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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Herbert George Wells(웰스 1866-1946)
공상과학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이며,
오늘날까지 논의되는 다양한 과학, 사회 문제들을 깊이있게 다뤘다.
H. G. 웰스는 현대 공상과학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는 영국의 소설가로,
《타임머신》, 《우주 전쟁》 등 100여 편의 과학소설을 발표하면서
SF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19세기 말에 최초로 타임머신, 시간 여행, 투명인간, 우주 전쟁, 화학 무기, 유전자 공학,
지구 온난화 등 SF의 기본 개념들을 만들어 냈다.
또한 대중을 위한 역사서 《세계 문화사 대계》,
대중 과학 저술 《생명의 과학》 등을 쓴
과학 및 역사, 정치 분야 저널리스트이자 문명 비평가이기도 하다.
허버트 조지 웰스는
1866년 9월 21일
영국 켄트 주 브롬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은 상점을 운영했으며
어머니는
귀족집 하인 출신으로,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웰스는 그들 사이의 넷째 아이였다.
8세 때
토머스 몰리 상업학교에 들어갔는데, 1
3세 때 아버지가 다리를 다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기 어렵게 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포목상에 사환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제대로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얼마 후 쫓겨나
약국 사환을 거쳐 미드허스트 중등학교 직원으로 일하면서 고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과학과 경제학 분야를 주로 공부했으며,
과학 교사 자격시험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17세 때
런던의 과학사범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 시기에 웰스는 문학에까지 관심을 넓혔으며,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정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1887년,
웰스는 물리학과 생물학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으나
지질학 시험에 낙제하는 바람에 장학생 자격을 잃고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학위를 받지 못하고 학교를 떠났지만,
이 시기의 배움과 관심은 후일 작품들의 근간이 된다.
학교를 나온 후
교사 자격증이 없던 터라 웰스는 여러 학교를 떠돌아다니면서
보수가 적은 임시직 교사를 전전하다가
22세 때 런던 대학에서 이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유니버시티 통신대학에서 생물학 교사로 일했으나
건강 문제로 3년 만에 그만두어야 했다
(웰스는 20세 무렵 웨일스 지역 홀트 아카데미에서 근무했는데,
그때 교내 축구시합 중 다쳐 신장이 파열되고 폐출혈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이후 건강이 나빠져 그 무렵에는 제대로 일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이미 학창 시절부터 〈사이언스 스쿨 저널〉 잡지를 만들어
과학 평론 및 과학 단편소설을 연재했으며,
몇몇 잡지에 과학 평론을 기고하기도 했던 웰스는
이때를 계기로 작가로서 전업할 방법을 모색한다.
또한 25세 때에는
사촌 누이 이사벨 메리 웰스와 결혼했다.
1893년,
첫 번째 저술 《생물학 교본》을 출판했으며,
이후 신문사와 잡지사들로부터 지속적인 청탁을 받으며
순탄하게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아내인 이사벨과 점점 사이가 벌어졌으며,
제자인 에이미 캐서린 로빈스 제인과 연애 관계에 빠졌다.
웰스는 이듬해 이사벨과 별거하는 동안 제인과 사랑의 도피를 했으며,
1년 후에 이사벨과 이혼하고 제인과 결혼한다.
새로 가정을 꾸리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욱 커진 그에게
작가로서의 성공은 절실해진다.
1895년에 발표한 《타임머신》은
해박한 과학 지식, 새롭고 독창적인 소재, 해학적인 문체,
무엇보다 소설의 소재로 그때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과학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웰스에게 작가로서 큰 명성을 안겨 주었다.
웰스는 시간 여행과 같은 공상과학 개념들을
단순한 몽상에서 해방시키고,
여기에 과학적 이론을 부여한 최초의 소설가였다.
때문에 현대 공상과학소설의 창시자로 불린다.
또한 그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과학 소재를 다룬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문명 비판 및 사회 풍자를 시도한 작가였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유토피아 소설들을 비롯해
진화론적 진보를 그리는 미래 예측 대신
퇴보된 미래,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사상을 작품에 담았다.
시간 여행, 차원 이동과 같은 공상과학 개념 외에도
80만 년 후 생명체가 사라지고
원시 종족 같은 퇴화된 수준의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 미래,
디스토피아적 전망 등은 20세기 수많은 SF소설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웰스는 연이어 《모로 박사의 섬》, 《투명인간》, 《우주 전쟁》,
《달나라 최초의 인간》 등을 쓰며 정력적으로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이 작품들에는 현대 공상과학소설의 개념들을 소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생학, 과학 윤리, 진화론, 종교 문제, 제국주의, 파시즘 대두 등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과학 및 사회 전반에 걸쳐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주제가
심도 깊게 다루어지고 있다.
소설 외에도 그는 과학 발달이 인간의 삶과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예측,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및 사회 제도에 대한 분석을 담은 다수의 산문과 논문들을 발표했다.
1900년대에 출간된 《기계와 과학 발달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위대한 국가》,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 등이 대표적이다.
보르헤스는 웰스에 대해
"역사에 대한 논쟁, 과거에 대한 탐구, 미래 예측 등 모든 현실과 가공적 삶을 기록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웰스는 이런 다양한 탐구를 통해
파시즘이 대두되고
기술 발달과 산업화로 인해 인간성이 상실되던 시기에,
인류의 공존을 모색하고
범인류적 가치관과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시각을 갖추어야 함을 호소했다.
또한 그가 제시한 탱크, 원자폭탄, 유전자 공학, 우주 여행, 파시즘 부상 등은
이후 현실화되기도 한다.
과학소설 작가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1800년대 말 웰스는 요양 겸 집필에 전념하고자
켄트 주의 시골 마을에 세이드 하우스를 짓고 정착했다.
1900년대에는 미래 예측 및 과학 전문가로 인정받고
영국 과학연구소에 초빙받기도 했으며,
2000년대의 모습을 전망한 장편소설 《예상》으로 사
회주의 진보단체 페이비언 협회의 초청을 받아 회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페이비언 협회의 활동에 대해
노동자의 실제 가난과 굴욕에서 괴리된 지식인들이 이론만 앞세운다는 생각에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고,
버나드 쇼, 베아트리스 웨브 등 협회 지도자 격 인사들과 잦은 충돌 끝에
5년여 만에 탈퇴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그는 세계의 운명과 제국주의에 대해 온 관심을 기울였으며,
국제연맹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단일 세계국가'를 구상했다.
이런 구상은 《세계 문화사 대계》, 《닥쳐올 세계》 등에서 나타난다.
세계대전 이후에는 동물학자인 아들 조지 P. 웰스, 올더스 헉슬리의 동생이자
생물학자인 줄리언 헉슬리와 함께 《생명의 과학》 등을 집필하면서
세계적인 명사로 이름을 날렸다.
스위스에서 타고르를 만나
현대 문명의 방향에 대해 논하는 한편,
러시아를 방문해 레닌과 트로츠키 등을 만나고,
노동당에 입당해 하원의원에도 출마했다.
관련한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여 《사회주의와 과학적 동기》, 《노동당의 교육 이념》,
《민주주의 이후》 같은 정치적 저술과
파시즘을 고찰하는 《신성한 공포》,
사회제도 분석 및 미래 예측을 담은 《새로운 세계 질서》,
《인류의 노동과 부의 행복》과 같은 다양한 저술들을 내놓았다.
그사이에 다수의 소설도 발표했다.
또한 웰스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영국 정보부에서 전쟁 선전물을 집필하기도 하고,
국제연맹 창설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기술 발전과 사회 변화 예측에 대한 전문가로 윈스턴 처칠에게 등용되어
군 기술자들과 협력하여 무기를 개발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류 진보와 세계 정세에 관심을 쏟으며
저작 활동을 활발히 하던 웰스는
1946년 8월 13일 런던 리젠트 파크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24. 魯迅 (루쉰 1881-1936)
중국 현대 문학의 출발점이자 현대 사상계를 이끌며
중국 문학의 기초를 바꾸었다.
"위대한 사상가요, 혁명가요, 중국 문학의 아버지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혁명가 마오쩌둥의 한마디에는
루쉰에 대한 중국인의 평가가 모두 담겨 있다.
루쉰은 중국 현대 문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작가이자,
중국 문화혁명의 지도자로
중국 현대 사상계를 이끈 인물이다.
또한 마오쩌둥을 위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되며,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루쉰은 1881년 9월 25일
중국 저장성 샤오싱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자는 위차이(豫才)이며,
루쉰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지은 필명이다.
그 밖에도 탕쓰(唐俟), 링페이(令飛), 펑즈위(豊之餘), 허자간(何家幹) 등 수많은 필명을 사용했다.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13세 때 할아버지가 과거시험의 부정부패에 연루된 일로 투옥되고
집안이 멸문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루쉰의 가족만이 미리 외삼촌 집으로 피하여 가까스로 화를 면했다.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버지가 많은 재산을 팔면서 가세가 기울어졌는데,
루쉰이 16세 때 아버지마저 화병과 고생으로 병고를 치르다 죽고
가문이 완전히 몰락했다.
루쉰이 태어난 시기는 청나라 말기로,
그는 어린 시절 동네 서당인 삼미서옥에 다니면서 사서오경을 공부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병석에 누우면서
학업은커녕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고, 고생이 시작되었다.
18세 때
난징 지방에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학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상경하여 강남수사학당에 들어갔다.
이후 강남육사학당 부설 광무철로학당에 진학하여
당시 유신개혁의 영향을 받아 신학문을 배웠다.
22세 때
학당을 졸업하고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며,
유학생 준비학교인 도쿄 홍문학원을 거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
루쉰은 청나라가 봉건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봉건적 구습을 타파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중국 유학생 중 가장 먼저 변발을 자를 정도였으며,
의대에 진학한 일 역시
중국 전통 의학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신학문인 서양 의학을 공부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강의 도중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처형하는 영상을 보고 분노하여 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이때 중국인 포로들이 처형당하는 동포 중국인을 무감하게 바라보던 광경에
큰 충격을 받고, 학문이나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민중의 의식을 바꿔야 국가가 개혁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은 후일 〈약〉, 《아Q정전》 등에 묘사되기도 한다).
이후 루쉰은 도쿄에 머물면서
민족의식 개조를 위한 문학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의식 있는 유학생 동료들과 세계의 정세와 혁명 노선을 논의했으며,
혁명단체인 광복회의 기관지 〈민보〉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여 펴냈다.
또한 망명 중이던 혁명가이자 명망 높은 유학자 장빙린에게 학문을 배우며,
편향된 서구식 발전 모델이 아닌 중국의 실정에 맞는 제도를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1908년,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홍문학원 시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정혼했던 주안이라는 여성과 혼례를 치렀다.
결혼 후 루쉰은 홀로 항주로 가서
양급사범학당에서 화학과 생리위생학을 가르치며, 박물학을 번역했다.
이듬해 샤오싱부 중학교 교감으로 취임했으며,
이듬해에는 산회초급사범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해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루쉰은 난징 정부의 교육부 직원이 되어 일하다가
몇 달 후 수도가 베이징으로 천도되자 교육부의 이동에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그는 교육부의 일도 잘 맞지 않았고,
신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찬동하지 않았지만,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였다.
그는 일하는 틈틈이 금석탁본을 수집하고 고서 연구를 하면서 시간을 견뎌 나갔다.
1918년
문학혁명을 계기로,
문예지 〈신청년〉에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광인일기〉를 발표했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으려 한다는 강박적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광인의 입을 통해
중국의 봉건적 가족제도와 예교, 유교적 도덕관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다.
파격적인 시각, 구어체 문장, 유교적 구습에 대한 비판을 담은
문학혁명의 대표적 작품이자 중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다.
이어서 역시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공을기〉, 〈약〉, 〈행복한 가정〉, 〈형제〉, 〈이혼〉 등을 발표하면서
문학혁명이 제창하는 바를 표현했다.
특히 192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아Q정전》은
당대 중국의 현실을 집약한 것으로,
루쉰을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신해혁명 전후 농촌을 배경으로,
최하층의 날품팔이 아Q가
혁명당원을 자처하지만 결국 도둑으로 몰려
허무하게 총살당하는 모습을 희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해혁명의 좌절과 평범한 중국 사람들의 정신 구조를
아Q를 통해 보여 줌으로써
중국 구사회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제시한 작품이다.
1920년에는
베이징 대학에서 중국 소설가에 대한 강의를 했으며,
1923년에는
베이징 여자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런 한편 친동생이자 역시 문학가였던 저우쭤런과 〈어사사(語絲社)〉를 발간하고
청년문학자, 미명사(未名社)를 조직해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운동, 신문화 운동을 이어 갔다.
그러던 중 1925년
교장 양인위가 학생운동을 탄압하면서
베이징 양 군벌을 끌어들이자 학생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베이징 내 대학 인사들을 모아 양인위의 퇴임을 주장하고
강제 해산된 베이징 여자사범대학의 문을 다시 열었다.
루쉰은 이 일로 군벌들에게 위험인물로 지목당한다.
그리고 1926년 3월 18일,
베이징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제국 열강에 맞서 싸우자는 투쟁을 시작했고,
정부는 이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루쉰은 이 3·18사건으로 베이징을 떠냐야 했고,
이후 아모이 대학, 광둥 중산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상하이로 가서 조계사에 숨어 지내기도 한다.
상하이에서 그는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쉬광핑과 함께 지내면서
이곳으로 피신 온 문인들과 함께 혁명 활동을 하는 한편,
집필과 번역 작업에도 몰두했다.
루나차르스키의 《예술론》, 《문예와 비평》, 플레하노프의 《예술론》,
고리키의 작품을 비롯한 러시아 근대 단편 문학 등이 그것이다.
1930년에는 좌익작가연맹의 결성과 발전에도 지도적 활동을 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만주국을 설립했으며,
혁명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국민당 정부의 탄압도 심화되었다.
루쉰은 중국민권보호동맹을 조직해 체포된 혁명 인사들에 대한 구명운동을 하고,
중국인의 권익을 보장하라는 취지의 활동을 해 나갔다.
그런 한편 만주사변 이후 대두된 민족 문학, 예술지상주의 문학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국민당에게 수배당하고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수년간 도피 생활을 하는 와중에
중국 혁명을 위한 집필 활동과 혁명운동 등에 투신하면서
루쉰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1936년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루쉰은
폐병과 천식이 악화되어 그해 10월 19일 사망했다.
병석에 누운 그는 거동도, 말하는 것도 불편할 지경이었음에도
집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관을 덮은 흰 베에는
'민족혼'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루쉰이 현대 중국 문학에 끼친 영향에 비해 그
가 발표한 작품은 매우 적다.
중편소설 1편,
단편소설 32편이 전부로,
번역한 작품(1938년 출간된 루쉰 전집 20권 중 절반가량이 번역 작품일 정도였다)보다 적다.
그러나 그가 문학을 통해 표현하고 이끌어 낸 중국의 민족혼과
문학혁명의 이론들은 중국 문학의 기조를 바꾸었다.
루쉰은 문학과 사상을 통해 사회의 모든 허위의식을 배격하고,
봉건적 사회 속에서 '나'라는 개인을 잃고 살아가던 중국 민족에게
인간성과 개인성을 자각시켰다.
루쉰 사후 중국의 문학계와 사상계는
그의 사상 대부분을 받아들이며 발전한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