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국의 야자수와, 상아빛 해변,
아오자이의 남국미인을 기대하며 앞을 다투어 월남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기대와 달리
월남에 상륙한 한국해병대가 야자수해변을 뒤로하고 부대를 정비하며,
주둔지로 이동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을때 해병대 최초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후방과 전방이 따로 없었던 밀림의 정글전,
첫 해병대원 전사자는 "머리에 정조준 저격"을 당한 어느 분대장이었다.
월남상륙 3일만에 청룡해병전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군 LST에 실려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싸늘한 주검에는 목숨값으로 단돈 3달러가 놓여져 있었고,
해병들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스물두해의 젊은 목숨 값이 단돈 3달러란 말인가?
피부색만 다를뿐, 같은 전장에서 함께 싸우는 한국군의 목숨 값이
어찌 미군의 100분지 1에 불과하단 말인가?
가난한 나라의 병사들은 피로서 가난의 댓가를
치룰 수 밖에 없음을 해병들은 뼈저리게 실감했던 것이다.
"한국해병대, 바다를 넘다"
부대를 정비하고, 전투준비를 완료한 청룡부대는
11월 4일 최초의 공격작전을 감행한다.
목표는 "까두산요새"
월맹군 최고정예부대와 베트콩 혼성부대가 방어하고 있으며,
십여년 동안 월남군과 프랑스군의 집요한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았고
수천명의 전사자를 낸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공군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어마어마한 물량공격을 감행했던
미군조차도 손을들고 물러났던 공산월맹의 자존심이자 보루였던 "까두산요새"
파월한국군 장병들의 처우문제를 미국과 협의하고 있던 한국군대표단에게
주월 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전투력에 대하여 노골적인 의문을 감추지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청룡부대가 미군들의 무덤과도 같았던 "까두산요새"를
공격하겠다고 나서자 월남에서 잔뼈가 굵은 미군지휘관들은 코웃음을 쳤다.
"신참들이 치룰 댓가를 뻔히 알면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우군으로서
매우 미안한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은 많은 것 을 배울 것이다."
"총원 돌격앞으로!"
청룡의 낡아빠진 PRC-10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직직거리는 "한국어 공격명령"은
미군의 고성능 PRC-25-47을 통해 주월 미군사령부에도 중계되고 있었다.
두시간 후, 그 낡아빠진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한국해병의 보고는 단 세마디였다.
"목표제압완료, 아군피해 무, 생포한 적 압송중"
"이제 한국해병대의 새로운 신화가 시작된다"
짜빈동 전투(Battle at Tra binh dong) "그 위대한 승전보"
짜빈동 작전(1967.2.14. 23:20 ~ 1967.2.15. 07:24)은
해병여단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1967.2.14. 23:20분 손틴군 짜빈동에서
월맹정규군 제2사단 1연대와 21연대 및 지방 게릴라 1개대대의 인해전술로
파상적 기습공격을 받아, 제11중대 장병들이 중대전술지에 구축한 외곽과
내곽방어선으로 연하는 교통호를 이용하여 일제 사격과
수류탄 및 크레모아등으로 침입하는 적을 격퇴한 전투이다.
한때 적의 완강한 공격으로 제3소대의 진지가 돌파되어 치열한 진 내 육박전까지
전개하였지만, 지원화기의 적절한 운영, 역습부대의 과감한 공격, 아군진지에 대한
"진내포격"으로 4시간의 사투 끝에 적의 주력을 격멸하고 전술기지를 방어하였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지향한 "중대전술기지운용"의 우수성과 효율성을 증명한
"짜빈동전투"는 월남군및, 미군의 전술, 전략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어 실전에 적용되었고,
미군은 "청룡방어전술"이란 고유전술로 육군과 해병대의 야전교범에 수록하여
사관학교및 각종과정에서 정식교재화하였다.
이 전투결과 해병대 청룡부대는 국군의 막강한 전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룡부대 제11중대는 1967.2.15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제11중대 전원 191명(장교제외)은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대한민국 군인의 최고 명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1968.5.28 제11중대는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과,
부대원이 "은성무공훈장"을 수상하였다. (한국군전사편찬위원회 공식기록인용, 편집)
주월한국군사령부에 파견된 특사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진 보고서. (편집)
"작전명: 짜빈둥 기습방어전"
존경하옵는 대통령각하!
본관은 대한민국국군 주월사령관으로부터, 우리국군의 용맹한
전과를 보고받아 각하께 올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본 전투는 구랍 2월 14일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가 1개중대의 방어 병력으로
1개 연대의 공산군 기습부대를 격퇴시켜 혁혁한 전과를 거둔 전투로서,
지금까지의 월남전 사상
가장 빛나는 승전기록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전투라 사료됩니다. (중략)
당시 제3해병대대 11중대가 배치되어 있던
짜빈둥(광나이성 손틴군.추라이지구)진지는 남북간 약 300미터,
동서간 약 200미터 가량 되는 나직한 야산에 구축해 놓은 4주 防禦陣地 입니다.
교통호로 연결시켜 놓은 각 진지 외곽에는 조명 지뢰군과,
단선 철조망을 매설하거나 가설하고, 그 안쪽에는 개인지뢰,
그리고 그 안쪽에는 5중으로 된 원형철조망을 가설해 놓은 견고한 진지였습니다.
청룡부대에서 이처럼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까닭은
1967년 초 추라이지구로 침투한 월맹군 제2사단이 해병여단 본부와
포병대대 및 추라이의 美海兵隊 비행장을 차례로 공격하여 추라이 지구에서의
전세 역전을 획책하고 있었고, 짜빈둥이 그 관문지대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해병여단본부에서는 짜빈둥 진지에 제1해병대대 1중대에서
차출한 1개 소대(3소대)를 배속시켜 병력보강을 도모하는 한편 105 밀리 야포 1문을
11중대에 배치하는 등 가능한 조치를 사전에 강구했던 것 입니다. (중략)
짜빈둥 진지가 일제히 돌격해온 적 주공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은 시각은 2월 15일 새벽 4시 10 분경 이었고,
공격에 투입이 된 적 병력은 증강된 1개 연대로 추산됩니다.
60밀리 박격포와 82밀리,120밀리 및 4.2인치 重박격포의 支援 하에
새벽녘의 허를 찌른 적 공격부대는 2개대대를 주공방향인
3소대 정면에 투입하고 1개 대대의 조공부대를 2소대 정면에 투입했는데,
그 3소대쪽 접근로 상에는 관목이 빽빽이 우거진 암석지대가 있었습니다.
공산군의 지원포격이 개시되자 우리중대원들은 반사적인 대응으로
단 한문이 배치되어있던 105밀리 야포를 활용, 포탄을 적의 예상 접근로에 강타하여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하는 한편 진지 전방의 장애물지대에 VT.탄을 때리기 시작했고,
적 포탄이 진지 후방으로 연신 되며 적이 돌격전을 감행할 시기에는 진지 전방의
장애물지대 상공에 무수한 조명탄을 밝히는 가운데 중대의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공격력에 타격을 가했습니다.
적이 돌격을 감행해오자 3소대 대원들은 어둠을 밝혀주는 조명탄 불빛아래
필사적인 최후 저지사격을 가했으나 4시 40분 경에 이르러 3소대 진지에는
두 군데나 구멍이 뚫려 그 구멍으로 적병들이 물밀 듯이 난입하는 바람에
1분대 진지와 화기반 진지에서는 처절한 육박전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소대 1분대장 "배장춘하사"는 다급했던 나머지 중대장에게 보고를 마치기도 전에
들고 있던 무전기를 버리고 교통호 위에 놓인 야전삽과 곡괭이를 집어 들고 좌충우돌,
2-3명의 적병들을 때려 누이다가 그도 역시 어깨와,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
유혈이 난자 한 상태에서 2소대 쪽으로 후송을 당했고,
분대장을 대신해 "진지를 사수하라!!!"고 외치고 있던 1조장 "이학현상병"은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몸으로도 난입해 오는 적에게 실탄을 퍼붓다가
수명의 적이 약 20미터 전방의 오물통(똥통)속으로 뛰어들자 질풍같이 달려가
그 오물통 속에 빠진 적병들을 수류탄으로 폭사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급히 교통호로 돌아온 그는 분대장 "배장춘하사" 쪽으로 수명의
적병들이 접근해 가자 수류탄으로 그들을 처치하며 분대장의 위기를 구했으나
오른쪽 발목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도성룡일병"도 전사를 했고, 다른 일각에서 버티고 있던
"조정남상병"과 "김중대일병"도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보이며,
"윤창호", "전수철", "김명덕", "방기장일병"과 "배장춘하사"등은 중상을 입는 등
분대장을 2소대 진지로 부축해 간 "이영복일병"을 제외한 1분대 전원이 전사를 하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또한 거의 같은 시각에 돌파 당한 화기반 진지에서도 경기관총 사수 "김낙성상병"이
적탄에 맞고 쓰러지자 부사수 "이내수일병"이 사수를 대신하여 계속 방아쇠를 당겼고,
그가 쓰러지자 1번 탄약수 "오준태일병"이. 그리고 그마져 쓰러지자 2번 탄약수
"송영섭일병"이 기관총을 붙들고 사투를 계속하다가 그도 또한 장렬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중략)
3소대 1분대 진지가 무너지자 약 20분 후 2분대 진지도 무너지고 말았으나
3분대 진지에서는 분대장 "송영옥하사"의 진두지휘 하에 BAR사수들이
계속 불을 뿜을 수 있도록 M1사수들이 BAR탄창에 실탄을 끼워주고
BAR의 총신이 과열하자 M1사수들을 위해 BAR사수들이 M1소총의 빈 클립에
실탄을 끼워주어 계속 불을 뿜게 하다가 소대장 "이수현소위"의 명령에 따라
2선으로 철수했고, 2선에서는 3소대에 배속되어 있던 1중대 3소대1분대 대원들이
철주를 뽑아들고 좌충우돌하고 있는 分隊長 "김경동 하사"의 진두지휘 하에
수 십명의 적과 혈투를 벌였으며, 2소대에 배속되어 있던 1중대 3소대 3분대의
"이다성상병"과 "김희도병장" 및 통신병 "이정식상병"은 최후의 순간까지
용전분투 하다가 산화했습니다.
더구나 이런 와중에 적진에서 발사한 4.2인치 포탄이
아군 4.2인치 중박격포의 탄약고에 명중되어 아군진지는 수라장으로 화하였고,
그런 틈을 타서 3문의 화염방사기를 앞세운 적 특공대가 화염을 내 뿜으며 돌진해 왔습니다. (중략)
공산군의 조공부대가 투입이 된 11중대 1소대 진지에서는
소대장 "신원배소위"와 2분대장 "이중재하사"등 용맹한 대원들이
陣內로 침투한 적 화염방사기 사수를 공격하여 화염방사기 1문을 노획했고,
먼동이 틀 무렵에는 1소대 진지 전방 약 100미터 지점의 바위 뒤에서
10여 명의 적병들이 대전차 유탄포와 로켓포 등을 가지고 아군진지를 공격하는 것을
"이 진병장"과 "김용길중사"등이 수류탄을 투척하여 섬멸한 후 유탄포3문을 노획했습니다. (중략)
그 날 새벽 11중대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陣內에 돌입해 백병전을 펼쳤던 적은 약 1개중대 였으며,
날이 샐 무렵까지 계속된 피아군의 혈전은 3선 근처에서 적을 견제할 수 있었던
중대장 "정경진(丁京鎭)대위"가 11중대 1소대의 1개 분대를 좌측으로,
2소대의 1개 분대를 우측으로 전개하여 돌파구를 양쪽으로 포위하는 한편
중대본부에 배치된 4문의 3.5인치 로켓포로 맹공을 펼치는 가운데
화기소대장 "김기홍중위"로 하여금 중대본부 요원과 일부 3소대 병력으로
특공대를 편성하여 중대본부 바로 아래쪽으로 돌격을 감행케 하여 들쥐새끼들 처럼
진지를 빠져나가고 있는 적을 공격, 섬멸함으로써 작전을 종료시킬 수 있었습니다.
본관이 직접 돌아본 바에 의하면 격전이 치루어졌던 그 짜빈동 진지는
한마디로 끔찍한 인간 도살장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3소대 진지 전방의 장애물지대(철조망과 지뢰매설지대)와 교통호 안팎에는
수많은 공산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백병전이 벌어졌던 교통호에는
본관이 직접 시찰하는 순간까지 시뻘건 피가 발목이 잠길 만큼 흥건히 고여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이 거둔 전과는 敵射殺- 243명, 포로- 2명, 화염방사기-3문,
대전차포- 6문, 경기관총- 2문, 4.2인치 重박격포- 1문, 75밀리무반동총-7정,
수류탄-350발, 등이 있었고, 아군의 피해는 전사- 15명, 부상-33명에 불과 했습니다.
= 중략 =
월남이 전장화된지 십여년만에
최대의 승리를 공산군측으로부터 빼앗은 짜빈동 전투는 많은 기록과 화제를 남겼다.
전투가 끝난 그날 아침부터 3월 중순경에 이르기까지
짜빈동 진지와 청룡부대 본부에는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전투당일 오후에는 미 해병대 제3상륙군사령관 "월트 중장"과 전투가 시작되기 전날
시찰차 월남에 도착했던 "강기천 해병대 사령관" 및 한국 언론계의 중진들이 방문했고,
16일에는 월남군 최고사령부 참모부장과, 주월한국군사령부 작전참모 및 UPI기자들이,
그리고 17일에는 "정일권 국무총리", "김성은 국방장관"이 "신상철 주월대사"와 함께
방문을 했으며, 21일에는 월남공화국의 국가원수 "티우대통령"과 "키 수상" 및
"람 1군단장" 일행이 방문하는 등 귀빈들의 방문이 그치지를 않았다.
특히 월남군 과 미군 당국에서는 전술연구반 을 보내어 진지견학과
방어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게 했고, 또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하여
"강서룡 국방차관"과 "장창국 합참의장", "주월 미군사령관"등 이
짜빈동전투에 참가한 청룡여단 장병들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와 장병들의 사기를 높혔다.
당시 전투의 승전보를 지면에 보도한 세계각국 신문의 머릿 기사들이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듯 월남전 사상 최대의 전과를 거둔 짜빈둥 전투처럼
대서특필된 승전보도, 기사도 2차세계대전이래 일찌기 없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국내의 여러 신문들 중 맨 먼저 특종으로 보도했던 신문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가 특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청룡부대장의 지시에 따라 16일에 개시할 한.미. 월남군 합동작전(거룡작전)을 취재할
종군기자들을 안내(초청)해 오기 위해 미 해병대의 C-47 수송기 한 대를 빌려
정훈참모실 공보장교 "정기인 중위"를 사이공으로 보냈는데, 중앙, 동아, 한국등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위험한 곳으로 가기를 꺼려했지만 조선일보사의 "목사균 특파원"만이
용산 고등학교 후배인 정 중위의 간청에따라 스스로 용기를 내어 따라 나섰기 때문 이었다.
기록 가운데 가장 빛나는 기록은 훈장과 특진의 기록이다.
이 전투에 참가한 모든 사병들에게는 일 계급 특진과 함께, 전 장병에게는 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해병여단장 "김연상 준장"에게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지만, 특히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에겐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정부의 은성 무공훈장,
"하사 배장춘", "중사 김용길", "상병 이학현", "상병 조정남" 에게는 을지 무공훈장,
중위 김기홍", "일병 이영복"을 비롯한 8명에게는 충무무공훈장,
나머지 장병들에게는 화랑무공훈장과, 인헌 무공훈장이 각각 수여되었다.
이처럼 엄청난 훈장의 기록은
대한민국의 훈포장법이 제정된 이래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제2해병여단본부를 방문한 월남공화국 "티우 대통령"과 "키 수상"을 위한
브리핑 석상에서 "키 수상"은 이런질문을 했다.
"청룡부대 장병들은 육박전을 할 때 상대방의 갈빗대도 부러뜨린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그 질문에 작전참모 "오윤진 중령"이
실전에서는 그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전제한 다음 손가락을 펴 보이며
"이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눈알도 쑤셔 빼지요" 라고 말해 질문자를 경악하게 했다.
또한 한국군주월사령부 보도실에서 가진 외신기자들을 위한 브리핑 석상에서는
어떤 외신기자가 이런 질문을했다.
"월맹군이 얼마나 강하더냐?"
이에 중대장 정경진 대위가 말하길, "매우 강하더라,
그러나 우리 청룡들 보단 덜 강하더라"고 답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나중에 청룡부대의 브리핑 장교들이 상대방의 눈알을 쑤셔 뺀다는 말을 한데 대해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그렇잖아도 한국군이 잔인하다는 말이 있는데,
하필이면 대통령앞에서 그런 말을 하느냐"며 주의를 환기시켰다고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김성은 국방장관은
"죽기 아니면 살긴데, 까짓거 눈알이 아니고 불알을 잡아떼면 어때" 하면서
브리핑 장교들을 두둔했다는 말이 에피소드로 함께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