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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태복음 6 : 28 - 34
제목: 하물며 너희들일까 보냐
일시: 2017. 5. 21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삶은 걱정으로 똘똘 뭉쳐 있다
전 요즘 걱정거리가 많다. 아니 늘 많아 왔다. 특히 시험이 있는 시즌이 아닌가! “Uni.든 미대든, 음대든 총 40여명의 지체들”이 수험생들이다. 원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이런 저런 지체들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혹 “명단”에서 빠지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몇 명이다” 라는 “수”만 이야기한 것이다. 그 또한 정확히 “40명”이 아니라 “40여명”이라고 표현했다. 혹시 정확치 않을 수 있고 혹 몇 명의 이름만 쭘바이슈필로 거론하면 이름이 거론된 지체들은 “목사님도 주책이지 나만 시험보나? 왜 하필 내 이름을 불러 유난스럽게 하시나?”라고 할 것 같고 혹 어떤 다른 지체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말하면서 왜 내 이름은 빼냐”고 말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수험생하면 음대를 주로 생각하는데 그래서 저는 늘 미대와 Uni를 아주 의식한다. 시험시즌이라고 했지만 음대수험생들이 본격적으로 시험에 들어간 것이지 이미 미대는 마패를 준비하여 제출하기에 바빴을 것이고 Uni. 수험생들은 표시도 안 나게 시험의 부담감속에서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언어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수트페마다 시험 시기가 다르기에 자신만의 시험여정을 위해 씨름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재학생들은 시험이 없는가? 졸업시험은 아무것도 아닌 줄 아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나서 활동을 위한 플라츠는 저절로 들어가는가? 그 역시 시험이다. 시험이야기만 해서 그렇지 그 외 건강, 가정, 결혼, 출산, 직장, 미세먼지, 정치, 경제... 이 모든 것을 생각하려고 하면 염려와 걱정으로 숨이 막힐 정도이다.
II. 나를 포기하지 말고 걱정을 포기하라.
이 수많은 걱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수많은 걱정과 염려거리들로 좌절하고 절망하여 “나 너무 피곤해 여기서 그만 끝낼래”라고 “나”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 염려와 걱정거리를 포기하여야 한다. 내가 주저앉아서는 안 되고 염려와 걱정을 주저 앉혀라. 그 녀석들을 결박하여야지 내가 결박당하면 안 된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으로 염려와 걱정이 내게 올 때 그 녀석들을 걱정되게 해 주라. 내가 염려와 걱정을 하지 않으면 그 녀석들은 오히려 고민하면서 돌아갈 것이다. 염려가 “왜 염려 안하지”라고 근심어린 얼굴로 돌아갈 것이다.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근심하면 근심하게 하는 녀석에게 지는 것이다.
걱정을 왜 포기해야 하는가? 걱정과 염려는 우리 삶의 부분이기에 포기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우리 인생에 끼어드는 수많은 걱정과 염려들! 그 걱정과 염려 속에 찌들어 살 것인가? 34절을 보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주님은 매일 염려거리가 있으니 내일 있을 염려를 앞당겨서 한꺼번에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오늘 뿐 아니라 어차피 내일도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염려는 일상생활이다. 그러기에 염려를 염려로 삼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걱정을 포기하지 않으면 평생을 얼굴 찡그린 상태로 살게 된다. 인생의 모든 걱정거리들을 문제로 보면 다 문제이다. 잘 되도 걱정 못 되도 걱정이다. 일이 많아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다. 아이가 생겨도 걱정 안 생겨도 걱정이다. 잘생기면 얼굴 값한다고 걱정 못생기면 견적 많이 나온다고 걱정, 딸이면 시집가서 아이 낳을 걱정, 아들이면 군대 갈 걱정, 교회가 생기면 돈 들어가고 관리할 걱정, 교회건물이 없으면 늘 쫓겨 다니고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할 걱정. 요즘 입시 시험이 있다.
한국에서 그렇게 수많은 시험이 있더니 이곳으로 왔다. 배움을 위하여 시험을 치른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입학해 보면 많은 시험이 기다린다. 그리고 졸업시험이 있다. 졸업으로 끝이 아니라,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 된다. 취직시험이 있다. 취직하여 활동을 시작했다고 끝이 아니다.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면 다음 자리로 가고 싶어 한다. 올라가면 이제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염려를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내 자신이 염려거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염려거리는 물론 중요하고 내 인생에 귀한 것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귀하다고 해도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염려거리를 포기하더라도 나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25절을 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등이 다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 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염려를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삶의 어떠한 것도 내가 걱정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27절을 보라.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즉, 염려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은 참 날씨가 아주 덥지도 않고 청명하고 좋다. 할레교회는 “자연예배”라고 해서 밖으로 나가 예배한다고 한다. 지난 주 우리는 하루 종일 날이 좋았는데 딱 나갈 그시간에 비가 어설프게 와서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 날을 위해 그 전 한주간 내내 걱정을 했다. 비올까봐 걱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일 아침 맑아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예배 이후에 비가 심술궂게 왔다. 많이 온 것도 아니고 밖에서 하기에 좀 불편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모든 행사가 다 끝났을 때 해가 화창하게 맑았다. 약간 약이 오르기는 했다. 왜냐하면 한 주일 동안 가슴 졸이고 걱정했던 것이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을 이라는 생각을 하니 말이다. 걱정하지 말라. 아무 도움이 안된다.
오늘 말씀은 간단히 말하면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조금은 걱정을 한다.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걱정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걱정거리가 나로 걱정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교만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걱정해 주는 척 하는 것이다. 만약에 염려 걱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저는 매일 걱정하겠다.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 하며 심하면 오도방정을 다 떨겠다.
III. 걱정을 포기해도 좋은 근거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의 걱정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걱정이다. 그런거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쫓아갈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를 쫓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입을 것 마실 것 먹을 것을 것을 쫓아가는 그 노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주님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최고의 의상을 입게 된 백합화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입은 솔로몬을 비교하고 있다. 백합화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그 백합화가 그렇게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 데도 수고를 해서 입은 것이 아니다. 길쌈도 안한다. 길쌈은 실을 내어 옷을 만드는 것이다. 금실로 만들기도 하고 목화로 만들기도 하고 누에비단으로 만들기도 한다. 안하는 데도 얼마나 대단한가! 반면 모든 부귀영화의 대명사이며 최고 화려한 왕을 등장시킨다. 솔로몬이다. 그는 그의 모든 영광으로 최고의 것을 입었다. 하지만 백합화 하나만 못한 옷이다. 노력한 솔로몬과 그저 가만히 있는 백합화를 보라. 일은 하나님이 되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들의 백합화가 자라는 것이나 공중의 새가 날아다니는 것이나 천부께서 돌보시기에 그렇게 유지된다.
어느 자매는 이메일이 아이디가 ggg이다. 웬 트리플 g냐고 물었더니 아주 세속적으로 답을 해 주었다. Gesundheit(건강), Geld(돈), Gluek(운) 이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바람이고 다 좋지만 결정적인 하나의 g가 빠졌다. 무엇인가? Gott 이다. Drei g도 좋지만 Die gross G 즉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막으시면 막힌다. 열면 열린다. 일은 그렇게 저절로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예쁘게 하면 돈 번 것이다. 인간이 하려면 견적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잘 돌아가는 머리만 주셔도 돈 번다. 하나님이 지혜 주셔서 뭐 하나만 개발해 내면 되는 것 아닌가! 운동하는 청소년들도 있는데 하나님이 해 주시면 골인도 넣을 수 있고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들보다 몇초만 더 빠른 발과 순발력만 허락하시면 축구월드컵선수에 뽑히게 될 것 아닌가!
솔로몬은 맥시멈으로 한 것이 그 정도이다. 그러나 백합화는 하나님이 아주 평범하게 해 주신 것이다. 백합화가 그렇게 아름다우면 영원히 젊음과 싱싱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영원히 남는 걸작이 되어야 하는데 아주 흔한 것처럼 그냥 시들게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있다가 없어질 들풀이요 꽃일 뿐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꽃을 금방 시들게 하시다니. 허망하지 않는가? 저는 목련도 좋아하는데 그 꽃을 피려고 할 때 슬프다. 왜냐하면 봄비가 한번 오면 처절하게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냥 시들뿐 아니라, 그 아름다운 것을 땔깜으로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우리가 염려 걱정을 포기해도 좋은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단어와 멋진 표현이 있다. “하물며”라는 단어이다. “하물며 너희들일까 보냐?” 3대 하물며가 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7:11). 누가복음 18장의 과부의 기도를 보라. 그가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할 때 번거롭게 하는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준다. 하물며 하나님이 그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달라고 걱정하고 있지만 백합화도 입히시고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천부께서 자녀들을 그냥 방치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들”는 누구냐? 하물며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천부이다. heavenly father이다. Himmlischer Vater 이시다. 32절을 보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천부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무엇이 필요한 줄 다 알고 계시고 최고의 것을 주신다. 우리는 주님의 우산아래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IV. “그런즉” 결론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나님을 내 삶의 가장 중심에 두라는 것이다. 염려와 걱정이 우리에게 몰려 온다고 할찌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다른 걱정거리를 중심에 두면 흔들린다. 걱정거리를 중심에 두어보라 흔들거린다. 나의 삶의 균형이 깨어져 넘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중심에 계셔보라. 그 모든 걱정거리들을 다 콘트롤 하실 것이다.
우리는 비가 올까 안올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에 시선을 두면 안되고 주님께 시선을 두어야 한다. 오면 오고 말면 말고...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우리의 믿음은 비가 안 올 것이라는 믿음 즉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믿음이다. 일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이 “하물며”로 말씀하시면 우리는 “어련히”로 답해야 한다. 그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모습이다.
염려와 걱정을 포기하라.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우리들을 그냥 두시겠는가? “어련히” 알아서 하실 하나님께 맡기고 시험에 임하고 살기 바란다. 이 한 주간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끌 것인가? 염려와 걱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게 하시고 덤으로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