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남산에서/靑石 전성훈
기상이변으로 예년보다 평균 보름 이상 일찍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 온 세상 동네방네 탐스러운 흰색의 벚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진 모습에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해마다 봄이 오면 벚꽃뿐만 아니라 봄을 알려주는 모든 꽃이 한바탕 축제의 마당을 연다. 한겨울 속에서도 봄이 싹트고 있음을 알려주는 검붉은 설중매, 산과 들에서 춤추는 소녀를 닮은 분홍색 진달래와 귀여운 병아리처럼 따사로움을 전해주는 노란 개나리, 시골집 뒷골목 담장에서 부끄러운 듯한 모습으로 웃음꽃을 터트리는 샛노란 산수유가 활짝 기지개를 켜고, 세상을 앞서가는 절세가인의 풍만한 가슴을 닮은 듯 꽃잎이 넓은 하얀 목련과 보라색 목련이 노래할 때면 사람들은 너와 나 할 것 없이 모두 세상의 광장으로 나아가 함께 춤추며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건강을 잃은 핏기없는 환자도, 병상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봄날의 햇볕을 쬐면서, 부서지고 으스러진 마음을 위로하며 병들은 육신을 잠시라도 잊으려는 마음을 담아 이 봄에 기운을 차리고 싶어 할 것 같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식을, 부모와 형제를 잃어버린 사람은 함께 했던 어느 해 봄날의 즐거운 시절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친구를 잃어버리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가슴 아린 슬픔을 간직한 채, 그지없이 아름다운 봄날의 모습에 마음속으로는 잔잔한 파도를 느끼면서도 밖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모든 이에게 저마다 다른 인연과 가슴 저미는 추억을 만들어 주는 봄, 봄날은 그렇게 다정하고 따스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와, 짧은 순간의 달콤한 입맞춤을 뒤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지는 연인같이, 저 멀리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간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남산 공원에는 활짝 핀 벚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인다. 동국대학교 정문 앞에서 한 계단 한 계단씩 숨을 고르며 올라가 평평한 오르막길에 이르자 숨이 가쁘다. 오늘따라 한낮 기온이 섭씨 26도이다. 겉저고리를 벗어 손에 들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만개한 벚꽃을 바라본다. 바람이 살짝 불 때마다 그야말로 꽃비가 하늘에서 춤추듯이 살랑거리며 내려온다. 남산골 산책에 나온 사람들 표정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다정하게 손을 마주 잡거나 등허리를 감싸 안은 채 걸어가는 연인, 우리 연배로 보이는 노인네들이 느긋하게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다리가 불편한 듯 등산용 지팡이에 의지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다. 한참 걸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북악산이 보이고, 청와대를 건너서 인왕산과 슬픈 전설의 표징인 치마바위가 확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미세먼지가 조금 완화된 덕분에 주변 경치가 깨끗하다. 산책길 도랑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내 소리를 들어보세요.’라고 소곤거리며 졸졸 좔좔 흐른다. 벚꽃만 손짓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어떤 곳에는 벚꽃과 개나리 그리고 진달래가 옹기종기 사이좋게 함께 모여 꽃동산을 꾸미고 있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한 컷 두 컷 찍는다. 분홍색 진달래를 보니, 문득 진달래술이 떠오르고 돌아가신 엄마의 향기가 생각난다. 아주 오래전 대학생 때, 엄마가 진달래술을 정성껏 빚어 담그시고 아들 친구가 놀려오면 한두 잔씩 맛보라며 따라주셨던 기억이 난다. 남산 둘레길을 두 바퀴 걷고 시간이 점심때를 넘기자, 슬슬 길을 바꾸어 케이블카 타는 곳을 지나 명동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며칠 후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비가 오면 아름다웠던 벚꽃도 꽃잎이 무리 지어 땅으로 떨어져 가여운 모습으로 널브러지겠지. 봄날을 아름답게 장식하던 꽃들의 처연한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다. 봄꽃을 보고 웃음 지으며 사랑을 속삭이고 즐거움에 뜰 뜬 세월을 보낸 사람들의 사뭇 다른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자연의 순리처럼 잘 나갈 때 자신을 뒤돌아봐야 하는 게 인간 세상의 이치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악다구니를 쓰면서 철면피 같은 못난 짓에 온 정신과 몸을 다 바치는 추태를 보이는 지저분하고 너절한 군상이 너무도 많다. 더하여 돈, 돈, 하면서 돈에 미친 듯 환장한 삶을 그리워하거나 목을 매는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그저 돈을 벌겠다는 욕망에 휩싸여 아픈 몸도 돌보지도 않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학대하면서, 자신과 주위에 한 푼의 돈을 써보지도 베풀지도 않고, 돈 버는 일을 삶의 목적이자 목표로 삼았던 것처럼 살다가 허망한 모습으로 떠나갔다는 불쌍하고 가련한 어느 의사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년에도 정겨운 남산골 꽃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넘치는 것은 모자람과 같다.”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떠올려본다. (2023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