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삶도,천사도,권세도,현재의 것도,미래의 것도,
권능도,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8,38-39).
Ⅲ.자녀다운 신뢰
2734자녀다운 신뢰는 시련 속에서 드러난다.특별한 어려움은 자신을 위한 청원 기도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전구하는 청원 기도에 관련된다.자신의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여긴 나머지,기도를 그만두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우리는 왜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효과 있는’기도가 되는가?
왜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가?
2735우리는 먼저 한 가지 뚜렷한 사실 앞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보통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하거나 또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때,우리의 기도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는지를 알고자 진정 애쓰지 않는다.반면에,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기도의 결과를 보아야겠다고 주장한다.도대체 우리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여 그분께 기도하는가?우리는 하느님을 우리가 이용할 만한 수단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이해하는가?
2736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른다.”(로마8,26)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가?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의 청원을 기다리고 계신다.그것은,자유로워야만 하느님의 품위 있는 자녀들이 되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확실하게 알려면 자유의 성령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2737“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만일 우리가“절개 없는자들”로서 갈라진 마음으로 청한다면,우리의 행복을 원하시고 우리가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수가 없다.“‘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야고4,5)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질투를 느끼신다.”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표징이다.그분의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면,우리의 청원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어떻게 효과 있는 기도가 되는가?
2738구원 경륜 안에서 기도에 대한 계시는,신앙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업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하느님께서 하신 최대의 업적, 곧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부활은 우리의 자녀다운 신뢰를 불러일으킨다.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을 위한 그 사랑의 계획에 협력하는 것이다.
2739바오로 사도의 이 신뢰는 대담한 것으로서,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기도에,그리고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성부의 성실하신 사랑에 근거를 둔 것이다.기도하는 마음의 변화가 바로 우리의 청원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이다.
2740예수님의 기도 덕분에,그리스도인 하는 기도는 유효한 청원이 된다.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시며,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성자의 마음도 성부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바라시는데,양자가 된 자녀들의 마음이 어떻게 선물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에 더 집착할 수 있겠는가?
2741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위하여,우리를 대신하여,우리에게 이롭도록 기도하신다.우리의 모든 청원은 한 번에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부르짖음 속에 모어져,그분의 부활로써 성부께 받아들여졌다.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성부 곁에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전구하신다.만일 우리의 기도가 자녀다운 신뢰와 대담성을 지녀 예수님의 기도와 튼튼히 결합된다면,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을 얻으며,이러저러한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곧 모든 선물을 지니신 성령 바로 그분을 받게 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밣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
의인의 불행이 많을지리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하시리라
(시편34,19-20).
주님이 도와주시는 방식은‘가까이 계심’이다(시편145,18).“마음이 부서진 이들”(147,3;참조:51,19;109;36,26)은 의인들이고 가난한 자들이다.부서진 마음은 “돌로 된 마음”(에제11,19;36,26)에 반대된다.‘마음이 부서진 이들’은 생명의 중심인 마음(심장)에 타격을 받은 사람들,자신에게 깊이 절망한 사람들이다.이렇게 삶과 자신에 대해 상실감을 갖는 것은 극도의 가난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과 특별히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그들은 자신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느님이 자신들을 받아줄 것이라고 확신한다.마음이 상하고 정신적으로 깨졌던 사람만이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도우신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바이저)예수님은“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라고 말씀하셨다.
10절에서는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없다’고 했으나 여기서는‘의인의 불행이 많다’고 한다.의인이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만족하게 여길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의인에게도 어려움이 많다.의인이 위기와 시련을 모면하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은 의인이 아니다(히에로니무스).사실 의인이 악인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카시오도루스에 따르면,“악인들도 고통을 당할 수 있지만 의인들은 자기 자신의 고난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자선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난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의인은 악인과는 다른 차원에서 고통을 받는다.왜냐하면 의인의 삶과 길은 다른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다(지혜2,15).그는 이 세상에서 안에 하느님의 의식 意識을 가져온다(본회퍼).그래서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고통받으시듯이 그도 고통에 찬 삶을 살아간다.그런데 하느님의 구원은 의인의 고통에서 나타난다.의인은 고통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이것이 그의 구원이다(본회퍼).
시편 34편의 전체적인 의미:시편 34편의 시인은 곤경에 처하여 두려움에 떨면서 오직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다고 고백한다(5.5절).그러자 하느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의 천사를 보내주시어 그를 구출하셨다(8절).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선하심을 맛보도록 초대한다(9절).이 시인에게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다.그레서 다른 이들에게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맛보도록 초대하는 것이다.나아가 그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체험한 이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9절).
하느미은 약한 자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그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며,악인들이 멸망하게 하신다.또한 시인은 주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친다(12절).주님을 경외함이 삶의 기초이며,삶의 기쁨과 행복과 장수의 비결이다.그러나 주님을 경외한다고 해서 언제나 인생이 편안하고 고통을 맛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주님을 경외하는 의인에게도 인생의 시련이 따른다.고통 없이 불행을 모르고 사는 편안한 인생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그렇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 그분을 찾고 그분께 부르짖으면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고 행복이다.복은 자신이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다.그러므로 하느님만이 우리가 찾아야 할 피신처다.특히 이 시편은 의인이 많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느님만이 그를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20절).시인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선하시고 우리의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에도 함께해 주시는 분이기에 감사드리도록 이끈다.감사는 행복의 지름길이다.이 시편에서는 특히 곤경 중에 있는 의인들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이 주님의 천사를 보내시어 그들을 구출하신다.신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이 예수님을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세상으로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셨다.오늘날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로마8,26)주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1-41편/전봉순著/바오로딸)
제6장 인간 노동
1.사회 교리
가톨릭교회의 사회 교리의 근원은 성경에 있다.처음부터 사회 문제는 교회의 가르침에 들어 있었다.교회는 시대마다 필요에 따라 사회 윤리를 다루었는데,이런 전통 유산은 ‘새로운 사태’를 시작으로 하여 현대 교황들의 사회 문제에 관한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상속되고 발전되었다.이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은 사회 문제 전체에 관건이 된다.10세기 가톨릭교회는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면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노동자 보호 조치들을 마련하고 실천을 장려하였다.이렇게 헌신한 덕분으로 오늘 우리는 다양한 혜텍을 누리고 있다.노동자의 단결권과 그 결과로 생긴 노동조합,최저 인금 제도,사회 보장 제도,연근 제도,본건과 안전에 관한 규정 따위가 그 예이다.
레오 13세 교황은 경제 문제가 단순히 사회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윤리 차원의 문제이기도 함을 꿰뚫어 본다.생산력이 향상되어 비록 경제 여건들이 개선되기는 하였지만 노동자들은 그러한 혜택에 참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올바른 신앙심이나 윤리 기준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공산주의 사상이 팽배해서 많은 신자가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교회를 떠났고 또 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 긴장하고 갈등을 심하게 겪고 있었다.이에 교황은,교회가 급증하는 임금 노동자들의 관심을 대변하고 이웃으로서 그들의 짐을 덜어 주고 일허버린 그들의 신심과 윤리 의식을 회복시키려는 의지를 사회 교리를 방편으로 삼아 확립한다.
노동 문제를 중점으로 다루는 대표 회칙으로 ‘새로운 사태’(1891)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쓴‘노동하는 인간’(1981)을 꼽을 수 있다.이 두 사회 회칙은 비록 90년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한 가지 뚜렸한 공통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신학으로 성찰하는 추상의 세계와 노동 현실의 정의라는 실제 세계 사이,다시 말하면 계시의 진리와 이성의 잔리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 쏠리거나 치우치지 않고 이 둘을 다 같이 토대로 하고 고르게 고려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다.현실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여 하느님의 뜻에 합치하도록 만듦으로써 계시의 진리를 이성의 진리로 실행하는 지름길을 두 교황은 터득하여 마련하고 입증하였다.두 교황은 노동자의 정의를 확립하는 첫걸음이 취업과 고용 조건을 결정하는 노동 시장이나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실제로 직면하는 조건 들을 자세하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나아가 직장마다 다양하게 적용되는 노동 조건과 정의 기준은 그 신축성에 따라 모든 일터에서 적정 임금이나 작업 시간으로 수용하는 실제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권고한다.(가톨릭 사회 교리 주제편/85-87쪽 발췌)
그대를 골목 끝 어둠속으로 보내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의롭지 못한만큼을 걷다가
기쁘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울다가
슬프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취하여
흔들거리며 가는 김포행 막차에는
손님이 없습니다
멀리 비행장 수은등만이
벌판 바람을 몰고와
이렇게 얘기합니다
먼 훗날 아직도
그대 진정 사람이 그리웁거든
어둠 속 벌판을 달리는
김포행 막차의 운전수 양반
흔들리는 뒷모습을 생각하라고
(김포행 막차/박철)
늘 행복하고
건강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