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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수도회] 눈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제1독서 : 1테살 4, 13 - 18
† 복음 : 루카 4, 16 - 30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가 죽음을 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죽은 모든 이를 다시 만나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머물게 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 가시어 당신께서 바로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아이시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다른 민족들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들 모두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밝히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많은 교우가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한때는 성당에서 활동
많이 했습니다.” “제가 꾸르실료에 참가할 적만 해도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성체 조배도 자주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묵주 기도를 한 주에 300단도 넘게 바쳤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만 같아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자렛 사람들도 두 가지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수의 아들로 살아온
것을 지켜본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 하지만, 이내 목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얽매여 그분께서
구세주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합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옛 계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일어난 기적의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맺어진 옛 계약만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 것도, 하느님 백성이라는 특권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교 신자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특권이 아닙니다. 지난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도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너 죽을래?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2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 4,16-30
너, 죽을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 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발전의 기회를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
(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지니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너 죽을래!’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나를 나답게
예전에 어떤 비행기 사고가 난 뒤에 가장 안전한 좌석이 어디라는
식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승용차에서 가장 안전한 좌석은 어디일까요? 운전자의 뒷좌석인
사장님 자리? 아니면 운전자의 옆자리인 조수석? 아닙니다. 가장
안전한 자리는 운전석이라고 하네요. 위험한 상황에서 운전자는
자신의 생명과 안정을 위해 본능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는 누군가를 고려하고 배려할 여유가 없습니다. 평소에
너그러움과 여유가 가득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긴박한 순간에는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고 말지요. 이런 모습을 볼 때,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기적인 존재가 아닐까 싶네요.
그러나 이런 이기적인 모습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커다란 희생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여주셨지요.
그리고 우리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들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태로는 주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흐름에
젖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내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사람, 다른 이들에게 특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그러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의 기준 안에서 무시되고 있는 사람,
즉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이기가 쉽던가요? 괜히 시간 낭비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들과의 만남 자체를 멀리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고향을 찾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고향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었겠지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가져다 주는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유, 시골의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 등등, 예수님에게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받을만한 어떤 좋은 조건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기준을 내세울 때,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었지요.
이 모습을 보면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내 곁에 다가오신 예수님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숨을 받아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곧 우리
각자에게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으며, 내가
나의 이웃을 반대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르며 살아갈 때, 내 안에 근본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더욱 더 기승을 부리면서 나를 주님 곁에서 더욱
더 멀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기준보다 주님의 기준을
따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꼭 하고 말 거야! 하지만 보세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언젠가’라는 요일은 없습니다.
바로 지금이 행동할 때입니다(할리 데이비슨).
불로동성당. 하반기 첫번째 특강.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노사카 레이코, ‘웃음은 빙산도 녹인다’ 중에서)
어떤 회사의 신제품 발표 이벤트에 아르바이트 여학생 둘이 채용되었다.
한 사람은 구니다 유코라는 일본인이고, 한 사람은 메리 쉘드릭이라는
미국 여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손님에게 “어서 오세요.”라고 웃으면서
전단을 나눠 주는 일을 했다.
그런데 유코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제복은 멋있고, 급료도
나쁘지 않았지만 다리가 너무 아프고 하루 종일 “어서 오세요.”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날은 그럭저럭 끝내고 아픈 다리를
문지르며 귀가했다. 둘째, 셋째 날이 되자 미소조차 지을 수 없었다.
전단을 건네는 태도도 거칠어졌다.
그런데 무심코 메리를 보니 첫날과 같은 미소로 “어서 오세요.”를
계속했다. 그날 탈의실에서 메리에게 “어떻게 계속 웃을 수 있어?
이런 일 시시하지 않아?”하고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내가 만일 웃지 않고 전단을 나눠 주면 ‘마음대로 가져가세요.’라고
벽에 써 붙은 종이와 똑같아. 나는 벽에 붙인 종이와는 달라. 그리고
웃는 얼굴로 한다는 계약으로 고용되었으니, 웃지 않고 서 있다면
계약 위반인 셈이지.”
나의 웃는 얼굴은 전 세계에서 오직 나밖에 할 수 없다. 그렇게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내가 나인 이유다.
나의 웃는 얼굴은 나밖에 할 수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유일한 것이
나를 나답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 아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웃음을 전할 수 있는 내가 되면 어떨까요? 나를 더욱 더
귀하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공감해야 한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옳은 것을 위한 투신이 그분의 뜻입니다.'
2013년9월2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루카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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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필요한 세상이다. 함께 느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가난한 자의 입장이 되어보려 하지 않고서는,
내가 강제적인 힘에 무능을 느껴본 입장이 되어보려 하지 않고서는,
내가 볼 수 없는 입장과 억압받는 입장이 되어보려 하지 않고서는
사실 공감이라는 말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복음은 공감하는 마음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
세상의 아픔에 공감해야 한다. 세상의 기쁨에 공감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복음 역시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것으로 그 의미를
잃고 만다. 실천 없는 공감은 더욱 비겁한 일이다.
모르기에 저지르는 죄가 아니라, 알면서도 저지르는 죄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 너무 많다. 상대적 가난이라는 정신 병리현상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난으로 굶어 죽어가는 생명들이
세상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분명한
죄악이다.
영어(囹圄)의 삶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도 수없이 많다.
마땅히 지켜져야 할 것을 파괴한 범법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양심에 의한 투신 때문에, 정치적 이념 때문에, 혹은 가진 자들의
폭행에 의해, 혹은 오해나 누명과 같은 억울한 세상의 판단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들의 해방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이사야서61장1절을 펼쳐 읽으시면서, 세상의 악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공감해야 한다.
최소한 세상의 아픔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공감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1월10일 복음묵상으로 올린 내용을 이어서 옮겨본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소명을 가지고 있다.
어느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 각자 의식하면서 사는 거다.
그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소명의식이라 한다.
가난한 이들이 있는 한, 내 배부르다 해서 행복할 수 없고
묶인 이들이 있는 한, 나 홀로 자유로울 수 없고
진실을 보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내 눈의 성함에 기뻐할 수 없고,
억압이 존재하는 한, 자신에게 주어진 평화에 안주 할 수 없음이다.
어느 별나게 비범한 이에게 주어진 소명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할 소명이다.
소시민적 안주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요한1서4,20)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2013년 다해 9월2일
오늘 서울대교구는 ‘성지순례길’을 선포합니다. 10시에 교구장님 주례로
명동 성당에서 성지순례길 선포 미사를 집전합니다. 미사 후에는 ‘생명,
말씀, 일치’의 길 중에서 말씀의 길로 순례를 떠납니다. 이번에 마련된
순례의 길이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보는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교자들께서 걸어가신 신앙의 길을 우리들 또한 함께 따를 수 있는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명동 주민 센터로 찾아가서 주민등록을 옮겼습니다. 교적은
전산화 되어서 이사 가는 곳의 성당으로 가서 이야기를 하면 자동적으로
옮겨집니다. 주민등록도 전산화 되어서 이사 간 곳의 주민 센터에 가서
이야기를 하면 자동으로 옮겨집니다. 최근 들어 주민등록을 자주
옮겼습니다. 작년 여름에 중견사제 연수를 하면서 머물고 있던 ‘후암동
성당’으로 옮겼습니다. 올 초에는 인사이동에 따라서 ‘용문 청소년
수련장’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인사이동에 따라서 ‘명동
교구청’으로 주민등록을 옮겼습니다.
매번 주민등록을 옮길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전입신고를
하는 주민에게 좀 더 친절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동네의 맛 집, 병원,
문화시설 등을 수록한 안내책자를 마련해서 주는 것입니다. 주민등록증에는
새로 이사한 집의 주소를 적어 주는 것입니다. 주민등록을 옮기는데 직원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교구장님의 도장을 받아오시고, 교구장님의 주민등록
번호를 적어 오셔야 합니다.’ 저는 단독세대를 구성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분들은 동거인으로 등록하셨다고 합니다. 10년 전에 살
때도 단독으로 세대를 구성했으니 그냥 그렇게 단독으로 해 달라고
했습니다. 직원은 그제야 주민등록 이전을 처리해 주었습니다. 명동 지역을
알리는 책자를 달라고 하자 그제야 주었습니다. 주민등록증에도 새로운
주소를 적어달라고 하자 그제야 적어주었습니다. 동네 주민 센터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본당의 교적을 옮길 때는 좀 더 친절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당 안내 책자를 드리고, 구역장, 반장의 연락처를 드리고, 본당 신부님과
면담 날짜를 정해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렸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여 사명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의 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이 참된 진리의 길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친하다던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선입견과 그들의 편견이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갑니다. 가족, 친구, 이웃, 직장
동료들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 나의 선입견과 나의 욕심 때문에 우리는
내 가족과 내 이웃의 진정한 힘과 능력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천사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눈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2013년 다해 9월2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16-30
눈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공생활을 떠나셨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금의환향하십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꿈결조차 그리웠던 고향이었습니다. 발길 닿는 곳
마다 갖은 추억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 친지들,
정겨운 친구들, 고향사람들 만날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안식일을 맞아 나자렛 회당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펼치시며 당신에게 해당되는 구절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히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이자 메시아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파견되신 이유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우리 인간들의 위로자요 해방자, 구원자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양한 속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씀에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다양한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무거운 죄의 사슬, 아무리 노력해도
호전되지 않는 영혼의 병,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굴레...
이토록 오랜 노예생활과 유배생활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반가운
말씀인지요? 육체적으로 눈 먼 이들의 시력을 되돌려주시는 것은
일종의 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 중요한 회복은 영적인 시력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눈 멈, 본질적인 것, 특히 하느님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의 암흑으로부터의 회복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찬란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이제 우리
인간 이성의 빛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이성의 빛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빛을 통해 더 이상 어두워지지 않을 참된 광명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성의 빛(lumen rationis)은 계시의 빛(lumen revelationis)으로
변형되고 드디어는 영광의 빛(lumen gloriae)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 낭독이 끝나고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말씀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명료한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그런 말씀이 흘러나온 것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구원의 기쁜 소식에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서 불신과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목소리가
이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해버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렛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순식간에
자신들의 처지를 180도 뒤바꿔주실 분으로 기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지상적 번영이나 물질적인 부,
강력한 정치력,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실 메시아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빵, 기적, 권세,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회개와 새 생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간단한 예수님의 요구조차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해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들의 눈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발로 차버리는, 그래서
그 구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차지가 되고 마는 불행을
선택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열린 영성 강좌 안내
다가오는 2015년은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한국 살레시오회는 교우들이 교회 안의 다양한
영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삶 안에 적용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열린 영성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이 강좌를 통해 많은 교우 분들이
모범적인 신앙의 선배들을 만나고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길
바랍니다.
개최 일시 : 2013년 9월부터 매주 월요일 10:00~13:00
(10:00 고해성사, 10:30 강좌, 11:30 미사, 12:30 식사)
장소 :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회 교육관
강사 : 양승국 신부, 백광현 신부, 장동현 신부 외 살레시오 회원들
문의 : 02-828-3500
*9월 2일 월요일 첫 강좌가 시작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어린이보다 어른일수록 변질되며 부패
2013년 다해 9월2일 연중 제22주일
어린이보다 어른일수록 변질되며 부패
교만, 위신, 비위, 기분, 보복, 모욕, 면박 등 거부반응이란 게 있습니다.
그래서 눈치, 아부, 기분 맞추기, 분위기에 신경 써 노력하며 삽니다.
이런 것들은 자만심, 교만, 도도함, 잘난척하는 습성 때문이라 봅니다.
그러니 자신만만, 신념, 줏대, 당연지사 같은 진리 편에 서기 힘듭니다.
소박하고 단순하게 긍정적으로 편히 사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거지요.
어린이 보다 어른일수록 이렇게 변질되며 부패되는 게 사실이네요.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루카 4,29)”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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