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의 무언가를 빼앗거나 참주를 죽이는 것을 도덕적 선이라고 할 수 없으며, 쾌락은 유익함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다.
구성
이 책은 키케로가 자신의 아들에게 편지처럼 쓴 것으로 스토아 학파의 윤리 사상이 잘 보여진다. 의무란 현대적인 권리와 의무도 포함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 또는 인간이 참되게 사는 길을 뜻한다. 따라서 이 책은 이런 윤리적 실천 강령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 중 3권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에서 키케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참주를 죽이거나 쓸모 없는 자의 무언가를 빼앗아도 된다고 말하였다. 또 끝부분에서는 모든 쾌락은 도덕적 선에 반하며 쾌락에 실제로 유익함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해 반박해 보고자 한다.
의견
도덕적으로 선한 것에 대해 키케로는 네 가지에서 연유한다고 하였다. 먼저 지식탐구로서 진리에 대한 통찰과 이해, 그리고 정의 즉 공동체의 사회적 유대관계, 용기 즉 꿋꿋한 불굴의 정신, 그리고 마지막 인내로 자제하는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키케로는 위의 구분에 대해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가 그리고 어떤 것이 유익한 것인가, 또한 두 개의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이 제시되었을 때 어느 것이 더 선하고 명예로운지, 그리고 두 개의 유익한 것이 제시되었을 때 어느 것이 더 유익한 것인지를 판단에 포함하였다. 따라서 의무를 설정함에 있어서 종종 이들 네 가지 본질 자체에서도 상호 비교될 필요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같은 분류의 근본은 네 가지 모두 공공을 위해 사용된다는데 있다. 키케로는 이러한 공공성이 인간 공동체와 사회의 자연적 원리임을 강조한다.
키케로의 <의무론> 3권에서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무 쓸모없는 자에게서 무언가 빼앗는다면 그의 행위는 비인간적이요, 자연법에 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케로는 만일 그가 살아남음으로써 국가와 인간 사회에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고 또 그 목적을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것이 자연에 반하는 것이고, 그것은 불의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는 종종 대체로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으레 간주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며 이런 예를 든다. 사람을 죽이는 것, 더군다나 친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한 죄악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친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참주를 살해했다면, 그는 자신을 악하다고 생각하겠는가? 진실로 모든 훌륭한 행위 가운데 그것이(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살해) 가장 고귀한 행위라고 판단하는 로마인들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키케로는 참주와 유대감이 전혀 없고 오직 극도의 증오감만 있을 뿐이면 그를 죽이는 것이 자연에 반하지 않는 것이며 도덕적인 선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선은 유익함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유해하고 불경한 종류의 인간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키케로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에 반하는 개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도 도덕적 선이라는 것이다. 공공성이 없이 자신의 사익을 위해 욕심 부리는 바르지 못한 참주라 하더라도 그를 죽이는 살인 행위는 옳지 않으며 도덕적 선이라고 할 수 없다.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사람을 없애는 것도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공공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그것을 빼앗김으로써 그가 죽는다 할지라도.) 또한 정당하다고 키케로는 말한다. 한 사람의 생명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공공의 이익이라는 키케로의 생각에 나는 반기를 들 수 밖에 없다. 그가 아무리 쓸모 없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더 쓸모 있는 사람을 위해 그것을 빼앗는 것은 절대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쓸모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국가와 인간 사회에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인지의 구분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하는 것인가. 한 개인의 생명은 그 사람의 전부이다. 생명을 죽이는 행위가 결코 선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설사 다수가 이익을 본다 할지라도 생명은 가장 존엄한 것이기에 그것을 없애는 것이 정당하고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키케로는 유익함과 도덕적 선은 절대로 상충될 수 없다고 보았다.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무엇이든 유익한 것이고,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은 것은 유익한 것이 아니다. 즉 도덕적으로 선한 것, 그것은 유일한 선, 아니면 최고선이다. 그런데 선한 것은 유익하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유익하다. 그 이유는 유익함과 도덕적 선에 대한 기준은 같고, 같은 사물 속에 유익함과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 공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쾌락은 도덕적 선에 반한다. 쾌락이 유익함의 모습을 지닌다고 주장될지 모르지만, 쾌락과 도덕적 선 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쾌락은 실제로 유익함이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정말 쾌락에 유익함이란 하나도 없는 것일까? 쾌락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물질적 쾌락이나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쾌락이 있다. 지나친 식욕이나 지나친 성욕처럼 고통을 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도 있다. 무언가를 알게 됨으로써, 지식을 얻음으로써 얻는 지적 만족 등과 같은 정신적 쾌락도 있다. 이런 것들에도 유익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정신적인 쾌락에는 고통도 없고 이를 얻음으로써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는 보다 더 나은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여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것은 분명 나 자신에게도 나아가 사회를 위해서도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