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 박일만
- 논개
1
새가 될 거나
아득히 날개를 폈다
몸은 억새꽃처럼 가벼웠다
혼신을 다한 죽음도 덩달아 날아올랐다
이승에 와 무겁게 몸 부리고 살았으니
부평초 같은 삶 의지가지없이 살았으니
내딛는 징검돌마다 가시 돋쳤다
가뿐히 날아 쏜살같이 잠겼다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팽팽하던 생이 툭, 손을 놓았다
깊이 모를 죽음이 외려 편안 하구나
나는 죽어 물새 되리라
나는 죽어 산새 되리라
발목을 놓아라 옷깃을 놓아라
남강의 물귀신이 다 내 동무들이다
너는 죽어 황천으로 가거라
너는 죽어 구천으로 가거라
창칼은 물속에서 더 춤추지 못할지니
손가락이 화살 되어 너를 단죄하는 도다
물속은 죽기에 참으로 광대한 땅,
맞잡을 손 하나 없는 외롭고 긴 길을
나 이제 돌아, 돌아가리라
2
나비가 될 거나
너르게 옷소매를 펼쳤다
꽃처럼 떠다니는 핏물에 싸여 숨이 막혀오는구나
허나 죽기에 참 좋은 시절,
고향집 마당에 무더기로 핀 수국
아비의 등에 업혀 어미의 손에 잡혀
어화둥둥 어화둥둥 지낸 세월
내 머리에 꽂아주듯 물속에 꽃비 내린다
꽃비에 맞아 휘늘어진 몸 간다
치렁치렁 머리카락 날리며 둥둥 떠
아비 등도 어미 손도 아득히 놓친다
천둥처럼 내리는 꽃비 속에서
나비 될 거나, 나비가 될 거나
눈물처럼 하염없이 꽃비 내린다
물속에서 바라본 촉석루 푸른 언덕,
남강 바위에 꽃상여 간다
3
꽃이 될 거나
헛발을 짚고 연꽃으로 설 거나
스무 살을 추스르니 일생이 갔다
참으로 억척스레 잘 살았다
육신은 끝내 내 것이 아니오
정신도 하물며 내 것이 아니로다
꽃잎도 한창때는 바람과 맞서는 거
죽음에 맞장 뜨는 대궁은 진흙도 붙지 않는다
물속에 훨훨 꽃잎 펼치니
여기가 하물며 지옥이어도 좋구나
추위가 송곳처럼 뼈를 파고들고
육신을 통째로 찌르는 흉통이 밀려왔으나
나의 혼은 외려 가볍구나 가벼웁구나
가슴을 후비며 목까지 물 차오른다
핏줄이 성난 뱀처럼 온몸을 휘감는다
사지가 봉숭아 꼬투리처럼 터져
사방으로 팔방으로 날아다닌다
4
단 하나의 사랑이 있었을 뿐
생은 비록 짧았으나
그 사랑 누구보다 깊었다
물속을 떠돌던 첫사랑이 손을 내민다
그를 안고 저 큰 바다에 가 나머지를 이루리라
사랑에는 조건이 없듯
무릇 그의 사랑은 넓이도 깊이도 잴 수 없구나
물속에서 끝없이 비가 내리고
가슴에서 끝없이 눈물 내린다
사랑을 찾아서 처처히 떠나는 날
충의忠義가 물을 휘감고
갸륵한 몸매로 함께 따라 나선다
<작가의 눈, 2021. 제28호>
[박일만]
·전북 장수 육십령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詩)수료
·2005년 《현대시》로 등단
·문예창작 지원금 받음(2회)
·제5회 <송수권 시문학상> ․ 제6회 <나혜석 문학상> 수상
·시집 『사람의 무늬』,『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살어리랏다(육십령)』 등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뼈의 속도』 ☞ 송수권 시문학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전북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 http://www.zaca.pe.kr
·블로그 https://blog.naver.com/sizaca
·이메일 sizaca@naver.com
첫댓글 잊고 지내던 논개의 정신이 다시 살아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