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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바람의 화원’이다 ‘미인도’다 하는 드라마와 영화로 혜원 신윤복(본명 신가권, 간송미술관 소장의 ‘미인도’낙관에는 본명인 신가권을 사용하고 있다 )에 대한 갖가지 설들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한가하던 간송미술관이 지난 10월 가을 기획전할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특히 혜원의 작품 근처는 몇 겹으로 인성(人城)을 쌓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실제와는 다른 픽션으로 인해 상당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어 이에 대한 피해도 적지 않다. 근거도 없이 혜원이 여자인 것으로 믿으려 하고, 중인 계급의 상인이 종3품 이상인 단원을 농락하는 장면들은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혼란까지도 초래하고 있다.
일전에 어떤 분이 “혜원에 대한 명백한 어떤 자료가 없느냐?”고 물어와, 전에 복사해 둔 자료를 찾으려고 뒤지다가, 10여 년 전에 써 두었던 <간송 추모전>의 감상문이 손에 잡혔다. 한동안 못했던 인사도 할 겸........, 서두와는 별 관계도 없지만 사진 몇 개를 더 추가하여 올립니다. (지금 와서 보니 일부 보정할 부분도 보이지만 그대로 올림)
'간송추모전'을 보고
문화체육부에서 96년 「11월의 문화인물」로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을 선정하고, 그에 따라 「간송 추모 특별전」을 한다는 내용의 신문을 읽고, 우리 근대의 최고 문화재 수집가로 꼽히는 간송이 일제 때 15년간에 걸쳐 수집한 서화, 자기 등 대표적 문화재를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되어 물론 잊어버릴 리는 없겠지만, 아예 신문을 오려 책상에 붙여 놓고 기다렸다.
드디어 개판일(11월3일)이 되어 더 지체할 것도 없이 아침을 먹고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혜화역에 내려 10분 가량 걸어가면서 익히 들어온 간송을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일제 때 우리의 지상 지하의 문화재는 무질서하게 일인들의 야욕을 채우는 대상이 되어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수없이 반출되어 가고 있을 때, 분연히 그들에 맞서 흩어져 가는 우리의 문화재를 수집․정리하고 보존하여 오늘의 간송미술관을 있게 한 분이 간송 전형필 선생이다. 그는 오로지 민족혼을 지킨다는 목적의식으로 10만석지기의 재산을 아끼지 않고 민족문화재에 쏟아 부은 참다운 수호자였으니, 오늘날 각 민족마다 자기 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는 이때에 간송의 공로는 더욱 빛나 보인다.
또한 그에게 문화재 수호에 나서도록 영향을 준 인사들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첫 번째가 춘곡 고희동으로, 그는 일찍부터 간송의 심미안과 수집벽을 간파하고, 오래 전부터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신명을 바치고 있던 선각자이며 당대 최고의 서화 감식가인 위창 오세창 옹에게 소개하여 그 현장을 보게 했다. 위창이 수집한 막대한 서화작품과 역대 우리나라 서화인명을 집대성한 「근역서화징」의 집필과정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대학시절의 방학 때에는 위창 곁에 붙어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또 한 분이 만해선사였으니,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1916년에 만해가 신문에 기고한 「고서화의 3일」이라는 글을 쓰기 위해 위창을 방문한 계기로 서로의 존재와 민족사상을 확인하였고, 그 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에 동참하여 일본의 갖은 고문과 회유에도 둘만은 실절하지 않았으니 그 친분이 어떠했겠는가! 간송이 서화작품을 구입할 때 감식은 꼭 위창에게 맡겨 자문을 구했기 때문에 자연히 만해와 간송은 교분이 있었을 것이고 그의 애국심에 기름을 부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간송미술관에 들어서니 크지 않은 건물에 간송이 손수 심고 가꾼 나무들이 둘러 싸여 마치 어느 산 속 절간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에 한참을 정원에 앉아 흩어진 낙엽과 조화 있게 배치된 불상, 광배, 석탑 등을 감상한 후에 1층 전시실에 들어섰다.
1층 전시실은 서화 작품들로만 진열되어 있는데 화려한 색상이 아니어서인지 아주 고적한 분위기가 흘렀다. 오른쪽으로 돌면서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추사 김정희의 「예서대련」으로, 글씨로는 국내에서 제일간다고 하는 것이다. 원래 골동수장가 송은 이병직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경성미술구락부에 출품한 것을 간송이 경락한 것이다. 거친 듯하면서도 딱딱하지 않고, 느린 듯하면서도 꿈틀거리는 힘이 넘쳐 도저히 붓으로 쓴 것 같지 않고, 마치 세한도에서 보는 늙은 소나무의 껍질에 먹물을 묻혀 갈긴 듯한 억셈과 두터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추사의 「행서 일품첩」은 그의 파란 많은 생애를 보내면서 유배지에서 오만 열정과 분노를 삼키며 헤쳐 나온 후 관조하는 마음으로 표현한 듯, 그 필선의 고담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이 마치 고사의 인격을 대하는 듯하다. “가슴 속에 청고하고 고아한 뜻이 없으면 손에서 나오지 않고 그러한 기미가 없으면 팔 아래 손가락 끝에서 나타나지 못한다”고 한 추사의 정신을 엿보는 듯하여 옷깃을 여미고 자세를 고쳐 감상하여야만 했다. 바로 그 옆에는 추사가 스승처럼 섬겼던 청의 옹방강의 검고 둔탁한 글씨가 마치 천근의 바위가 질서 정연하게 눌러 앉은 듯 진열되어 있어 추사의 글씨와 잘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진열대 중앙에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화첩이 펼쳐져 있는데 당시 상류 사회인들의 기호에 맞추어 풍류인들이 화류계 여인들과 어울리는 장면을 절묘한 필치로 그렸다. 그는 젊은 여인 묘사에 있어서 천부적 소질을 타고난 듯 얼굴 표정으로부터 옷맵시, 손맵시, 버선을 신은 발맵시 할 것 없이 남자들의 가슴을 태우고 애간장을 말리는 듯한 요염한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선고적도보 제14책]을 보면 도판5977- 5980으로 ‘주유도(舟遊圖)’, ‘단오수변희희도(端午水邊嬉戱圖)’, ‘사죽유락도(絲竹遊樂圖)’, ‘주막도(酒幕圖)’가 실려 있는데, 이 모두 혜원의 [풍속화첩]에 있는 것으로 일제 시 충무로 입구의 부전상회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간송이 힘들게 구입한 것이다.
널리 ‘혜원 풍속도’로 널리 알려진 [蕙園 傳神帖](국보 제135호)에는 화첩 끝에 간송이 몇 해를 벼른 끝에 큰돈을 들여 수장한 내력을 말하는 자세한 풀이를 위창이 跋文에 붙였다.
“세상에는 혜원의 그림을 소중히 여기되 더욱이 그 풍속을 그린 것을 소중히 여기는데 이 화첩에는 30면이나 되는 많은 양이 있다. 모두 옛 풍속 인물화로서 일반생활의 하나하나 모습이 종이 위에서 약동하니 눈부시게 큰 구경거리이다. 또 복식도 지금 이미 없어진 것이 거의 반 넘어 담겨있다. 이 화첩에 의거하면 겨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줄거리로서 이것을 가히 이어 줄만한 것이다. 이 화첩에는 일찍이 큰 상인인 富田氏의 손에 들어가서 여러 차례 촬영을 거치고 혹은 지극히 작게 축소되어 담배갑에도 넣어지기도 한 까닭에 사람마다 모두 얻어서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그림으로 세상이 모두 함께 보배로 여길 수 있는 물건을 만들었으니 또한 기특하지 않는가.
간송 전군이 꼭 原帖만을 얻고자 벼른 것이 몇 년이더니 이에 많은 돈을 아끼지 않고 이것을 사드려서 진귀한 비장품을 삼았다. 나는 지금 빌어 감상하고서 곧 화첩의 끝에 이것을 쓴다. 병자년 초봄(음력 1월) 초승에 葦滄老夫 吳世昌은 쓰노라.”(『澗松 全鎣弼』)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겸재 정선의 진경 산수화첩으로 「해악 전신첩」인데, 이것의 입수 경위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아무래도 앞선 것을 참고하면, 골동계 원로 장형수씨가 1930년 초반에 친일파 거두 송병준의 용인에 있는 집에 고물을 사러 갔다가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마침 행랑지기가 불쏘시개 감으로 광에서 종이 한 아름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 속에 화첩이 보여 호기심에 구해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바로 겸재의 산수화첩이 아닌가! 화폭마다 원교 이광사의 찬시가 붙어 있고 따로 금강산 실경산수가 붙어 있는 으리으리한 물건이었다. 불쏘시개 감이니 몇 푼 집어주고 그 길로 한남서림(간송의 고서는 대부분 이곳에서 입수)으로 줄행랑을 쳐 간송의 손으로 넘어간 작품이다.
그 외 일세를 술과 기행으로 풍미한 장승업의 그림, 화조, 영모도에 발군의 기량을 보인 변상벽의 그림, 모두 명품이 아닌 것이 없었으나
무엇보다도 나를 전율케 한 것이 현재 심사정의 「촉잔도권」이었다. 그림의 길이만 해도 8m가 넘고 위창의 발문까지 있어 완전하게 다 펼쳐 보이지는 못했으나, 일찍이 위창이 “간송의 서화 중에서 이것이 최고다.”라고 극찬한 것이다. 구름을 뚫고 치솟는 산봉우리가 겹겹이 싸여, 어떤 곳은 기암괴석만으로 어떤 곳은 고송이 중첩되어 태고의 전설을 간직한 듯하다. 이런 태산준령을 넘나드는 길이 구절양장으로 누비며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여 구비 구비 흐르는 장강물은 절벽에 세차게 부딪혀 찢어지며 물보라를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솜털로 문지른 듯한 넓은 바다를 보는 듯 도도히 흘러 수만리 나아가는 장면은 유현덕의 천연의 요새를 짐작케 하고 있다. 감히 중국의 이름 높은 화가들까지 엄두 내지 못했던 대작! 그 웅대한 구도! 중국의 많은 시인들이 이 절경을 노래했으나 어찌 누가 이보다 감동적으로 무궁무진한 산천의 변화를 박진감 있게 표현했던가!
너무 오랫동안 이 그림에 빠져 있는 자신을 보고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어차피 그림의 아름다움은 우선 그 속에 빠져 흘려버려야만 비로소 그 모습이 보이기 마련이라 지만,.....
이 「촉잔도권」은 가평의 조보국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전해오던 것으로 간수를 잘못하여 좀이 먹고 몹시 상해서 보수하려다 실패한 것을 간송이 거간을 통해 5천원에 구입한 것인데, 간송은 이것을 일본으로 보내 수리 표구하는데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6천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 간송이 이 그림을 입수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았으리라.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2층으로 올라가니 2층에는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먼저 오른쪽에는 고려청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음, 양각 상감으로 문양된 대접, 병…, 모두 명품중의 명품들로 거의가 흙이 조금씩 묻어 있어 그 출처를 짐작케 하고 있다. 고려청자하면 중국의 서긍이 고려 때 우리 나라에 와서 보고 그 우수성을 기록했고, 청나라 때 태평노인이 천하 10가지 보배로 송의 자기를 제쳐두고 우리의 청자를 포함시켜 그 우수성을 증명했다. 그러나 앞에 진열된 청자는 모두 우리 조상들의 무덤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한편으론 처연한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골동 수장가 미야케(三宅長策)의 회고에 의하면 “1910년대에는 일본 수장가와 도굴꾼들이 이 나라에 몰려와 개성 일원의 왕릉을 포함한 고분들을 닥치는 대로 파헤쳐 각종 고려자기와 부장품들을 일본으로 날랐으니, 도굴과 판매로 생활하는 자가 수천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참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려청자 중에는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중앙에 진열된 「청자기린향로」, 「청자오리연적」을 포함한 국보 및 보물 7점인데 때깔이 청아하고 형태가 독특한 것으로, 1937년 간송이 일본으로 건너가 영국인 골동수장가 개스비로부터 엄청난 거금을 주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왼쪽에는 분청사기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분청사기'는 오늘날 통용되는 용어이지만,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사기는 자기의 속어다"라 하고 있어 차라리 '사기'대신 '분청자기'라 하는 것이 격상되어 옳을 듯하다. 처음 보면 그야말로 기교가 단순하고 문양이 거칠며 질이 떨어지는 듯 해 보이지만 천진스럽고 자연스러워 도리어 무기교의 기교를 보여 주고 있다.
일찍이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여, 조선 총독부를 지으며 허물어 버리던 광화문을 살린 일인 야나기 무네요시(류종렬)는 이런 조선 자기를 보고 “조선의 자기는 우리를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때때로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분방하고 자유로운 맛을 드러내고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백자는 그리 많은 숫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것이 있었다. 백색의 청아한 바탕에 난은 청화, 국화 줄기 및 잎은 철채, 국화꽃과 벌레는 진사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문양의 형태는 모두 양각 즉 돋을무늬로 표현하여 복합백자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에 이렇게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한 것은 국내에서 그 유례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도자공예의 기술을 총동원한 백자의 총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백자가 간송미술관에 수장된 유래에 대하여 최순우 선생과 고 박병래 선생의 회고를 참고하면,
1940년 초에 을지로 3가에 무라노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골동가게의 안채에 참기름을 팔려온 개성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골동상 주인이 무심코 안채에 왔다가 기름이 담긴 백자를 보고 기름과 함께 백자 4점을 4원을 주고 몽땅 샀다. 그런데 이 골동상에게는 장사수완이 아주 뛰어난 마에다라는 사위가 있었는데, 이 사위가 골동상에 왔다가 이 백자를 발견하고 4원에 산 물건을 60원에 모두 샀다. 무라노는 말하자면 10배가 넘는 가격에 팔았으니 기분이 좋았음인지 그날 저녁 한잔을 마시고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며칠 후 마에다는 4점 중 문제의 병을 조선 은행장인 마쓰오카에게 800원에 넘겼다. 이 소식을 듣고 무라노 부부가 크게 싸움을 벌렸다는 것이다. 남은 800원을 받았는데 60원을 받고 무엇이 좋아서 술을 먹고 들어 왔느냐고 떼를 쓴 모양이다. 결국 이 병은 나중에 모리의 물건이 되어 경성미술구락부의 경매장에 나왔는데, 간송이 중계인을 시켜 1만4천여원에 낙찰시켰다. 일본인과 끝까지 대결하여 얻어낸 쾌거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이 낙찰가는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
나중에 이 소문을 듣고 일본에 있던 골동거상이 간송에게 10만원에 팔라고 했으나 간송은 잘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도자기 전시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으로 높이 42cm의 매병 특유의 아름다운 선으로 구성된 이 거작은 우리나라 청자 중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46개의 흑백 이중상감으로 원형 가운데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학을 한 마리씩 문양 하고, 원형과 원형 사이에 23마리의 학을 문양하여 도합 69마리의 학을 표현했다. 어떤 사람은 “이 거대한 병을 빙글빙글 돌렸다고 생각해 보자. 푸른 창공을 날아오르고 내리는 학의 수는 금방 수천 마리가 될 것이다”라고 기발한 착상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전 소장자였던 일인 마에다 사이치로는「천학문매병」이라 이름을 붙여 오늘날까지 많이 쓰는 별칭이 되었다.
이것은 원래 개성 근교의 고려 때 권신의 무덤에서 1932년에 도굴꾼에 의해 발굴된 것인데, 세상에 나오자마자 골동 거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를 입수한 골동 거간은 자신의 단골이었던 일본인 거물 수장가한테 팔기 위해 대구로 갔으나 그 단골이 마침 일본으로 떠나고 없었다. 그때 만약 일본인 수집가가 집에 있었으면 일본으로 반출되었을 것이다. 이 골동 거간은 생각 끝에 꿩 대신 닭이라고, 대구에서 치과의원을 하던 신창재에게 4천원에 양도하였다. 신창재는 다시 서울 필동의 일본인 마에다에게 넘겼는데, 총독부에서도 이 물건이 탐이나 1만원에 교섭을 했으나 실패한 것을 드디어 간송이 2만원 (당시 기와집 10채 값)을 치루고 양도받게 되었다.
당시 간송에게 천학매병이 넘어가자 가장 당황한 자는 마에다의 장인이기도 한 아마이케 노인이었다. 이 자는 당시 명동에서 골동상을 하는 골동거상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에도 상당한 유물을 팔기도 한 자이다. 아마이케는 자신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의 가장 큰 거래처이기도 한 오사카의 무라가미에게 연락을 하였다. 아마이케는 무라가미에게 소식을 넣어 무라가미가 사겠다는 의사표시까지 해 둔 상태였다. 그 와중에 간송에게 넘어간 것이다. 후에 이 소식이 일본에까지 퍼져, 탐이 난 일본인 거상 무리가미 노인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30대 청년 간송과 대좌하게 되는데 이때 교환한 대화는 두고두고 화제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무리가미가 간송에게 “산 가격의 배를 지불하겠으니 이 매병을 양도해 달라.”고 했을 때, “무리가미씨께서 이 운학 문매병 보다 더 좋은 물건을 저한테 가져다주시면 이 매병은 본전에 가져가시오. 저도 대가는 얼마든지 치룰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점잖게 응수했다고 하는데 간송의 애국심이 잘 나타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라 생각되어 나오면서 입구에서 전체적으로 주욱 훑어보니 눈을 찌르는 모든 미술품들이 마치 우리 민족 문화전통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저항한 간송의 숭고한 뜻을 전하려는 듯 소리 없는 웅성거림으로 전송해 주었다.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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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갑니다~~~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오랜만에 왔구먼 칭구 그동안 책 탈고하느라 바빳지? 18일날 보세나 건강허구 !
규홍아. 잘있지... 올봄에 안계서 ..자네 부친,상가에서본게 마지막이였지,,미술품에대한 자네의 전문가이상의 탁월한 식견과 심미안에 부럽기도하고,..우리 친구라는게 가슴 뿌듯한데... ....친구들을 위해,,, 그 감상의 세계로 들어갈수 있는 길도 좀 안내해주면 어떨까....자네 전공이잖아..그리고.건강해라,,
고마웠네, 만경산과 자네는 나중에 고향으로 가기로 했는가 본데..... 부럽네, 나중에 찾아가면 만경산은 틀림없이 일만 시킬 것 같고,... 자네는 하루 일 도우면 하루는 공짜밥 줄 것이라 보네.... ㅎㅎ
책,,,한권 탈고 중이야.... 나오면 나도한권 줄래,,,책값으로는 소주한잔 살께...
보고싶을 때 찾아가겠네
친구의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식견에 절로 입이 딱 벌어지는구먼 ~~ 빨리! 이 촌놈의 턱을 제자리에 맞추어 놓게나 ㅎㅎ^^
자네의 한 템포 머물 줄 아는 배려와 넓은 심장에 항상 숙여 질 뿐이네...
좋은 글 유익하게 잘 읽고 즐감하고 ...늘 건강하게 잘 지내게 칭구야..
멋진 자네 한결같으니 ................ 항상 그대로로 고맛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