) ·근혜(槿惠) ·근영(槿映) 등 1남 2녀를 두었다.
1924 - 이탈리아의 작곡가 푸치니(Puccini, Giacomo, 1858~1924) 세상 떠남
루카 출생. 아버지는 음악학교 교사로 종교음악 작곡가이기도 하였으나 어려서 사별하였다. 일찍이 앙제로니에게 음악을 배우고 10세 때 루카의 어느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있으면서 악재를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G.베르디의 《아이다 Aida》를 듣고나서부터 작곡가가 될 것을 결심, 1880년에 마르게리타여왕의 장학금과 그 밖의 후원으로 밀라노의 음악학교에 입학, 폰키엘리의 지도를 받았다. 재학 중 스승의 권유로 처녀작 《빌리 Le Villi》를 어느 현상에 내어 실패하였으나 리코르디출판사의 후원으로 상연되어(1884) 성공을 거두었다. 그후 잇달아 오페라를 발표하고 1893년 토리노에서 상연된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896년 토스카니니 지휘로 《라보엠 La Boheme》을 상연, 성공을 거두고 1900년에는 로마에서 《토스카 Tosca》가, 1904년에는 밀라노에서 《나비부인 Madame Butterfly》이 초연되어 찬사를 받았다. 1907년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그 곳에서 제재를 얻은 《서부의 처녀 La Fanciulla, del West》가 1910년 뉴욕에서 초연되고 1918년에는 각각 내용이 전혀 다른 3부작 《외투 Il Tabarro》 《수도녀(修道女) 안젤리카 Suar Angelica》 《지안니 스키키 Gianni Schicchi》가 역시 뉴욕에서 상연되었다. 그후 《투란도트 Turandot》의 제작에 착수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투란도트》는 알파노에 의하여 완결되어 1926년 밀라노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상연, 대성공을 거두었다.
푸치니는 그 자신의 말대로 "극장을 위하여 작곡할 것을 신에게서 명령받은"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은 유려하고도 애절한 정에 넘치는 선율, 극장의 요청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 자신의 양식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호소력이 큰 대본의 선택 등에 의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는 여성 등장인물의 묘사에 뛰어나, 미미·토스카·나비부인·안젤리카 등에게 주어진 선율은 청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 있다. 또한 《나비부인》 《투란도트》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국취미적인 제재를 즐겨 선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푸치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금자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베르디의 여러 작품의 뒤를 이어, 인간 목소리의 표현에 의한 황홀감을 추구하는 이탈리아의 전통을 딛고 서서 당시의 베리즈모(진실주의)의 물결에도 씻기고, 또한 만년에는 20세기의 새로운 수법도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이탈리아의 근대적인 오페라에의 길을 걸어간 작곡가였다. 작품에는 위에 든 오페라들 외에도 칸타타 《아리따운 이탈리아의 처녀들》, 관현악곡 《전주곡》, 그리고 실내악곡·가곡·오르간곡 등이 있다.
1898 - 에스파냐의 수필가, 소설가 가니베트(Ganivet, Angel, 1865~1898) 태어남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수필과 소설을 썼는데, 33세 때 투신 자살하였다. 근대 에스파냐 개혁운동의 선구자이며, 대표작 《에스파냐 정신고(精神考) Idealium espanol》(1897)는 다음 세대의 지식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 초인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 《불굴의 창조자 피오 시드의 업적 Los trabajos del infatigable creador Pio Cid》(1898)도 19세기 에스파냐 문학의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
1895 - 라이베리아의 정치가 터브먼(Tubman, William V. S., 1895~1971) 태어남
1877 -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Edison, Thomas Alva), 수동 축음기 발명
1839 -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소설가 안첸그루버(Anzengruber, Ludwig, 1839~1889) 태어남
1835 - 중국 청나라 함풍제(咸豊帝)의 황후 서태후(西太后, 1835~1908) 태어남
1832 - 미국의 소설가 올컷(Alcott, Louisa May, 1832~1888) 태어남
1825 - 프랑스의 신경병학자 샤르코(Charcot, Jean-Martin, 1825~1893) 태어남
1818 - 캐나다의 언론인, 정치가 브라운(Brown, George, 1818~1880) 태어남
1803 -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도플러(Doppler, Christian, 1803~1853) 태어남
1802 - 독일의 시인, 소설가 하우프( Hauff, Wilhelm, 1802~1827) 태어남
1797 - 이탈리아의 작곡가 도니체티(Donizetti, Gaetano, 1797~1848) 태어남
1781 - 베네수엘라 태생 칠레의 시인, 법학자, 문법학자 베요(Bello, Andres, 1781~1865) 태어남
1743 - 벨기에의 변호사 본크(Vonck, Jean-Francois, 1743~1792) 태어남
1394 - 조선 태조 2년 한양으로 천도 (음력 10월28일)
1895 - 라이베리아의 정치가 터브먼(Tubman, William V. S., 1895~1971) 태어남
1847년에 독립을 선포한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인 라이베리아의 제17대 대통령으로서 라이베리아 역사상 최장기간인 27년 동안 대통령직을 고수했다.
터브먼은 수많은 개혁과 사회정책을 실행했다.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에게 참정권과 재산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인구의 약 80%를 점유하고 있는 토착부족들이 모두 정부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국고수입의 절반 이상되는 재원을 전국적인 공립학교 체제 확립에 투자했다. 한편으로는 전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라이베리아 정부의 주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천연자원을 외국의 자본과 전문기술에 개방했으며,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아프리카 평화의 주창자이며 중재자로서 라이베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자 했다. ...
1877 -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Edison, Thomas Alva), 수동 축음기 발명
1868년에 전기 투표기록기(投票記錄機)를 발명하여 최초의 특허를 받았다. 이어서 다음해에는 주식상장표시기(株式上場表示機) 등을 발명하였고 그 발명으로 얻은 자금을 기반으로 뉴저지주의 뉴어크에 공장을 세웠다. 그는 1876년에 멘로파크로, 1887년에는 웨스트오렌지로 연구소를 옮겼다. 이들 실험소에서 1871년에 인자전신기(印字電信機), 1872년에 이중전신기, 1876년에 탄소전화기, 1877년에 축음기, 1879년에 백열전등, 1891년에 영화 촬영기·영사기, 1891~1900년에 자기선광법(磁氣選法),1900~1910년에 에디슨 축전기 등을 계속 발명했다.
1839 -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소설가 안첸그루버(Anzengruber, Ludwig, 1839~1889) 태어남
빈 출생. 처음에는 서점의 점원으로 일하였으나, 순회 극단에 배우로 가담한 후에는 극작가로 전향하였다. 1870년에 《키르히펠트의 목사 Der Pfarrer von kirchfeld》라는 희곡으로 문명(文名)을 얻어 문필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J.P.헤벨과 O.루트비히의 사실주의를 계승하고 후에 자연주의의 선구자가 된 민중적 작가로서 뛰어난 민중극과 농민극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위선 농부 Der Meineidbauer》(1872) 《제4의 계율 Das vierte Gebot》(1877) 등과 사실적인 장편소설 《슈테른슈타인 농장 Der Sternsteinhof》(1885)이 있다.
1835 - 중국 청나라 함풍제의 황후 서태후(西太后, 1835~1908) 태어남
함풍제(咸豊帝)의 사후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공친왕(恭親王)과 공모하여 쿠데타로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후(母后)로서 동태후(東太后: 함풍제의 황후로 慈安皇太后라고도 한다)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1875년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의 아들을 옹립,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1898년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에 접근, 신정을 실시[戊戌變法]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켰다. 의화단(義和團)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西安: 陝西省]으로 피신하였다.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베이징[北京]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 실업(實業), 교육의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배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청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
1832 - 미국의 소설가 올컷(Alcott, Louisa May, 1832~1888) 태어남
펜실베이니아주(州) 저먼타운 출생. 진보적인 교육자이며 사상가인 A.B.올컷의 딸로, 아버지의 진보적 실험 교육이 미처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아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처지에서 소녀시절에 여러 곳을 전전하며 보냈다. 처녀작 《꽃의 우화 Flower Fables》(1855)는 아버지의 친구 에머슨의 딸에게 들려준 동화였다고 한다. 10대부터 교사로, 남북전쟁 때는 간호사로 종군하는 등, 그러한 체험을 소재로 하여 서간집 《병원 스케치 Hospital Sketches》(1863)를 발표하였다.
또한 생활을 위하여 쓴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1868∼1869)이 유명해져서 소녀문학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8명의 사촌들》(1875) 《라일락 아래에서》(1878) 《조의 아이들 Jo’s Boys》(1886) 《조 아주머니의 잡동사니 가방 Aunt Jo’s Scrap Bag》(6권, 1872∼1882) 등을 차례로 냈다. 《작은 아씨들》로 대표되는 그녀의 작품에는 자유·박애·평등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 정신이 흐르고 섬세하게 그려진 일상성과 더불어 젊은 독자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다.
1825 - 프랑스의 신경병학자 샤르코(Charcot, Jean Martin, 1825~1893) 태어남
파리 출생. 1853년 파리대학을 졸업한 후, 1858년 파리 병원의 의사가 되었다. 1862년 사르페토리에르 병원으로 옮겨 만성질환 ·노인병 ·신경계통 질병에 관한 강의를 하다가, 1872년 파리대학 병리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1882년 샤르코를 위하여 신설한 사르페토리에르 병원의 신경병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했는데, 1874년에 간행한 《사르페토리에르 신경계통 질병 강의집》이 가장 유명하다. 그 가운데에서 척수매독의 병변상(病變像)을 밝혀 전격성 동통과 관절통을 기술하였고, 또한 척수매독성 진행성 근위축(筋萎縮)과 근위축성 측삭경화증(側索硬化症)을 감별하여 진전마비(振顫痲 )와 다발성 경화증을 구별하였다.
또한 히스테리에 대해서도 중요한 연구보고와 아울러 특히 간 ·신장 ·담관(膽管)의 질환에 대해서도 귀중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히스테리를 관념에 따른 심인성(心因性)에 의한다고 하여 최면술에 따라 연구하여 히스테리의 증상을 스티그마타(운동마비, 목구멍에 구슬이 있다는 느낌, 감각이 없어지는 증상 등)와 발작으로 구분하였다. 주요저서에는 《신경계 질환에 대한 강의 Le ons sur les maladies du systeme nerveux》(1873~1884)등이 있다.
1818 - 캐나다의 언론인, 정치가 브라운(Brown, George, 1818~1880) 태어남
캐나다에서 연방제를 실현하고 프랑스계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토론토에 있는 〈글로브 The Globe〉지의 발행인으로서, 그의 신문이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던 캐나다웨스트(어퍼캐나다, 지금의 온타리오 주)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837년 미국 뉴욕 시로 이주했다가 1843년 캐나다 토론토로 옮겨, 새로 결성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지지하는 〈배너 Banner〉라는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개혁을 지지하는 정치 주간지 〈글로브〉를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 주간지는 1853년에 일간지가 되었다. 1857년 무소속 자유주의자로 켄트 군에서 출마하여 캐나다 의회에 들어갔다. ...
1803 -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도플러(Doppler, Christian Johann, 1803~1853) 태어남
잘츠부르크 출생. 잘츠부르크 및 빈에서 배웠으며, 1823∼1833년 빈의 공업연구소 조수가 되었다. 1841년 프라하의 국립공업대학 수학교수, 1847년부터 셈니츠에서 광산국원(鑛山局員)이 되었고, 그곳 공업대학 수학 ·물리학 ·기계학 교수를 지냈다. 1850년 빈에 물리학연구소가 신설되자 연구소장이 되고, 동시에 빈대학 물리학 교수를 겸임하였으나, 1853년 폐결핵에 걸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사망하였다.
도플러의 초기 논문은 수학에 관한 것이었으나, 1842년 <이중성(二重星) 및 그 밖의 몇 개 항성의 착색광(着色光)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그 속에서 파동의 근원과 관측자의 상대운동(相對運動)이 가져오는 효과(도플러효과)의 존재를 지적하였다.
이 사실은 음향면에서는 얼마 후 C.H.D.보이스 발로트에 의하여 실험적으로 확인되었고, 빛에 관해서도 항성의 스펙트럼선(線)의 어긋남을 통하여 확인되어 천체물리학 진보에 공헌하였다. 그 밖에도 수차(收差) ·항성 ·색채론에 관한 연구와 망원경 ·광학거리계의 개량 등의 업적이 있다.
1802 - 독일의 시인, 소설가 하우프( Hauff, Wilhelm, 1802~1827) 태어남
슈투트가르트 출생. 튀빙겐대학에서 신학 ·철학을 공부하고 1824년에 졸업한 후, 어느 남작(男爵) 집의 가정교사를 하면서 작품 저술에 힘썼다. 슈바벤 시파(詩派)에 속하는 낭만주의 작가로, 당시에는 W.스콧을 본뜬 역사소설 《리히텐슈타인 Lichtenstein》(1827) 등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동화작가로 더 유명하다.
그의 작품 전체에 통하는 공상적 ·전기적 요소가 동화라는 형식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우프 동화집》의 원명(原名)은 《교양 있는 계층의 자녀를 위한 동화》이며, 《동화 연감(童話年鑑)》이란 책이름으로 3회에 걸쳐 발표된 《대상(隊商)》(1826)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와 그 노예들》(1827) 《슈페살트의 요리점》(1828)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1797 - 이탈리아의 작곡가 도니체티(Donizetti, Gaetano, 1797~1848) 태어남
베르가모 출생. 베르가모의 음악학교와 볼로냐의 음악원에서 공부하였으나, 그를 법률가로 키우려던 부친과의 불화로 군에 입대하여 1818년 군인 신분으로 발표한 《볼로냐의 엔리코》가 호평을 받아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출세작이 된 것은 1830년에 작곡한 《아나 볼레나》이며, 이 작품으로 그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35년 파리로 나가 오페라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히고 1840년 전후는 그의 창작력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으나, 1845년 두통에서 비롯된 신체 마비상태에 빠져, 회복하지 못한 채 고향 베르가모에서 사망하였다.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오페라부파에서 오페라세리아로의 전환기였으며, 그는 바로 이 전환점에 위치하는 작곡가였다. 따라서 그의 오페라는 오페라부파의 마지막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랑의 묘약》과 《연대(聯隊)의 아가씨》·《돈 파스콸레》로부터 《라메르무어의 루치아》·《파보리테》와 같은 오페라세리아의 걸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로시니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의 작품을 빼면, 유창하고 아름다운 선율과 적절한 극적 효과에 특징이 있으며, 이런 점은 빈약한 관현악법과 대본의 평범함을 보완해 준다.
1781 - 베네수엘라 태생 칠레의 시인, 법학자, 문법학자 베요(Bello, Andres, 1781~1865) 태어남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출생.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죽었다. 1810~1829년 런던에서 언어학 ·법률학을 배우는 한편 시를 썼다. 칠레 정부의 초청으로 칠레에 가서 1843년 산티아고대학을 창설하고 초대 학장이 되었다. 또 《칠레 민법전(民法典)》(1855)을 엮어, 칠레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지적(知的)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V.위고와 바이런의 시를 번역하였다. 그의 시는 18세기의 특징인 교훈적 ·계몽적인 것이 많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의 자연에 대한 애정을 그린 대표작 《열대지역의 농업에 바치는 노래 Silva a la agricultura de la zona torrida》(1826)는 고전주의를 기조로 하면서 로맨틱한 정취에 넘치는 서정시이다. 또 언어학자로서도 명저를 남겼는데, 《카스티야어 문법》(1847)은 에스파냐어의 고전적인 문법서이다.
1743 - 벨기에의 변호사 본크(Vonck, Jean-Francois, 1743~1792) 태어남
1789년 벨기에인들이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반대해 일으킨 반란에서 민주파인 본키스트들을 이끌었다. 브뤼셀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1781년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의 광범위한 행정·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완전한 대의제 정부 형태를 원했으며 반면에 앙리 반 데르 노트가 이끄는 또다른 벨기에 혁명 전위 그룹인 국가통제주의자들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통치체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본크는 비밀결사(Pro Aris et Focis)를 조직하여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어 리에주에 근거를 두고 오스트리아의 퇴역 장교인 장 앙드레 반 데르 메르스가 지휘를 맡은 의용군을 조직했다. 오스트리아의 침입 이후에 1789년 이 군대는 브레다에서 반 데르 노트 진영에 가담했다 ...
1394 - 조선 태조2년 한양으로 천도 (음력 10월28일)
1392년 7월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왕조의 면목과 인심을 일신할 목적으로 승려인 무학국사와 하륜 등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1393년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종묘·사직·궁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1395년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고 경복궁을 준공하였으며, 1396년 4월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같은 해 9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첫댓글 명사반열에 끼어 볼랬더니..쩌어기 대머리 땜에..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