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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연설 5
이제는 군주들과 궁정 귀족들에 관해 몇 가지 언급하겠습니다. 이들은 타고난 혈통에 어울린다 싶게 탁 터놓고 솔직 담백하게 나 우신을 숭배합니다. 콩알 반쪽만큼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의 삶을 무엇보다 시답지 못한 것으로 기피할 것입니다. 군주의 자리에 않는 것으로 인해 어깨에 엄청나게 커다란 짐을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배신과 부친 살해를 저지르면서까지 권력을 얻으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주의 자리란 곧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함이며, 국가의 공익 이외에는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음이며, 법률의 제정자이며 실행자로서 법률에서 손톱만치도 벗어나지 않음이여, 법률의 제정자이며 실행자로서 법률에서 손톱만치도 벗어나지 않음이며, 모든 공직자들과 행정관들을 청렴결백하게끔 이뜰어 감이며, 행운의 별처럼 도덕적 탁월함으로 인민에게 커다란 안녕을 가져다줄 수도 있고 불운의 행성처럼 심각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는 자로서만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자리이며, 필부의 과오처럼 그의 잘못을 장차 아무도 모르게 깊이 숨길 수 없는 자리이며, 아주 조금이나마 정직함을 잃으면 그 결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역병을 초래하는 자리이며, 군주의 운명에 동반하는 많은 것들이 그를 정의로부터 끌어내릴 것이기 때문에 설령 속임수에 의해서라도 쾌락과 방종과 아첨과 사치 등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고 더욱 염려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반역과 원한과 전쟁과 폭력은 말고라도 제아무리 사소한 잘못일지라도 죗값을 치르게 하시며 행사한 권력만큼 이를 더욱 엄중히 따져 물으실 왕 중 왕을 항상 두려워해야 할 자리가 군주의 자리입니까. 내 말하노니, 이런 것들과 이런 종류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물론 이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다면 말이지만 - 군주 된 자는 결코 잠과 식사를 즐겁고 유쾌하게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군주들은 나 우신의 도움을 받아 모든 근심 걱정을 신들에게 맡겨 두고 염려와 고민을 치워 둔 채, 영혼에 불쾌감이 들지 않도록 듣기 좋은 말만을 하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사냥하고, 명마를 사육하고, 행정과 군인 요직을 판매하고,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의 금고를 채울 새로운 방법을 매일매일 고안하고, 제아무리 불공정한 일일지라도 명목을 바꾸어 공정하게 포장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군주의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백성들의 마음을 제 편으로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아첨하는 데도 힘을 기울입니다. 여러분, 한번 그려 보기 바랍니다. 법률적 지식은 전무하고,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흡사 적대자이고,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고, 쾌락에 흠뻑 젖어 학문과 자유와 진리를 혐오하고, 국가의 안녕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모든 것을 자신의 욕망과 편리에 따라 측정하는 인간들을 말입니다. 더불어 이들이, 모든 덕목을 하나로 묶어 상징하는 황금 목걸이를 걸고 있으며, 모든 영웅적 용기에 있어 어느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음을 뜻하는 진귀한 보석 왕관을 쓰고 있으며, 정의와 어느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정을 상징하는 왕홀을 쥐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국가에 대한 극진한 헌신을 뜻하는 자줏빛 용포를 입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오늘날 군주들이 이런 장식물들에 비추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본다면, 내 생각에 이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행여 익살스러운 해설자가 나타나 이런 모든 비극적 의복을 조롱하지 않을까 염려할 것입니다.
그럼 궁정 귀족들은 어떻습니까? 이들 대부분은 더할 수 없을 만큼 알랑거리며 비굴하고 어리석고 천박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모든 일에 있어 제일 앞서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한 가지 겸손을 보이며 양보하는 것이 있는바, 금붙이며 보석들이며 자줏빛 관복 등 덕과 지혜를 상징하는 장신구들로 몸을 휘감은 반면 정작 덕과 지혜의 연마 자체는 남들에게 양보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군주를 ‘주인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위가 주어졌음에, 군주에게 몇 마디 인사를 건넬 수 있음에, 군주를 부르며 ‘근엄하시고 존엄하시고 위대하신’ 등의 굉장한 호칭을 줄줄이 엮어 넣을 줄 앎에,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함에, 이런 아부를 멋들어지게 해냄에 즐거워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궁정 귀족 된 자들이 갖추어야 할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이들이 진정한 파이아케스 사람들 혹은 페넬로페의 청혼자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나보다 메아리의 여신이 더 잘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들은 벌건 대낮까지 잠을 자는데, 사제들을 고용하여 침대 옆에 대기시켜 놓았다가 침대에 누운 채로 재빠르게 예배를 마치고 나서 곧 조반을 먹는데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 점심 식사가 이어집니다. 그러고는 주사위 놀이, 장기 놀이, 점치기, 어릿광대, 익살꾼, 매춘부, 색정 희롱, 음담패설 등이 이어집니다. 그사이 한두 번의 간식이 있습니다. 다시 이어 저녁 식사, 그리고 술잔치가 유피테르에게 맹세코 한 판 이상 벌어집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이런 삶에 물리지도 않는지 몇 시간, 몇 날, 몇 달, 몇 년, 몇 백년이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나 우신조차도 때로 이들이 허풍 허세를 칠 때면 역겨움을 느낄 정도인바, 귀족 여인들은 하나같이 모두 치맛자락을 남들보다 길게 늘어뜨릴수록 더욱 신적으로 보인다고 믿는가 하면, 귀족 사내들은 남들보다 그들이 모시는 유피테르와 가까운 사이로 보일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팔꿈치로 밀쳐 내며,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남들보다 무거울수록 더욱 스스로 대견해합니다. 그래 봐야 결국 돈 자랑에 힘자랑밖에 안 되는데도 말입니다.
궁정 귀족들의 모습에 열심으로 도전하는 혹은 거의 능가하는 자들로 교황들과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외관을 가가이 자세히 살펴볼 것 같으면 이렇습니다. 줄무늬 장식이 있고 눈처럼 흰 것이 인상적인 복장은 한 점의 과오가 없는 삶을 의미하며, 쌍으로 모자 뿔을 세우고 그 꼭지에 매듭 하나를 매어 둔 주교관은 이를테면 구약과 신약에 대한 공히 절대적인 지식을 상징하며, 손을 두루 감싸고 있는 주교 장갑은 인간 세속 어떤 일에도 손대지 않으며 오로지 성사만을 주관하는 정결함을 나타내며, 지팡이는 그들에게 맡겨진 양 떼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며 깨어 있음을 가리키며, 앞에 내세운 십자가는 분명코 모든 인간적 욕망을 이겨 냇음을 웅변합니다. 만약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의 복장과 기구가 갖는 이런 의미들을 음미해 보았다면, 내 말하노니, 그의 삶은 온통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은 스스로의 만족에만 매달려 매사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나머지 모든 과업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혹은 거느린 수사들에게 혹은 소위 보좌 사제들에게 맡겨 둔 상태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호칭 가운데 ‘주교’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하지 못하며, 주교란 수고하고 돌보고 간수하는 자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 관하여 그들은 ‘주교직’을 아주 정확히 수행하는바, ‘눈먼 파수를 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추기경들도 자신들이 사도들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자신들에게 그들의 선구자이신 사도들과 동일한 것이 요구되며, 자신들이 영적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다만 관리자로서 장차 이에 관해 엄정한 감사를 받을 것임을 고려하였다면, 그렇게 차려입고 잠시나마 심사숙고하였다면, 다음과 같이 물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눈처럼 흰 복장은 무엇을 의미하지? 지극하고 숭고한 결백함을 아닐까? 안에 입은 자줏빛 주교복은 무엇을 의미하지? 하나님을 향한 불꽃같은 사랑은 아닐까? 밖에 걸친 풍성하게 주름 잡혀 흘러내려 존귀하신 주교를 태운 노새 전체를 다덮고도 남을 만큼 품이 넓은 외투는, 아니면 어점 낙타 한 마리쯤은 충분히 덮고도 남을 만큼 큰 외투는 어떤가? 가르치며, 북돋으며, 위로하며, 야단치며, 훈계하며, 전쟁을 중단시키며, 오만한 군주들과 싸우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재산뿐만 아니라 피라도 기꺼이 희생하여 지극히 큰 사랑을 만인에게 골고루 베풀며 모두를 감싸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가난하게 살았던 사도들을 대신하는 자들에게 도대체 재산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렇게 그들이 한 번이라도 고려하였다면, 내 말하노니, 추기경들은 지금 그들이 차지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이를 기꺼이 버렸을 것이며 옛날 사도들이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염려하고 근심하며 평생을 보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교황들이 예수와 동일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였다면, 다시 말해 청빈과 고난과 가르침과 십자가와 생명의 희생을 닮고자 하였다면, 하다못해 교황 내지 사제라는 성스러운 호칭을 고민하였다면, 이는 누구보다 근심과 염려가 가득한 자리일 것입니다. 이럴진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교황 자리를 사려는 자는 누구이며, 일단 사고 나서도 칼과 독약과 온갖 폭력으로 이를 보존하려는 자는 누구입니까? 만약 교황들이 직분에 대한 현명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들은 누리던 엄청난 행복을 잃고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현명한 깨달음이라고 했습니까? 깨달음까지는 필요 없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소금 알갱이 하나면, 그들은 많던 재물, 많던 명예, 많던 권력, 많던 전리품, 많던 의식, 많던 면책, 많던 세금, 많던 면죄부, 많던 말과 당나귀와 호위병들, 많던 쾌락들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몇 단어들로, 여러분은 내가 얼마나 많은 밀거래를, 얼마나 많은 장사를, 얼마나 많은 상품의 바다를 담아내고 싶었는지를 알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대신 철야와 금식과 눈물과 설교와 강론과 연구와 탄식 등 수천 가지 고행들이 교황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여기서 잊고 넘어갈 수 없는바, 수많은 서기들과 수많은 필경사들과 수많은 공증인들과 수많은 변호사들과 수많은 교구 검사들과 수많은 비서들과 수많은 노새꾼들과 수많은 마부들과 수많은 주방장들과 수많은 포주들, 좀 더 부드러운 단어를 선택하려고 하였는바, 행여 귀에 거슬리지 않을까 저어됩니다만, 통틀어 한마디로 한다면 인간 떼거지, 로마 교황청의 관직을 더럽히는 -아니, 말실수 - 드날리는 군상들은 결국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하기야 이들을 생각한다면, 교회의 최고 수장들이 진정한 세상의 빛이 되어 지팡이와 바랑을 맨 목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이며 몰인정하고 더 나아가 저주스러운 일입니다.
오늘날 교황들은 수고스러운 것들은 베드로와 바오로에게 맡겨 두고 넘쳐 나는 여가를 즐기며, 빛나고 즐거운 일을 맡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나 우신 덕분에 인간 종족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여유롭게 살아가며 근심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다만 신비스러운 흡사 무대 의상을 걸치고 예배를 거행하며 복된 자, 존경스러운 자, 신성한 자라는 칭호를 휘두르며 축복과 저주로 파수꾼의 일을 수행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충족시킬 것이라 믿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낡고 진부하며 오늘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대중을 교화시키는 것은 힘겨운 일이며, 성서를 해석하는 일은 학교에서나 할 일이며, 기도를 올리는 일은 한가한 일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은 미욱한 여인들의 일이며, 가난을 실천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며,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위대한 왕들에게조차 지복의 발바닥에 입 맞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자신들로서는 치욕스럽고 가당치 않은 일이며, 죽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만부당한 치욕이라 교황들은 생각합니다.
이들의 유일한 무기는 바오로가 경계하였던바 달콤하고 비위에 맞는 말이며 또한 이들이 후하기 이를 데 없이 베푸는 성무 면직, 성무 집행 정지, 제1차 제명 및 제2차 제명, 파문, 사람들의 영혼을 고갯짓 한번으로 지옥에 보내 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하고 벼락같은 파문자들의 초상 전시 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성스러운 사제들과 대리자들이 할 본분은 악마에게 충동받아 베드로의 유산을 들어먹고 탕진하는 자들을 무엇보다 매섭게 나무라는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복음에 따르면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하였거늘, 교황들은 이와 달리 토지와 도시와 세금과 통행료와 권력을 베드로의 유산이라 부릅니다. 하여 교황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며 칼과 불로써 기독교인들의 엄청난 유혈 사태를 불사하는바, 이렇게 하는 것이 사도들이 하였던 것처럼 용감하게 소위 타락한 적들을 척결하여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된 교회를 지키는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사실 교회의 가장 무섭고 지독한 적은,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잊히도록 침묵으로 방치하며, 장사치의 볍률로 그리스도를 결박하며, 억지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역병 같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불경한 교황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피로 세워졌으며, 피로 굳건해졌으며, 피로 성장하였으며, 이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자신들이 칼을 들어야 할 것처럼 교황들은 전쟁을 불사합니다. 전쟁은 끔찍하기가 짐승이 아닌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시인들이 말하는 바 복수의 여신들이 보낸 것이라 할 만큼 미친 짓이며, 세상을 한꺼번에 휩쓸어 가는 역병처럼 치명적이며, 흉악무도한 날강도들이 제일 잘 수행하곤 하는 무법한 일이며,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불경한 일인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다른 것들은 아랑곳하지 ㅇ낳으며 오로지 전쟁을 수행합니다. 이 가운데 여러분은 백발이 성성한 교황들조차 청춘의 열정과 힘을 과시하는 것을, 엄청난 비용에 괘념치 않는 것을, 역경과 고난에 지치지 않는 것을, 국법과 종교와 평화와 인간 만사가 모조리 뒤죽박죽 엉망이 되는 것에도 굴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 옆에서 학식을 갖춘 아첨꾼들은 명백한 광기를 열정과 경건과 용기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이 치명적인 칼을 뽑아 형제의 복부를 찌르면서도 그리스도의 크나큰 사랑과 기독교인이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있어 게르마니아의 주교들이 선례를 제공한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는 차라리 그들도 선례를 따른 것인지 아직까지 나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게르마니아의 주교들은 공공연히, 관복을 벗어 놓고 심지어 축도는 물론이고 그런 모든 종류의 예배 의식까지 생략한 채, 페르시아의 태수 노릇을 하는바, 이들은 전쟁터의 최전방 이외의 장소에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은 비겁함이며 주교의 직분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사제들의 무리도 자신들이 주교들의 이런 성덕에 뒤처지는 것을 불경이라 여겨, 십일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병사처럼 칼을 들고, 창을 잡고, 돌을 던지며 온갖 무기들을 갖고 참전합니다. 또한 개중 눈 밝은 자들은 옛 문서를 뒤져 백성들을 위협하여 십일조 이상을 쟁취하기 위한 문구를 찾아냅니다. 반면 그 외에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바 그들이 백성들에게 제시해야만 하는 많은 다른 의무들은 그들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깔끔하게 밀어 낸 머리카락도 이들에게, 모름지기 사제란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려야 하며 오로지 천국의 일만을 명상해야 할 존재임을 알려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냥 즐거운 이 이 인간들은 박약한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으로 스스로 행 ㅑ할 의무를 정당하게 다했노라 믿습니다. 그들의 귀에 대고 크게 소리쳐도 스스로도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할 그런 기도를, 나 우신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바 어느 신(神)도 듣거나 혹은 알아들을 수 없을 그런 기도를 말입니다.
사제들 모두가 수익을 올리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그와 관련된 법률에 정통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세속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커다란 부담을 져야 할 경우 이를, 마치 공을 다른 사람에게 받아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처럼 영리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하가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습니다. 세속 군주들은 흔히 국가를 다스릴 과업을 비서들에게 떠맡기고, 다시 비서들은 비서의 비서들에게 하청을 주는 것처럼, 사제들은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발휘하여 긍휼의 과업을 모두 백성들에게 양보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이를 다시, 자신들이 교회와 무관하고 세례 서원을 행하지 않은 듯 ‘교회 식구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교회 식구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속에 헌신하기로 맹세나 한 듯 자신들을 ‘재속 사제’라고 부르는 자들은 다시 이를 ‘수도원 사제’들에게 굴려 보냅니다. 수도회 사제들은 이를 다시 수도승들에게, 다시 유연 수도승은 강직 수도승에게, 다시 모두는 탁발 수도승에게, 다시 탁발 수도승은 이를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은수자들에게 맡깁니다. 하여 오로지 카르투시오 수도회 은수자들에게서 긍휼은 은밀히 간직되어 있는바, 어찌나 잘 감추어져 있는지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황들은 예배를 통해 금전을 부지런히 모으는 데 바바 사도의 막중한 과업은 주교들에게 이양하며, 주교들은 사제들에게 이양하고, 사제들은 부제들에게, 부제들은 탁발하는 형제들에게 이양합니다. 그럼 탁발 수도승들은 이를 다시 양털을 깎는 목자들에게 전가합니다.
이상 내 연설의 목적은 칭송이라면 모를까, 교황들과 사제들의 삶을 들추어내어 풍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훌륭한 군주들을 욕보이거나 악한 군주들을 칭송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나 우신을 받아들이고 나 우신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인간들 가운데 누구도 행복하게 살 수 없음을 밝혀내기 위해 이를 약간 살펴보았을 따름입니다.
람누스에 모셔진 여신이 인간사의 행불행을 다스리매 나 우신과 뜻을 같이하여, 현자들을 언제나 적대시하며 어리석어 졸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늘 좋은 일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어찌 된 것입니까? 여러분은 티모테오스를 알고 있을 텐데, 그의 별명을 들어 보았을 것이며 속담에 ‘잠든 사람의 망태가 낚시를 한다’는 말이나 ‘부엉이가 날개짓한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반대로 현자들에 대해서는 ‘넉 달 만에 태어났다’라든지 ‘세야누스의 준마’나 ‘톨로사의 황금’이란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자칫 나를 따르는 에라스무스의 책을 내가 표절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