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이 사랑한 기녀 · 1, 강아(江娥)
곡우(穀雨)를 앞두니 온 산에 연분홍 산벚꽃과 순백의 조팝나무가 만발했다. 송강이 잠들어 있는 충북 진천의 환희산(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자락이나, 송강이 사랑하고 죽는 날까지 송강 곁을 지켰던 강아(江娥)가 잠들어 있는 송강마을(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도 봄이 흐드러져 있다.
마침 올해가 기축년으로 기축사화가 일어난 지 4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데, 송강이 정치적으로는 숱한 정적(政敵)을 만들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일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에게 맡기고 나는 그의 문학적 발자취와 사랑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정철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관동별곡> 등의 주옥같은 가사와, <장진주사>, <훈민가> 등의 수많은 시조를 남겼다. 정철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그가 청소년기와 중년기를 지낸 전라남도 담양, 부모의 상을 당해 6년간 시묘살이와 4년간의 칩거생활을 한 고양 신원리의 송강마을, 말년을 불우하게 지내고 생을 마감한 강화 송해면의 송정촌(松亭村), 그리고 그가 영원히 잠들어 있는 충청북도 진천의 환희산 자락 등이다. 그러나 담양은 몇 해 전에 샅샅이 뒤지고 왔던 곳이고, 강화 송정촌은 아무 유적이 없는 곳이라 의미를 상실한 곳이기에 제외시키고 송강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진천과 송강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 충북 진천의 정송강사>
네비게이션에 ‘정송강사’를 쳤다. 친절한 네이게이션은 집에서 정송가사까지의 거리며 노선을 정확하게 일러 주었다. 이제는 굳이 독자들에게 가늘 길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송강마을’ 역시 네비게이션이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토요일 오후의 중부고속국도는 행락차량으로 붐볐지만 밀려가고 다가오는 연봉들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로 지루한 줄을 몰랐다.

<정송강사에 모셔진 송강의 영정과 위패>
정철은 1593년, 그의 나이 53세에 강화 송정촌에서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듬해 부모의 묘가 있는 고양 신원리 선영에 안장되었다가 1665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아무 인연도 없는 충북 진천으로 이장된다. 굳이 인연을 말하자면 송강의 현손(玄孫, 5세손) 양(瀁)이 진천현감으로 있을 때 마침 우암이 이곳을 지나다가 묘자리를 잡아 준 것이다. 고양의 송강의 묘 자리가 물이 많이 나는 바람에 문중의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우암이 현손과 상의하여 묘를 이장하고 사당인 ‘정송강사(鄭松江祠)’를 지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송강 부부의 묘소(뒤쪽)와 둘째아들 종명의 묘소(앞쪽)>
사당에는 정철의 영정을 모셔 놓았고, <사미인곡>을 새긴 시비,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 등이 있다. 사당 입구의 왼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송강의 부부 묘소와 둘째 아들 종명의 묘가 있다. 종명은 효성의 지극하여 송강이 내 발밑에 묻어 달라 유언을 남겼기에 함께 이장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송강의 맏아들 기명은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요절하였다. 정송강사 앞에는 송강의 16대 종손인 정구성(鄭求晟, 1945년생) 씨가 살고 있는데 매년 한식 때를 맞아 한식 차례를 올린다고 했다.

<문백면 봉죽리의 환희산 전경 - 소강의 묘와 사당이있는 곳>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고려 초에 축조되어 현존 동양 최고(最高)의 ‘진천 농다리’와 사계절 아름다운 야생화를 볼 수 있는 용인의 ‘한택식물원을 들러볼 만하다.
다음날 아침에는 송강마을을 찾았다. 벽제화장장 근처 양지바른 화산(華山)에 송강 집안의 선산이 있다. 이곳에는 송강의 부모와 장남, 그리고 그가 사랑했고, 그를 사랑했던 기녀 ‘강아’의 묘가 있다. 의정부에서 원당으로 이어지는 39번 국도변 마을 입구에는 송강의 시비가 서 있고, 마을입구는 온통 갈빗집이다. 갈빗집 골목을 따라 100m 남짓 들어가면 오른쪽에 이은만 씨(69세)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송강문학관이 있다. 그는 이곳이 고향으로 정철을 비롯한 고양시의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를 찾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친 분이다.

<39번 국도 변 송강마을 입구에 있는 송강 시비. 임창순의 글씨>
송강문학관 뒤 야트막한 산에 의기강아묘(義妓江娥墓 )가 있다. 묘비의 뒷면에는 정철이 그녀와 이별 때 써 준 시 <영자미화(詠紫微花)>가 새겨져 있다.

<송강마을 뒷산에 있는 강아의 묘소>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의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여 다투리.
一園春色紫薇花 일원춘색자미화 纔看佳人勝玉釵 재간가인승옥채
莫向長安樓上望 막향장안누상망 滿街爭是戀芳華 만가쟁시연방화

<강아의 묘비 뒷면. 강아에게 준 송강의 시가 새겨져 있다.>
자미화는 무려 100일 동안이나 핀다는 배롱나무, 즉 목백일홍이다. 송강의 눈에는 강아가 그런 미인이었을 것이고, 이별 후에도 뭇 사내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물까 두려웠던가 보다. 강아는 송강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 시 남원의 동기(童妓)로 정철이 그녀를 몹시 사랑하자 세상 사람들이 송강의 ‘강’자를 따서 ‘강아(江娥)’라 불렀다. 송강은 1582년 9월 도승지로 임명되어 떠날 때 강아에게 이 석별의 시를 지어주고 한양을 떠났다.
그 후 강아는 송강에 대한 연모의 정이 깊어 평안도 강계로 귀양 가 위리안치(가시덤불로 집 둘레를 막고 그 안에서 살게 함) 중인 송강을 찾았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대왕의 특명으로 송강은 다시 소환되어 1592년 7월 전라. 충청도 지방의 도제찰사로 임명되었다.
강아는 다시 송강을 만나기 위하여 홀홀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적병에게 붙잡히자 의병장 이량의 권유로 자기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적장 소서행장을 유혹, 아군에게 첩보를 제공하여 결국 전세를 역전시켜 평양탈환의 큰 공을 세웠다는 미담이 전한다. 그 후 강아는 소심보살이란 이름으로 입산수도하다가 고양 신원의 송강 묘소를 찾아 한 평생을 마감하였다.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강아의 묘에 시제를 지내 준다고 한다.
송강문학관 마당에서 다시 길을 따라 50m 남짓 올라가면 야트막한 고개정상에서 오른쪽으로 200m 쯤 가면 송강 부모의 묘와 큰아들의 묘가 나온다. 묘에 이르는 숲길에는 산벚꽃이 만개하여 발걸음을 흥겹게 한다.

<송강마을 뒷산에 있는 송강 부모와 큰아들 기명 부부의 묘소>
송강문학관에서는 매년 5월 말 송강문학축제를 개최한다. 올해는 5월 29일(금) 오후에 연다고 하니 학생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한 번 봄나들이를 계획하는 것도 산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송강마을 입구는 온통 갈빗집이니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될 듯.

<전남 담양의 송강정. 왼쪽에는 죽록정이라는 액자를 달았다.>

<전남 담양의 송강정>
첫댓글 아...........강아........... 그런데 그림이 안 보이네용^^
정철이 강아와 이별할 때 써준 시,
정말 오그라드네요 ㅎㅎ나의 손발은 어디로?';;;
아....강아라는 기생 처음 들어보지만 정말 당찬 여인이었네요~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오~정철의 사랑이야기ㅎㅎㅎ역시 이런 여담이 좋죠ㅋㅋ
앗 사진이 보이면 더 좋을텐데
시가.. 예쁜 사랑.. ㅎㅎ;
옛날남자들은 참 바람둥이예요..
정철의 사랑이야기 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사랑이야기가 흥미로워요 ㅋㅋ 그림이 엑박뜨는게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