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10월21일(수)맑음
비봉산 아랫길 끼고 동네 한 바퀴 돌다. 비봉산 둘레길 앞 도랑 버려진 쓰레기가 버려진 인심을 말해준다. 언덕 가장자리는 도토리 줍는 사람들이 밟아삐대어 땅껍질이 까여나가 맨흙이 드러났고, 골목 후미진 곳마다 학생들이 피다버린 담배꽁초와 담배 곽들이 널브러져 있구나. 전봇대 옆에는 쓰레기 더미들 들쭉날쭉 쌓여. 사람들은 너무 많이 소비하고 많이 내다 버린다. 돈이 사람 사이를 돌아다니며 욕망을 부추기나. 욕망이 부풀려지니 소비가 늘어난다. 세상이 모두 잘 살자고 설치니 어느 누가 욕망을 줄여 적게 소비하자고 하랴?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은 확실한데, 삶의 수준에 걸맞는 공공의식은 미숙하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신뢰가 부족하다. 그 점이 아쉽다. 그러나 어찌 하랴? 지네들이 자각하여 스스로 변화할 때까지는 별 수 없이 이렇게 살아야지.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이 살아가는 꼴을 바라본다. 나는 도시의 방랑자요, 여행자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가고, 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간다. 그들과 내가 평행선을 달리다가 혹 어디선가 만나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 저녁에 수요명상을 하다. 참석자가 많다. 가을 소풍 이야기를 하다. 돌아와 伽羅가라향을 피우고 컴퓨터를 켜다.
2015년10월22일(목)맑음
자고 일어났더니 몸살기가 약간 있는 듯. 운동복을 입고 두 시간 더 자다. 오후에 죽향으로 나갔더니 주인장은 외출 중. 日默일묵스님 동영상 강의 듣다.
2015년10월23일(금)맑음
가을 왔나, 오기는 왔나? 가을답지 않게 덥고 건조. 방이 건조했는지 목젖이 부었다. 죽향에서 일광스님과 잣죽을 시켜 먹다. 진주성을 한 바퀴 돌다. 스님에게서 숯 두 덩이를 얻어와 냄비에 물을 붓고 숯을 세워놓다. 자몽 열 개를 얻어 냉장고에 넣다.
2015년10월24일(토)맑음
대견(大見慈林)스님이 오셨다. 송광사 출가도반. 대만에서 젊은 시절 보내며 수행에 열의를 다했다. 대만불교 이야기, 계율이야기로 밤늦게 까지 법담 나누다.
2015년10월25일(일)맑음
새벽에 일어나 정진. 깨죽을 데워서 나눠먹다. 비봉산으로 포행 갔다 돌아와 차 한 잔. 죽향에서 문아보살이 정성스레 차린 점심을 현명스님이 와서 함께하다. 현명스님은 청학동 들어가는 어귀에 암자를 지었다. 햇볕에 거슬린 얼굴이 고생했음을 말해준다. 손수 기른 토마토와 고춧가루를 가져왔다. 단송거사와 문아보살, 현명과 대견스님은 대만의 차 이야기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 대견스님은 서울로, 현명스님은 서부시장으로, 나는 집으로.
객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주인도 객이었구나!
2015년10월26일(월)맑음
월요명상. 바쇼의 하이쿠로 시작하다.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도
나비가 못 되었구나
신입생에게 법명을 주다. 超有, 超然, 超我, 寶雲, 眞雅, 聞印, 香印. 21명 참석.
모임이 파하여 돌아서는데
찻잔에 담긴 가을 달이 웃네
2015년10월27일(화)맑음
입김인 듯 흔적 없이 지나간 하루. 시간은 투명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아. 바람은 형체가 없지만 나뭇잎을 흔들거나 볼을 간질일 때 그의 움직임을 느끼지. 하지만 시간은? 시간의 발자국 소리를 듣기 위해선 깨어있어야 할 걸. 마음이 깨어있지 못해 흐리멍덩하거나, 주의가 흩어진 상태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지. 흔히들 즐거움에 빠질 때 시간을 잊었다고 표현하지만 그건 몰아의 황홀이 아니고 망각이지. 잊고 싶겠지. 시간이 가는 게 뭐 좋다고.
시간은 눈에 띄지 않게 와서 얼굴에 흔적을 남기고 간다, 주름살.
시간이 몸을 밟고 간 자국, 늙음.
사람사이를 밟고 가면, ‘변한 관계.’
삼라만상은 시간t의 함수f(t). t는 무적불패의 변수. 결국 t가 모든 것을 정복하여 승리한다. 그러나 붓다는 t를 이겼고, t를 가지고 놀았다. t를 순방향으로 따라가기도 하고, 역방향으로 거슬러 가기도 하면서 t에 휘둘린 사람들에게 t를 보는 눈과 t를 다루는 기술을 가르쳤다.
밤에 낙엽을 밟으며 동네 한 바퀴 돌다.
2015년10월28일(수)맑음
제로zero가 된 사람이 있을까? 1이 된 사람은 누구인가? 1은 외로워 <1+1>로 살고 싶은가? 그런데 <1+1>은 2인가, 0인가? <1+1=엉망진창>일 수도 있다. 세상은 <1+1+1.......무한연속>이다. 이것을 편의상 W라고 하자. W는 유한수이고 갇혀있다. W의 내용은 무한이고 열려있지만, W자체는 유한이며 갇혀있다. 어디에 갇혀있나? t와 n에 갇혀있다. t는 시간, n은 숫자.
수요명상하다. 김기택 시인의 <직선과 원>을 소개하면서 강의를 시작하다. 시는 세상을 떨어져서 바라보지 않고 사는 자의 삶이란 목줄을 매고 살아가는 개 같은 삶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개 같은 삶을 살지라도 눈뜬 개가 되면 좋겠지. 눈뜬 개는 달을 보고 짖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호흡을 관하여 ‘개 됨’을 놓아버리고 넘어간다.
바쇼芭蕉가 달을 읊었다.
한밤에 남몰래
벌레는 달빛 아래
밤을 갉는다.
2015년10월29일(목)맑음
어제인 듯 오늘. 오늘인 듯 어제. 무얼 했던가? 한 숨 사이(瞬息間순식간)에 사라져간 하루. 무슨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하루. 산모퉁이 아무렇게나 던져진 돌멩이처럼 앉았다가, 하늘에 묽은 구름 흘러가듯 흘려보낸 하루. 몸은 가을 연못에 가득한 물이다. 고요하게 흐르는 몸은 사방 팔방공간으로 퍼져나간다. ‘몸’이라 뭉쳐진 것이 뭉그러져 널브러지니 안개처럼 부드럽고 가볍고도 얇다. 나는 무엇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고, 어떤 것이 되지도 않는다. 나는 나로부터 벗어나 있다. 나는 나가 아니다. ‘있음’과 ‘됨’은 흐름일 뿐, 나의 것이 아니며 나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은 눈眼이요, 봄見이다. 그저 그럴 뿐이다.
2015년10월30일(금)맑음
초록보살이 아미화와 정안을 점심 초대했다. 사천 바닷가를 굽어보는 하얀 집에서 점심을 먹다. 동네 커피 집에서 차담을 나누며 도반끼리의 정을 나눈다. 연우담에 들러 靑芽청아보살을 보다. 저녁 죽향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단정과 허윤정을 만나다. 내일 소풍에 동참하기 위해서 내려왔다. 저녁 먹고 진주성 한 바퀴 돌다. 늦가을 풍취, 고적한 성안의 야경, 살랑 부는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바스라지게 밟고 집으로 오다. 단정과 허선생 따라와 방에 들이다. 대학시절 그렸던 그림이 실린 스케치북을 보여주며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해주다. 택시 타는 데 까지 바래다주다.
2015년10월31일(토)맑음
가을 소풍가다. 함양 上林상림 숲에 모이다. 늦가을 날씨 쌀쌀한 바람 불어 춥게 느껴진다. 학생들이 잔디밭에 자리 깔고 모여 앉아 문아가 준비한 대추차를 마시고 초록이 가져온 빵을 먹으며 온기를 보충하다. 올해 가을 기온이 높고 건조했기에 단풍이 멋지게 물들지 못했다. 그래도 짙어가는 갈색조의 오솔길을 걸으며 학생들과 환담을 나누니 自然自樂자연자락이 넉넉하다. 구름 걷힌 가을 하늘 못에 비치니, 청량한 빛 끝없음을 누구와 더불어 나누랴? 도과선원 학생들과 같이 나눌 일이다. 숲길을 한가로이 노닐기도 하며, 강 뚝에 올라 秋水추수를 굽어보니 물가에 갈대꽃 하얗게 피어있고 물 가운데 바위에 오리가 네다섯 모여 햇볕을 쬐고 있다. 슬금슬금 걸으며 한 마디 두 마디 주고받는 말 가운데 웃음과 미소가 퍼지고 햇살이 쏟아져 한 나절이 다갔다. 자리를 옮겨 <달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 여섯 대 차를 나눠 타고 灆溪書院람계서원으로 갔다. 灆자는 ‘물 맑을 람’자. 一蠹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을 기리는 취지에서 세워진 서원. 蠹자는 ‘좀벌레 두’ 자. 시골마을 곳곳에 저물어가는 산 그림자처럼 뻘쭘하게 서있던 서원이 이제는 문화자원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서원의 누각에서 조용히 차 자리를 벌리려 했던 처음 의도와는 달리, 바깥바람이 차서 실내에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서원해설사의 열정과 관심은 대단하다. 손님들을 위한 행랑채에 모여서 차와 다식을 들었다. 주의가 분산되어 지리멸렬. 학생들의 마음을 모으는 마당이 되지 못했다. 문을 나서니 오후4시. 저문 오후 늦은 시각이다. 진주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호연정사 가보고 싶은 사람은 용추계곡으로. 호연정사 올라가니 晩秋景色만추경색이 완연하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가을이 떨어지는 긴 계곡을 따라 돌아오다. 호연거사 저녁을 한 턱 내다. 호연, 송계, 소암, 도향, 명안, 향원, 반야성이 끝까지 함께 하다.
돌아와 율곡선생의 <山中>을 읽다.
採藥忽迷路, 채약홀미로
千峯秋葉裏; 천봉추엽리
山僧汲水歸, 산승급수귀
林末茶煙起. 임말다연기
약초 캐다 문득 길을 잃었네,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었구나!
산승이 물 길어 돌아가는 곳
숲 끝에서 차 달이는 연기 아련히 피어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