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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느 영재가 조국을 떠나기까지
堂井 김장수
어느 ‘영재’의 고백
내 이름은 효암(曉巖) 이현국. 2010년 11월 2일생. 나는 한때 ‘영재’였으나, 지금은 미국에서 귀화하여 노벨상을 받고
한국이라는 저주받아 멸망당할 나라에 대한 애국심은 아주 버린 지 오래다. 스무 살에 다니던 대학을 1년 만에 그만두고
미국으로 귀화한 이유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영재로 살려면 목숨을 항상 걸어야만 하기 때문이고, 교수라는 놈들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자기애적 망상에 사로잡혀 가지고 권력에 미쳐서, 그런 생활에 질식한 나는
그 따위 과학은 과감히 경멸하고 있다. 교수 중의 어떤 새끼가 그러더라. ‘노벨상에 연연할 거면
다시는 한국에서 살지 말라’고 말이다. 또 ‘노벨상이 목표라면 외국에 남아라. 그렇지 않다면
고국의 근대화를 위해 나와 함께 가자’고 지껄이더라. 내가 그 새끼 앞이라면 ‘나는 외국에 남겠다, 꼭 노벨상을 타겠다.
노벨상 못 타는 과학이라면 나는 필요 없다’고 일갈했을 것이다.
잘못된 ‘영재’의 길
나는 한때 ‘영재’였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모두가 그렇게 불렀다. 영재 판정을 받은 2019년,
초등학교 3학년 순간부터 몇 년간 쭉 그랬다. 호기심 삼아서 몇 가지 시험을 보았다가 영재가 되었다.
부모님은 영재인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셨고, 주변에서는 명문대 진학을 보장받았다고 부러워하셨다.
나는 그것이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중학교 때까지 ‘영재학급’에서 1주일에 3~4시간씩 다른 수업에서는 접할 수 없는 것들을 배웠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쓰인 암호를 해석하고, 화학, 물리학, 수학, 생리의학에도 실력이 있었다.
복잡한 암호를 풀어내고 수학 문제를 쉽게 풀어낼 때의 그 성취감, 그건 학교에서 수학시험을 잘 보았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영재 학생이라면 당연히 밟아야 한다는 경로를 따라가지 않은 건 돌이켜 보면 잘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 교육청이 운영하는 영재 교육반에 들어가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툭하면 담임은
“영재가 이런 것도 모르니?”
라고 타박할 때마다 숨이 막혔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완벽해야 한다, 하나라도 틀려서는 안 된다 이딴 얘기를 들을 때마다
숨이 더 막혔다. 견디다 못해 부모님께 왜 내가 영재로 살아가야 하느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대화는 끝이다. 명문대 들어가서 얘기하자!”
라고 딱 잘라 말했는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말 절망적이었다. 어쩌다 시험 중에 10문제 중 1문제라도 못 맞히면
주위에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나는 분명히 노벨상이 꿈인데, 한국에서는 모든 과목을 다 잘 해야 한다는 이기적 망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모른 채, 그저 자기들 욕심을 채우려는 이기주의자들인 것이었다.
미국으로 떠나다
견디다 못한 나는 주한 미국 대사관에다 이메일을 보냈다. ‘한국에서 영재는 다 잘해야 한다는 콤플렉스들끼리 나를 괴롭히고,
목숨을 항상 걸어야 한다는 점이 나는 싫다. 미국에서 노벨상을 타고 싶다’고 말했더니, 특별 귀화 절차를 밟아준다는 답장이 왔다.
나는 실패하기 싫었다. 꼭 성공하고 싶었다. 그리고 메일에 ‘한국에서 둔재로 사느니
노벨상을 추구하다가 한국인 손에 죽겠다’고도 덧붙였다. 또한 끄트머리에,
‘못난 콤플렉스들끼리, 병신 같은 인생들끼리 잘 살아라. 나는 그런 삶, 죽어도 살기 싫다.’
라고 덧붙여 보냈다. 재미도 없고 귀에도 안 들어오는 수업, 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만두면 ‘낙오자’나 ‘중도포기자’가 되어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 한국의 영재 교육은 정말 지옥이었다.
한국에서는 대학, 취업 이외에 출셋길은 이미 막혔고, 이대로 ‘실패한 영재’로 살기 싫었기에 나는 미국행을 택했다.
부모님은 나를 한사코 말렸지만 나는 부모님의 허락을 기어코 받아냈다. 그 대신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는 조건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반도 내의 한국인들과는 결코 상종하지 않겠다는 조건도 붙여졌다.
미련 없이 인천국제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다.
‘영재란 대체 뭘까? 이러려고 영재가 되었나? 자괴감이 든다.’
이런 고민은 정말 싫었다. 돌이켜 보니 한국인의 욕심이 나를 망쳤고, 다시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도 굳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한국 땅. 이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도 이미 굳어 버린 지 오래였다.
미국의 연구 문화
나는 미국 입국 후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 내의 연구원에서 과학 연구를 계속했다. 세계 과학기술 강국인 미국.
미국에서 자율적 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 병신 같은 나라 한국은 과학자들에게
각종 압력과 단기적 성과 산출, 중앙집권적 독재를 일삼고 있다. 과학이라면 창의ㆍ혁신ㆍ도전적 연구 문화와
뛰어난 업적을 뒷받침해주어야 하는데, 유독 유별난 한국의 과학자들은 과학자이길 포기한 것 같다.
연구가 실패했다 하면 연구비를 줄이고, 창조적 실패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 한국 과학이다.
일본과 미국, 영국, 독일은 노벨상 수상자를 매일 배출하고 있지만, 한국은 겨우 평화상 하나뿐이다.
그것도 잘났다고 그것을 자랑삼아 한국은 노벨상 수상자가 없어도 남의 나라에서 없는 것이 있다고 자기위안을 할 뿐,
바꾸고, 개혁하고, 고치고 그럴 생각은 아예 없다.
일본의 연구 문화
스물 몇 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 그들의 연구 문화는 장인 존중ㆍ한 우물 파기ㆍ축적 등 3개의 마인드가 있다.
개항 때부터 네덜란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연구 문화를 중시하는 네덜란드 보어 연구소의
‘코펜하겐 정신’을 적극 수용하여, 한편으로는 특유의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 장인을 존중하는
제조업의 전통인 모노즈쿠리를 결합했다. 하지만 일본은 1995년 이후 대학에서 연구자에게 안정적으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반적 경비’ 시스템을 경쟁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하는 ‘경쟁적 경비’체제로 전환하면서 위기를 겪고 있다고 들었다.
- 특히 한국은 더 심하다 - 안정적ㆍ장기적 연구비 부족에 따라 창의적 연구가 감소하고
단기성과를 따내려는 연구 경향이 확산되고 있고, 일본 과학계에서 창출되는 논문들의 양적ㆍ질적 수준이 저하되고
국제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다. - 한국에서는 창의적인 연구와 장기적인 연구는 매장을 당한다.
원래부터가 유별난 시스템이니 노벨과학상을 못 받지.
독일의 연구 문화
2035년 3월 11일에 독일에 연구차 갈 일이 있었다. 그런데 독일은 강소기업, 즉 ‘히든 챔피언’이 연구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산업, 학교, 연구소 클러스터 간 연구 협력 문화가 강하고, 독일 아헨공대에는 산학협력 연구소가 260여개나 된다.
독일은 분권ㆍ개방ㆍ맞춤형 연구를 통해 유럽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낸 나라다.
민간의 창의성을 존중하면서 정부는 혁신을 지원해주는 역할로 선을 긋고 있으며,
중앙집권·폐쇄적 독점·획일화 등 기존의 플랫폼에 도전하는 연구 문화를 장려, 격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하나의 길을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과학자들이 연구할 수 없는 환경이 형성된 지 오래고,
여전히 하나의 길을 고집하고 있어서, 미래가 되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소멸할지 모른다.
이스라엘의 역동적 창업 경제 시스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로 글로벌 수준의 벤처 창업 생태계를 조성한 대표적인 나라 이스라엘.
2039년 6월 10일에 텔아비브로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그들은 후츠파, 즉 도전·혁신이라는 벤처기업의 창업 정신을 중시하는 그들.
유태인 특유의 나이·계급·성별에 관계없이 서로 논쟁을 통해 진리를 찾는 '하브루타'가 정착되어 있다.
- 예수님도 어릴 적에 성직자들과 토론을 했다고 들었다. - 또 내수 시장이 작아서 창업 초기부터 미국 등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스타트업(4,700여개)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 도시 텔아비브는 세계 창업도시 6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 대표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비겁한 한국인의 자화상
한국은 1950년대 이후 가장 급속한 경제 성장과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세계 10위권 국가에 진입한 지 오래다.
그리고 코로나19 진단키트 개발, 소·부·장 산업기술에 대한 신속한 대응,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ㆍ5G 개발 등을 이루었지만, 연구문화는 철저히 미흡하고 제자리걸음이다.
‘빨리 빨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한국 연구진이라는 자들은 ‘축적’보다 ‘흐름’을 철저히 중시하고 선호한다.
변화하는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건 성공적이지만 – 그게 자랑이라고 지랄거리냐? - 한 우물 파기를 통한
독창적·창의적·독보적 연구 성과를 내기 힘든 나라다. 즉 노벨이 유언에 남긴 ‘가장 중요한 발견’은 어렵고 힘든 나라다.
여기에 한국의 연구자란 놈들은 실패하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단기·성과 중심의 연구 생태계로 인해 장기·안정적 연구가 어렵다. - 아니, 아예 불가능하다. -
또, 정부가 연구를 주도하면서 유행가식 연구가 진행되고 민간의 창의적 발상 따위는 아주 버렸다. 아니, 철저히 짓밟아댄다.
한국은 실패에 관대한 문화와 사회적 생태계 조성을 위하여 한국 과학기술계에 만연한
‘리스트 회피’중시 문화를 없애야 한다고 누군가 조언해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 장기·안정적 연구 지원이 필요한데,
한국 과학기술계는 진짜로 겁쟁이들에 비겁자들이다. 참 비겁한 새끼들이다.
201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일본의 아카사카 교수가 30년간의 연구 끝에 청색 발광 다이오드(LED)를 발견한 것이
대표적 사례인데도 그깟 몇 년을 기다려주지 않는 비겁한 놈들이 대세다. 대학들이 자율ㆍ독립적인 연구를 장려하고
안정적인 연구비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정부 주도가 이는 민간이 주도하여 창의·혁신적 R&D를 확산시켜야 하는데,
유별나게도 한국은 군대식 문화를 선호한다. 남 잘 되는 꼬라지도 보기 싫고, 그리고 뭐? 내 강의에 질문하지 말라니?
어따대고 감히 비겁하게 한국 과학을 짓밟느냐? 이러니 후진국 소리를 듣지.
나는 실패가 너무도 두렵고 철저히 성과만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비겁한 한국인들에게 침을 뱉고 싶다. 진심이다.
한국의 후진적 연구 문화
세계에서 젊은 과학자들이 가장 연구하기 힘들어하는 것이 한국 과학 환경이다. - 이게 다 송곡 최형섭 교수 때문이다.
- 과학자들의 창의적·독창적 연구를 막고 있고, 노벨상은 물 건너갔지, 교수란 새끼가 절대적인 권위와 권한을 독점하지,
여기에 질려버린 젊은 학생들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열정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위대한 연구 결과로 이어지기 힘들다.
- 나 같으면 박차고 나갔다. - 또, 연구비 횡령 등 비리가 이어지고 가끔 교수의 전횡과 갑질로 학생들이 크나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젊은 과학자들은 이런 연구실 문화를 개선해야 창의적·독창적 연구가 가능한데, 교수란 새끼들은,
“이 연구실이 싫으면 떠나라.”
이런 반응이었다. 이러니 발전이 없는 것이다.
젊은 연구자들의 작은 혁명
한국 연구 환경은 '공장' 연구실이다. 그것에 질식하는 젊은 과학자들은 한국의 연구 문화의 후진성을 지적하며
개혁을 강력히 원했다. 내가 덴마크에서 만났던 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카이스트) 대학원 총학생회 전 부회장은,
“한국의 연구실은 아직도 도제식 문화의 공장 방식의 연구실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장 방식의 연구실이란 대형 과제를 여러 가지 수주한 뒤, 몇 명의 고연차 박사학생이
과제별로 팀장을 맡아 운영하는 방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런 연구실은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신입생이 들어오더라도 헤매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장점이 있으나, 단점이 더 분명하다.
지도교수에 학생이 일방적으로 할당되는 방식이라 본인이 원하지 않은 학문 분야이거나 교수와 맞지 않을 경우
아예 과학자의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과학자들은 ‘한국에서는 연구가 힘들다,
다시는 한국을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다닌다. 참, 정부의 프로젝트를 따서 만들어진 연구실이라
이미 주제, 방향, 방침이 다 정해져 있어서 자유, 창의, 독창적 연구는 꿈도 꾸지 못한다.
또, 팀장인 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은 과도한 업무에 치어서 정작 자신의 연구와 공부는 뒷전이고, 지도교수의 방임,
즉 ‘무관심과 무지도’ 현상도 빈번하다.”
카이스트 대학원총학생회에서는 거대 연구실을 구성하여 PBS(프로젝트 기반 시스템)별로 뜻이 일치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그때그때 팀을 이루는 방식의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전 부회장은
“교수들도 뜻이 맞는 학생들로 연구팀을 꾸릴 수 있어 좋고, 학생들 역시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 이런 연구실의 경우에는,
현재 교수가 갖고 있는 학생에 대한 전권(학생인건비, 졸업 기준) 역시 어느정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라고 지적했다. 같이 왔던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학원의 전 총학생회장도 비슷한 답을 주었다. 그는
“현재 대학원의 연구 문화는 지도 교수가 졸업이나 수업 등의 학사 업무부터 휴가나 병가 같은 행정 업무 그리고
학생의 연구까지 독재적으로 관리한다. 교수가 학생에게 위력을 가하기 쉬워 수직적인 연구실 문화를 만들 뿐만 아니라
교수에게는 업무의 부담을 늘리고 학생에게는 자유로운 연구를 하기 어렵게 한다.
외부 공람 가능 행정시스템과 객관화된 졸업 기준 및 외부 위원을 포함하는 졸업 제도 확충, 공동 연구와 지도 활성화를 해야 한다.”
라고 지적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교수들의 요지부동
그런데, 내가 만나본 한국 교수들의 의견은 뜻밖에도 그들의 뜻과 정반대였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자리에서 나는 한국 교수들의
권위적인 연구실 문화가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를 제약한다는 주장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교수들의 의견은 뜻밖에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반응이었다. 이성준 교수는,
“교수의 전문 분야를 벗어난 연구를 하겠다고 하면 제대로 지도를 못하고 책임을 지지 못한다.
그렇게 좋으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를 찾아가면 되지 왜 설치냐?”
라고 지껄였다. 뭐 이런 새끼들이 교수냐? 또 김성빈 교수도
“교수가 주제를 갖고 연구를 하고 있는데 학생이 흥미가 있다고 해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유 주제로 연구하는 제도가 있으면 모르겠으나, 그때는 또 교수의 지도가 불가능하다.
교수가 이리로 가려고 하는데 학생이 딴 데로 가려고 하면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한다.
무조건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해라.”
이렇게 말했다. 자기 권력만 탐하고 학생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이제 한국 교수들에게 절망했다.
난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 정말 경멸스럽고 혐오스럽다. 나중에는 난 정말, 한국의 모든 것이 증오스럽다.
왜 이런 이벤트를 했을까?
듣자하니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로 꼽히는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매년 개최한다는 '피아노 부수기' 이벤트가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오리엔테이션 강의 후 최종 수강 과목 확정 전에 벌어지는 이 이벤트는 실제로 건물 옥상에서
피아노를 던져 버리는 행사였다. 오래전 한 학생이 듣고 싶은 강의가 없다며
장난삼아 피아노가 떨어져 부서지는 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고,
학교 측이 대담하게 이를 수용하면서 생긴 행사라고 한다. '어떤 주제든 하고 싶은 연구는 다 해보라'며
자유, 창의, 도전, 독창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미국식 연구 문화의 한 특성이다.
반면 ICT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자칭 선진국 한국에선 아직도 실패를 두려워하고 성과만 생각하는 연구 문화가
대학원은 물론 학부생까지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피아노가 아니라 더 비싼 샹들리에,
아니면 권위적인 어른들의 동상도 뽑아서라도 던져 버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한국 대학이 나오면 어떨까?
쓸데없는 권위를 내려놓고, 나이, 세대, 기수 불문 평등한 토론을 통해 연구를 개척해가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노벨상,
아니 그것보다 더한 위대한 연구 업적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미 그런 문화는 한국에서는 아무도 수긍하지 않는다.
나 효암(曉巖) 이현국, 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난 정말 비겁한 한국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
기초과학도 멸시하는 한국에는 노벨상을 받을 자격도 그럴 희망도 없다. 헬조선은 정말 절망적이다.
이 헬조선은 애초부터 독립 따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러려고 독립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너무 창피하다.
노벨상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나에게는 대한민국의 연구실의 실체는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한국은 기다리는 문화가 없다
한국은 기다리는 문화가 없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몇 년이든 몇 십 년이든 기다려 주어야 하는데,
이 나라는 그 단기간도 못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취직이나 공무원 이외의 출셋길이 막힌 이 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귀화한 것이다.
지금의 내 이름은 ‘프랜시스 현국 리’이다. 나 프랜시스 리는 이런 한국이 너무 싫다.
군대 문화에 함몰되어서 남자는 무조건 군대에 가야만 한다. 군대리아니 초코파이니 경험이니 하면서 강요를 하고,
아니면 어떤 범죄, 무슨 범죄니 하면서 매장시키고, 갑질이나 해대고, 그것이 한국의 진면목이다. 그게 싫어서 떠난 나다.
노벨상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노벨상 탄다니 나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다. 그저 단기간의 연구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지,
중요한 기초과학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토론도 안 되지, 질문도 안 되지, 그저 교수놈들 시키는 대로 하지,
자기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는 말로 나의 꿈은 한국에서 완전히 매장되었다. 나는 한국 과학,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친구는 말한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좋은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부질없는 연구 집어치우고 당장 한국으로 가자.”
하지만 나는 그런 일자리의 유혹도 과감히 뿌리쳤다. 자기들끼리 편하게 살면 될 것을 나에게 왜 강요하는가?
영재가 노벨상 타는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 심지어 한국에 사는 친구에게 이런 메일이 왔다.
열심히 군 복무를 한, 하고 있는 장병들의 수고가 헛되이 되어 대한민국이 패망한다면, 다 네 책임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내 조국이 바라는 보람된 일을 해보자!
나는 이 e메일을 무시했다. 한국이 나를 죽이려 드는 것을 짐작해 미국에 신변보호 요청을 끝냈다.
한국이 싫어 한국 땅을 떠난 사람들끼리 모임이 있었는데, 나는 그 고문을 맡고 있다.
그 모임에서는 한국의 단점만 부각시키며 고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 것처럼 말하는데, 나는 한국사람 곁에도 가기 싫다.
노벨상을 받지 못하게 앞길을 가로막으려 했던 놈들 때문이었다.
노벨상 시상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2086년 76세, 나도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되었다. 스톡홀름의 시상식에서 왕의 손에 들린 노벨상 상장,
금메달을 손에 쥐고 악수를 하는 순간, 나는 너무 기뻤다. 그 동안 연구소에서 기초과학이나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노력한 대가가 이것이라니, 정말 기뻤다. 상금은 통장에 보관했다. 어느덧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입국이 금지되었다. 이유는 ‘노벨상을 탔으니 한국에는 절대 오지 마라’,
‘군대 가기 싫어서 미국에서 노벨상 타고 거들먹거리는 놈이 말 한번 더럽게 많다’는 그 이유였다.
다른 나라는 선진적 연구 문화가 꽃을 피우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후진적이고 권위적인 연구만을 고집하는 것이 나는 싫었다.
정상적인 과학연구라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장기·안정적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대학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대하며, 민간 주도의 연구 문화를 구축해야 하는데,
유별난 또라이 나라 한국만 꼰대적인 문화를 고집하고, 한국 연구실 특유의 ‘꼰대’문화를 타파할 마음 따위는 버린 지 오래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고집이 세고 옛 방식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으며, 날보고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이딴 소리를 지껄여도
대항할 수 없으니, 이래가지고는 대한민국의 패망은 시간문제다. 정말 이런 ‘우리끼리’ 문화가 한국을 지배한다면,
미래의 대한민국에는 과연 몇 명이나 살아 있을까. 아니, 아예 소멸될 것이다. 아주 잔인하게.
에필로그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위대한 나라에서 태어나 노벨상을 타고 과학에 힘쓰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를 가로막고,
옛 습관을 철저히 지키며, 나 같은 ‘영재’들의 꿈을 철저히 짓밟고 있는 나라가 된 지 오래다.
이런 나라를 버리고 떠나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지금쯤 한국은 어떻게 변해가는지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다.
내 나이 80. 이제는 손주들의 재롱을 볼 나이다. 아들 넷, 딸 둘, 손주는 무려 열둘이다.
내 연구는 또 다른 기초 과학이 되어 나를 즐겁게 해 준다. 하지만 조국에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민국이 소멸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이유는 인구 과소 현상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늙었다. 이제는 나 혼자만의 꿈이 이루어지자,
동료 한인 과학자들은 난민이 되어버린 한국인들에게 온정을 베풀었지만, 나는 그들과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소외감을 느꼈다.
이제 대한민국은 패망했다. 그렇게 외길 고집으로 비겁하고 치사하게 굴더니, 정말 용기 참 가상하다. 꼴좋다고 말할 가치조차 없다.
나의 꿈이 짓밟혀서 떠난 내 조국, 이제는 사라진 내 조국. 이 나라는 회복 가망이 없어 망한 것이다.
그런 나라에 태어난 그 자체가 창피스럽다. 대한민국, 안녕. 나는 노벨상을 탔다. 하지만 너희는 골든타임을 영원히 놓쳤다.
너희끼리 잘들 해 봐라. 나는 내 뜻대로 살 테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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