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루카 7,31-35
사랑의 공감능력
+찬미예수님
서품을 받자마자 첫 본당에 막 부임했을 때의 일입니다.
청년들과 첫 단체 회식이 있었는데 일이 있어 조금 늦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이미 청년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제 자리는 테이블 한 가운데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서글서글한 청년들 사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주위를 둘러봤는데 테이블 양쪽 끝에 앉은 청년들의 분위기가
꽤나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성격이 활달한 여자 청년들이 제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양쪽 귀퉁이에는 저와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남자 청년들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남자들이 원래 그렇습니다.
같은 성별이기 때문에 사제를 더욱 조심스러워 하고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친해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자리를 옮겨 앉았고
평소 남자 청년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당구 이야기가 나왔고 야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구동성으로 저에게 축구 게임을 하냐고 물어왔습니다.
당시 남자 청년들 사이에서 축구 게임이 유행이었으므로
저 역시 그 게임을 하는지 물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는 그 게임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솔직히 사실을 이야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대로 지내다간 아무래도 남자 청년들과 친해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바로 다음날 전자시장에 가서 게임기를 사왔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매뉴얼을 뽑아서 연구하고 여러 가지 영상을 찾아보며
틈이 나는 대로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약 2주가 지나 손가락에 물집이 생길 무렵 저는 남자 청년들을 사제관에 초대했고
그때부터 저의 본격적인 사목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변에 남자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워지자
평일이고 주일이고 미사에 나오는 청년들이 늘어났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도 사제가 청년들과 게임을 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면 저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충분히 거룩했습니다.
관계가 형성되자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고민을 털어놓는 청년들이 생겨났고,
그러다보니 함께 기도하고 기타치고 성가를 부르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청년들과 소성당에서 평일 미사를 따로 하고
교리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신앙적 측면에서 매우 좋은 결과가 이어졌습니다.
이 경험 이후, 어떻게 사목활동을 잘 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후배들에게 저는 항상 이야기합니다.
사제로서 기본적인 소양이 갖춰져 있음을 전제로,
적당한 스포츠, 하나 정도의 악기, 최신 가요에 대한 지식과 유행하는 게임 하나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목활동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를 다른 말로 “공감능력”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공통적인 감각이 있을 때 상대방은 마음을 열게 되고 신뢰를 갖게 되며
바로 그때에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활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아이들에게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지?” 라고 이야기 하면 아이들은 무표정하지만,
“나는 요즘 어떤 연예인이 좋더라” 라고 말하면 비로소 미소를 띱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감능력”은 사제에게 매우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지적하십니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고행을 할 때에 그에 공감하지 못하고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고 비난했던 자들입니다.
공감능력이 없으므로 세례자 요한이 어떤 의도로 고행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거룩하고 신실한 것인지 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그와 반대로 먹고 마시자,
이제는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니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과 함께하며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공감할 수 없는 그 상태로 머물러 있으니
그들의 마음에 지혜가 드러날 기회는 사라지고 자연스레 미움과 원망만 생길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공감능력을 어떻게 하면 잘 발달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에 대한 답은 오늘의 제 1독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 합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와 함께 하고자 애정을 담아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를 아끼게 되고 진정어린 교류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청하기만 하지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 공감할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투정만 늘어가고
기도를 즉각즉각 들어주시지 않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럴수록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애정 어린 시선과 사랑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과 우리의 대화의 창은 열리게 되고
나아가 깊은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 게임패드를 잡고 서투르게 홀로 게임을 연습하던
새 사제 시절의 저의 모습을 돌이켜 봅니다.
평소에 게임을 해 본적이 없어 몇 번이고 때려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울며 겨자먹기로 패드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이러한 사제의 모습이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그때의 저의 마음은 온통 청년들을 향한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