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보살이 평생을 모은 불서 1000여 권을 동국대 도서관에 기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감동의 주인공은 송미령(65) 보살. 송 씨는 지난 1월 동국대 도서관에 불서 1000여 권을 전달했다.
이 불서는 남편인 고(故) 이흥세 옹이 불교공부에 매진하면서 평생을 모은 책들이었다. 지난해 11월 갑작스럽게 찾아온 뇌졸중으로 별세한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던 송 씨는 불교에 대한 지고지순한 원력이 담긴 서적들을 발견하고 기부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송 씨는 “평생 불교공부에 매진한 남편의 뜻을 제대로 기리는 방법은 필요한 곳에 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에게 여쭈니 후학들을 위해 기왕이면 동국대 도서관에 기증하라고 권유하셔서 그대로 따랐다”고 말했다.
송 씨는 “평소 남편은 부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다”며 “많은 분들이 기증한 불서를 읽게 되면 남편의 뜻과 원력이 이어질 수 있으니 도리어 이런 기회를 제공한 동국대에 고맙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흥세 옹은 마포포교원 원장이자 조계종 중앙신도회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매일 오전5시에 기상하자마자 불서를 읽는 등 평소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밥은 못 먹을지언정 부처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사서 봐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던 고인은 장차 불서들을 모아 불교도서관 건립을 원력으로 세우기도 했다. 이런 고인 뜻은 부인인 송 씨에 의해 동국대 도서관에서 고스란히 구현된 셈이다.
김하영 기자
[아래는 故 이흥세 옹 관련 2005년 11월26일자 본지 기사]
이흥세 전 마포전법원장 /
환갑 지나 찾은 포교사 30년 외길
90이 넘어서도 괜찮았다. 법(法)을 전하고 경(經)을 설하며 대중들과 함께 한 그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4년이 물새듯 흐르고 올해 부처님오신날을 보낸 어느날, 갑작스럽게 신체가 마비됐다. 뇌졸중. 뇌의 혈액순환장애에 의해 급격한 의식장애와 운동마비를 수반하는 중병이나, 회복은 기적처럼 빨랐다. 그래도 몸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머리로는 기억나는 추억들이 입으로 도통 나오질 않고, 마음으로는 잘도 걷지만 두 다리는 정작 꿈쩍도 않는다. 94세 노구(老軀)에도 90여년의 삶을 세세히 기억하고 얘기하려 애쓰는 이흥세(법명 도광)옹은 매우 고요하고 침착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영혼이 깃든 육신과도 같은 ‘마포전법원’을 불교계 한 단체에 무주상 보시했다. 1980년대 초 ‘조계종 포교사 1호’로 명패를 단 후 어렵게 마련한 이 포교당은 23년간 이 옹이 손수 지켜온 정법당이자 수행원이다.
차가운 냉골에 서넛이 모여앉아 경전을 공부하고 마음을 닦아왔던 ‘마포전법원’은 이제 100여명의 불자들이 북적대는 여법한 도심포교당으로 자리잡았다.
<사진> 고(故) 이흥세 옹의 생전 모습.
“내마음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으로 무슨 전법과 포교를 할꼬. 법을 전하듯 이젠 다른 이에게 법당을 넘겨줘야할 때가 온 거제. 그래도 이 늙은이가 아직 욕심이 있나벼. 죽기 전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초하루법회에는 참석하려고. 내가 거기서 인기가 많다우~(웃음)” 지팡이에 몸을 기댔어도 웃음을 흘리는 입매는 천진스럽다. 서울 북가좌동의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지난 10일 그를 만났다.
“지극한 마음.기도와 수행만이 삶의 나침반” 신념
군 전역후 ‘조계종 포교사 1호’로 포교 전념
최근 ‘자신의 전부’인 전법원 불교단체에 보시
‘왜 출가를 하지 않았을까.’ 그를 보면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맴돈다. 그 정도로 그의 삶은 맑고 투명해 보인다. 묻지도 않은 말에 답이 돌아왔다. “언제나 출가를 꿈꿨지. 처음 보는 경전도 언젠가 어디서 접했던 것처럼 익숙했으니까. 부처님의 일생과 불교의 사상도 내겐 너무나 낯익고, 저절로 수긍이 갔다면 믿겠어?” 그럼에도 그가 출가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안의 대를 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3형제 중 막내였지만 어린시절 두 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던 거다. 간단한 이유지만 거스를 수는 없었을 법하다.
출가의 꿈은 23년 전 서울 마포에 전법원을 열면서 다른 방식으로 실현됐다.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었던 박완일(전 동국대 교수)씨와 인연으로 건물을 구해서 전법원이란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하게 됐다. “마포에는 천주교 절두산 성지가 인접해 있는데다, 개신교 신도 일색이라 법당을 열어 신도를 모으는 것은 정말 어려웠어. 마음에 와닿은 경전구절을 적어서 전단지를 만들어 거리에 나가 직접 나누고, 가가호호 방문해서 불심을 키우라고 호소도 했어. 그렇게 신도 서너명으로 시작된 전법원이었지.”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연출하듯, 그는 손짓 몸짓을 동원하며 말했다. “〈법화경〉으로 10년을 법문했어. 부처가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이 짧은 진리를 10년간 공부하고 법문했다면 미친놈이라고 할거야. 한 차례 법문으로만 토해버리면 그 순간에 끝나니까, 기복만 좇는 불자들을 데려다가 〈법화경〉을 일일이 요약ㆍ해설해서 인쇄한 뒤 그 교재로, 말하자면 강의를 한 게지. 처음엔 집안 잘되고 건강 빌려고 왔던 사람들이 무슨 놈의 공부냐며 항의도 많더군. 하하~ 그래도 꿋꿋하게 해나갔더니 신도수가 10명, 50명 70명으로 늘어서 100명이 넘었다우.”
그는 23년간 전법원을 꾸리면서 벌어졌던 사연들을 마음속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고백하듯 말했다. 한강 투신 자살객들이 유행처럼 많았던 1980년대에는 한강을 접하고 있는 마포전법원에서 대대적인 천도재를 봉행하기도 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가 전법원에 찾아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통해 생명을 되찾은 이야기, 꿈속에서 갔던 길을 따라오다 보니 바로 전법원에 도착했다는 나그네의 사연, 법당천장에 우글대는 쥐새끼들을 해치지 않고 보냈던 일 등등,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 모든 사연과 인연 속에서 그가 사람들 앞에서 늘 강조해온 ‘법문’은 “지극한 마음과 기도와 수행만이 삶의 나침반이고 가치”라는 것이다.
그가 평생 법을 전하며 포교를 하게 된 인연은 1970년대 초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에서 경봉스님을 만나고 난 후다. 친구를 따라서 얼떨결에 스님을 찾아간 그는, 우연찮게 수계를 받았다. “경봉스님이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시더니만, ‘니는 도광(道光)이다’ 하시는 게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남은 여생은 도를 닦아 빛나게 살 팔자라나? 그때는 그 말씀이 별로 좋게 들리지 않았어. 이제야 스님이 주신 이름값을 하고 살았구나 생각이 들어. 너무 자화자찬인가?”
소년시절부터 그는 범상치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가난은 물론이요, ‘왜놈들한테 무슨 교육을 받냐’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 학교공부는 엄두도 못냈다. 공부욕심이 유달랐던 그가 택한 것은 ‘도둑수업’이었다.
“아이들이 교실로 모두 들어가면 슬금슬금 운동장을 거슬러 교실 창문밖에 기대어 도둑놈처럼 수업을 들었지. 교장은 ‘도요다’라는 일본인이었고 선생은 조선인(김종무라는 이름도 기억했다.)이었어. 하루는 선생님이 수업도중 ‘왜 조선반도라고 부르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아무도 대답을 못하는 거야. 그래서 창밖에서 내가 답했지. 수업이 끝나고 선생이 나를 부르더니 ‘도둑공부도 죄가 된다’며 혼쭐을 내더구만. 사정을 전해들은 선생은 그 길로 집에까지 찾아와 공부를 시켜달라 애원했고, 울 아버지는 다짜고짜 안된다고 했지.” 10살이 채 되지 않았던 소년은 급기야 교사들이 읍내 학용품을 들여오면서 소요되는 운반비를 몸으로 뛰면서 받아냈다. “그 어린애가 산넘고 강건너 30리 길을 걸어서 심부름을 하고, 심부름값 80전을 받아 학비로 충당한거야. 덕분에 학교를 다녔고 월반을 하면서 보통학교를 졸업했지.”
고등학교는 꿈도 못꿨던 그는 독학으로 검정시험을 패스하고 3종 교원 자격을 취득했다. 열여덟살에 그는 보통학교 교사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사범학교를 나온 정식교사들과의 차별에 시달리면서, 중국으로 ‘무전유학’을 떠났다.
군 시절에는 장병들과 함께 ‘관음신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군대에서 도반들에게 말했지.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늘 외우고 항상 마음속에 새겨서 공경하고 예배하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되며 현세에서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6.25가 터졌을 때도 불자장병들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외면서 전쟁의 아픔을 치유했어. 벌써 50년이 넘은 옛날 얘기지만…”
공군 대령으로 군대를 전역한 그는 국가유공자다. 전역 후 그는 한때 성균관대학 이사직을 맡았다. 타종교 신앙활동에 제약이 있었지만, 학교 사무실에서 꼬박꼬박 조석예불까지 챙기면서 불심을 다졌다. “서류들을 챙겨 넣는 캐비닛에 부처님을 모셨어요. 새벽 일찍 학교에 와서 아무도 모르게 아침예불을 올리고, 저녁에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야 밤늦게 예불을 올렸지.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알았을거야. 서로가 쉬쉬한 게지.”
도광. 이름대로 그는 살아왔다. 그가 추구한 도(道)가 꼭 부처님의 진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근현대의 질곡속에서 쓰러지고 또 다시 일어서며 버텨온 그의 삶에서 도는, 가장 인간적인 중심이자 삶의 희망이었다. 이제 큰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남은 거라고는 뭉퉁한 지팡이 한자루지만, 그는 그 모든 삶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입을 닫았다.
하정은 기자 jung75@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마포전법원은…
기복보다 경전공부 주력
법회참석인원 100여명…
“1970년대 초 경산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 당시 성균관대학에서 이사를 맡으면서 스님과 인연이 됐지. 아마 학교일로 문교부에 오가면서 만났던 것 같아. 스님은 포교사시험을 치르라고 권했지.” 당시에는 재가자 포교사가 없었다. 시험장에도 스님이 아닌 재가자 응시자는 이흥세씨 혼자였다고 한다.
종단이 인정하는 ‘포교사’가 된 그는 법을 전하는 도량을 물색하다 당시 박완일 전 동국대 교수와의 인연으로 마포전법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그때가 1982년이다. 서울 한복판이지만, 이곳에서 그는 원없이 수행과 기도를 하고, 전법활동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스님이 아닌 재가자의 신분으로 포교당을 운영하다보니, 되돌아가는 불자들도 많았다. 특히 기복을 위해 어렵게 도량을 찾아온 불자들은 경전공부에만 주력하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법원의 수행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퍼지면서 하나둘 신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재 법회인원이 100여명을 웃돈다.
이 씨는 최근 이 전법원을 동산반야회에 무주상으로 보시했다. 다만 조건은 있었다. “내가 죽어도 이 전법원은 평생동안 이 둥지에서 법을 전할 수 있도록 어디에 팔지 말고, 수행과 기도를 멈추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초하루법회는 꼭 봐달라는 부탁을 했지. 이 말에 선뜻 응해주시길래, 나도 선뜻 보시를 했지. 허허.”
하정은 기자
[불교신문 2182호/ 11월26일자]
2005-11-22 오후 7:04:24 /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