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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묵상글 들 ( 연중 13주 월요일-공정과 정의에 관하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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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3주 월요일-공정과 정의에 관하여
오늘은 아주 무거운 주제, 공정과 정의를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공정과 정의를 얘기하고 있고,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문제가 공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창세기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은 뽑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젊은이들의 분노는 자기의 실패에 대한 분노인데
그것이 공정치 못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 인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노력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젊은이들의 분노의 종류는 이러합니다.
남이 아무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뽑히고 잘되는 것에 대한,
그것이 자기 능력이나 노력이 없이 부모 덕에 잘되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 대한 분노입니다.
한편으로 나의 능력 없음과 부모 덕이 없음에 좌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이 잘되는 것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젊은이들의 분노에는 내가 그렇게도 노력을 했는데도
취업이 안 되거나 원하는 것이 안 되는 좌절감이 크게 한 몫을 하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좌절과 분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얘기하는 공정의 문제점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공정은 요구하면서 정의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니까 공정의 정의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친구가 잘되는 것은 공정의 차원에서 분노하면서
용균이나 선호처럼 열악한 산업 현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죽은 친구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분노하는 젊은이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보다 잘되는 사람의 문제만 분노하는 공정과 정의이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는 공정과 정의이며,
모두가 잘살고 잘되는 공정과 정의, 공동선의 공정과 정의가 아닙니다.
제 생각에 요즘 젊은이들은 능력주의에 동감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능력주의자인 젊은 분이 당 대표에 당신도 되었습니다.
능력주의란 능력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인데
이럴 경우 능력없는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기 쉽지요.
그런데 이들이 현실에서 체험하는 것은 부모의 능력도 자신의 능력이지요.
부모의 능력이 없어서 좋은 학원, 좋은 대학 들어가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회사에 취직하는 것에서도 뒤처지게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신들이 능력주의의 피해자이면서 어찌 능력주의에 동감하고,
이래저래 자기와 비슷하게 능력없는 친구들과
그렇게 죽어가고 희생당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동병상련이 없습니까?
왜 능력자만 우대하고 무능력자는 무시하는 비정한 사회와 현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을 무한 경쟁으로 모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분노할 줄 모릅니까?
오늘 아브라함은 자기만 잘살자고 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가 죽든지 말든지 상관치 말고
자기만 살기 위해 빠져나올 수도 있는데 어떻게서든지
그 불의한 사람들을 살리려고 하느님과 흥정을 합니다.
진정한 공정과 정의는 사랑의 공정과 사랑의 정의이고,
모두가 잘사는 공동선의 공정과 정의여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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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는 나를 따라라.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떼어놓으신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많은 군중이 몰려들자, “제자들에게 호수 건네 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마태 8,18). 곧 제자들을 그들로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 제자교육을 받지 못한지라 군중에 휘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두 인물의 태도가 대조를 이룹니다. 어떤 율법학자는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데, 막상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 중의 어떤 이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겠다고 나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자세를 요청하십니다.
사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치유능력과 군중들이 몰려든 화려한 것에 마음이 끌려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이 안에 화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이 감추어져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본질이 있습니다. 곧 당신을 따르는 삶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믿음을 하늘에 두고서,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사는 삶이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삶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썩어 묻힐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을 따르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당신께 있으니,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에누리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나는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아니. 대체 어디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가? 혹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 혹 여전히 죽은 것들과 죽을 것들에 애착하고 매여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산상설교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주님!
오랏줄로 꼭꼭 저를 당신께 묶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금자리오니
당신을 따라 내려가 아래에서 살게 하소서!
대우보다 천대 받을 줄을, 존중보다 무시 받을 줄을,
인정보다 멸시 받을 줄을, 배려보다 모욕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형제들을 떠받드는 발판이 되고, 머리기댈 곳이 되고,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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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의 삶에 어중간은 없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느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십니다. 또 제자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말하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효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데 그만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의 갈림길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을 따르자니 세상의 것이 아쉽고, 고달프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자니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었더라면 마음이나 편안했을 텐데....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녀의 결혼, 출산 문제, 재물이나 교육문제, 공동체의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 매번 선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어중간이나 양다리 걸치기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분명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당에서 미사와 함께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예식장의 화려한 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녀 출산과 교육에 관한 관심 또한 소홀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미사참례자 수가 부쩍 줄어듭니다. 시험이 먼저입니다. 공부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모님마저 그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먼저 기도하고 공부하면 꼭 필요한 것을 공부하게 되는데..... 재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것에 우선하고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생색내기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내 것인 양 사용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빈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와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너감’ 곧 새로운 파스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죽은 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언제나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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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그곳에는 의인들이 없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이 전해 주는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평화스럽게 살아가던
아브라함의 일가가 직면한 난감한 처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아브람이 떠나온 하란의 칼데아 우르도 우상 숭배 풍조가 창궐하던
바벨론 문명권이었지만, 그가 정착한 가나안 땅의 소돔과 고모라도
그에 못지않게 죄악이 만연한 소굴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머지않아 태어날 자손에 대해 전해준 하느님께서
소돔의 죄악을 심판하려 하시자 아브람이 탄원하였습니다.
비록 죄악이 창궐해도 소수의 의인은 남아 있을 것이니 그 의인을 보아서
파멸시키지 말아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 땅에는 의인들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고작 롯의 아내와 두 딸 등 일가 네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탈출했고 그 땅은 유황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산상설교로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을 군중과 제자들에게
전하신 예수님께서 마주쳐야 했던 상황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듣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함량이 미달된 이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율법 학자는 그 가르침을 살아가자면 각오해야 하는
가난한 생활양식에 대한 각오 없이 덤벼들었고, 또 한 사람은 그 가르침을 살아가자면
끊어야 하는 혈육의 인연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기에 두 사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산상설교의 그 아름답고 고귀한 가르침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을 들은 군중 가운데에는 제자로 받아들일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인은 소아시아의 스미르나 출신으로서 프랑스 리옹에서
활약한 이레네오입니다. 그는 스미르나에서 선교한 뽈리까르뽀의 제자입니다.
뽈리까르뽀는 에페소에서 선교한 사도 요한의 제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뽈리까르뽀-이레네오의 계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스라엘 땅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 내륙의 프랑스 리옹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가 활약한 2세기의 프랑스에는 영지주의 이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때여서,
초대 교회의 정통 신앙을 프랑스에 전하기 위하여 박해를 각오하고 이단에 맞서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믿는 이들은 적고 무신론은 만연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충실한 이들은 더 적고 대다수는 냉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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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AI 시대 본능의 미래”를 읽었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4가지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성욕, 식욕, 출산, 죽음’입니다. 남과 여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성의 자리에 인공지능 로봇을 놓으려 합니다. 가축을 기르고, 도축하는 자리에 세포를 배양한 고기를 놓으려 합니다. 여성이 아이를 잉태하는 자리에 바이오백을 놓으려 합니다. 자연스러운 죽음의 자리에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는 기계를 놓으려 합니다. 모두 나름의 인간적인 고충과 경제적인 이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성을 통해서 성적인 위로와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의 가축으로는 고기를 먹으려는 인류의 욕구를 채울 수 없습니다. 아이를 원하지만 정상적으로는 임신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가족과 이웃에게 짐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요가 있다면, 그것이 법적으로 가능하다면 분명 공급하려는 기업이 생깁니다. 공급을 통해서 이윤을 얻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서 인공지능 로봇, 배양육, 바이오백, 죽음의 기계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은 시작단계이지만 인류의 문명이 그래왔던 것처럼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류는 기계에 더 많이 의존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통제한다는 환상을 갖기 위해 식품과 섹스, 탄생, 죽음을 기계에 청부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공감력, 우리의 불완전함, 우리의 능동성, 우리 존재의 우연성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런 발명품이 우리를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진보는 마음가짐을 선택한 용기입니다. 그게 기술 혁신보다 먼저입니다. 지난 세대가 꿈도 꾸지 못했던 계획이 우리의 자손을 집어삼킬 것입니다. 무시무시하고 파괴적인 힘이 그들의 손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안락함, 활기, 쾌적함, 즐거움이 그들에게 밀어 닥치겠지만,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통찰력이 없다면 그들의 가슴은 아프고, 삶은 황폐할 것입니다. 기술이 윤리를 대신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을 찾았듯이, 우리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인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명예나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둘째, 이러한 일은 시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는 가운데 2021년도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긴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죽은 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2021년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남은 6개월 사랑하면서, 웃으면서, 감사하면서, 고마워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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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제자직弟子職의 조건
- 꿈, 사랑, 추종, 기도 -
오늘 우리는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이름 뜻처럼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헌신한 목자요 교부로서 일생을 바친 참으로 예수님을 충실히 따랐던 성인입니다. 성인은 1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지미르) 출신으로 스승인 성 폴리카르포의 사도적 정통성을 이어 받았으며 프랑스 리옹의 2대 주교로 프랑스 지방에 널리 퍼진 영지주의 이단과도 피나는 싸움을 전개하면서 초기 교회의 정통 신앙을 확립한 2세기 대표적인 호부교부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성인은 리옹 교구가 번성하고 이단의 기세도 꺾일 무렵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벅해때 리옹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으며 고령이었던 성 이레네요 순교자도 202년경 장렬히 순교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성인의 대표적 저작 ‘이단논박’이 유명합니다.
예수님을 나를 따라라 하셨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침 어제 교황님의 통찰에서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요엘서 3장 1절,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라는 구절을 근거로 하신 말씀입니다.
“세계의 미래는 젊은이들과 노인들의 계약에 의존합니다. 젊은이가 없다면 노인들의 꿈이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겠는지요? 노인들은 계속 꿈꾸어야하며 그 꿈은 정의의 꿈, 평화의 꿈, 연대의 꿈, 결국은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바로 이런 꿈은 새로운 비전을 지닌 젊은이들을 통해 실현 가능합니다. 꿈들은 기억과 더불어 직조織造됩니다. 노인들은 살아있는 기억들을 지키고 젊은이들과 나누는 것이 노인들의 참된 사명입니다. 기억없이는 결코 삶은 건축될 수 없고, 기반없이는 우리는 결코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삶의 기초는 기억입니다. 꿈과 기억, 그리고 기도가 중요합니다. 노인들의 기도는 세상을 지켜주고, 어지러운 세상의 어떤 활동보다도 더많은 효과적인 도움이 됩니다.”
꿈과 기억, 기도 세 요소가 노인들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얼마나 결정적 요소들인지 깨닫습니다. 기도의 삶안에서 꿈과 기억으로 직조織造되는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꿈의 날실이 없으면 기억의 씨실도 사라집니다. 꿈과 기억은 함께 갑니다. 꿈을 잃으면 기억도 잃어버려 치매에 걸리기 십중팔구입니다.
생생한 꿈에 생생한 기억입니다. 평생 날마다 끊임없는 시편 공동 전례 기도를 통해 ‘찬미의 꿈’과 ‘감사의 기억’이 직조織造되어 아름답고 건강한 삶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꿈꾸는 인생’에 ‘감사와 사랑의 기억’ 가득한 인생이어야 참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의 강론에 제 묵상을 곁들였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참 좋은 상징적 모범이 오늘 창세기의 아브라함입니다. 99세의 고령에 이렇게 정정할 수 있음은 그의 꿈과 기억, 그리고 기도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꿈과 사랑의 기억이 함축된 간절한 기도가 바로 오늘 창세기입니다. 늘 하느님 꿈을 실현하며 살았기에 이런 고령에도 소돔을 위한 하느님과 소통의 간절한 기도요, 그가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한 기도의 노력이 참으로 집요하고 눈물겹습니다. 의인 쉰명에서 시작해서 깎고 깎은 끝에 의인 열명으로 합의를 봅니다만 우리는 그 결과를 압니다. 소돔은 말 그대로 파멸되니 의인 단 열명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분발케 하는 오늘 창세기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의인 한 분,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따라 의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 의인으로 살 수 있겠는지요?
첫째, 꿈입니다.
성서의 모든 인물들이 꿈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하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정의의 꿈, 평화의 꿈, 찬미의 꿈 등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도 하늘 나라였고 그 꿈과 비전의 실현에 전력투구했던 삶입니다. 꿈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집니다. 찬미의 꿈에 감사의 기억으로 직조되는 우리 인생입니다. 늘 생생한 하늘 나라의 꿈을, 비전을, 희망을 지녀야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하늘 나라 꿈에 대한 사랑, 이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통해 부단히 축적되는 사랑과 감사의 기억들이요 세상 것들로 부터의 이탈의 자유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전형적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런 완전 무소유의 주님을 따를 수 있는가 우리 모두를 향해 묻습니다. 참으로 세상 무엇에도 매임이 없는 대자유인 예수님이십니다. 말 그대로 정처定處없는, 하느님만이, 하늘 나라만이 예수님의 유일한 정주처였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을 떠나 사막에 가지 않아도 세상 한복판에서도 주님을 사랑하여 세상 것들로부터 이탈할수록 내적 사막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음을 봅니다.
셋째, 추종追從입니다.
주님 사랑은 주님을 따르는 추종으로 표현됩니다. 주님 역시 당신을 따를 것을 명령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문자 그대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일이 얼마나 엄중하고 중대한지 깨닫게 하려는 충격요법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기도입니다.
꿈과 사랑, 추종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끊임없이 바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궁극의 답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깨어 살게 하고, 생생한 꿈을, 생생한 사랑을, 생생한 기억을 지니게 하며, 자유로운 이탈의 삶과 더불어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인생 여정을 상징하는 산티아고 순례시 1.목표, 2.이정표, 3.도반의 세 요소 이 모두를 아우르는 결정적 요소가 4.기도임을 깊이 깨닫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따르는 인생 순례 여정중 날마다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전례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찬미의 ‘꿈’과 사랑과 감사의 ‘기억’으로 직조된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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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버스를 타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당연히 버스 정류장입니다. 그렇다면 버스를 버스 정류장에서만 탈 수 있을까요? 물론 지나가는 버스를 강제로 세워서 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확실하게 버스를 탈 수 있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기도하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기에 일상 삶 안에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우리는 쉽게 그리고 확실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어렵습니다.
미사를 소홀히 하는 분, 기도와 묵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일상 삶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길가에서 버스를 타려고 한다면 버스가 오는지 계속 지켜봐야 합니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 버스가 와도 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보지 않으면 일상 삶 안에서 만날 방법은 전혀 없게 됩니다.
어떤 식이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해야지만 참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우선한다면 이런 분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따르는 사람은 기쁘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너무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시면서 하느님께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버스를 타려면 오고 있는 버스를 보려고 노력해야 하고 버스가 정차하는 버스 정류장에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하려면 주님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성사 활동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에서 만족하는 삶이 아닌, 주님 안에서 만족하는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곁에 온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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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상하는 삶을 살라(헨리 데이비드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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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좋아하는 음식 중에 ‘김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밥하기 싫을 때는 분식집에 가서 김밥을 사 와서 식사합니다. 사실 김밥은 간단히 먹을 수 있기에 간편식 같지만, 다양한 내용물이 들어 있고 김밥 한 줄에 들어있는 밥의 양도 충분합니다. 두 줄만 먹어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밥을 좋아하는 결정적 이유는 추억의 도시락이기 때문입니다. 소풍, 운동회 때면 어머니께서 싸주시는 김밥이었습니다. 이 김밥을 떠올리며 과거를 회상하게 됩니다. 김밥 싸시는 어머니 옆에 서서 김밥 꽁다리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나하나 먹었던 기억에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요즘에는 김밥집이 많아져서 너무나 흔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기억을 하게 하는 김밥은 여전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늘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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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18-22: 제자 됨의 본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신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배움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더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이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속된 것에서 거룩한 것으로,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하신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끝없는 탈출이다.
그때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학자는 그분이 가시는 곳을 알지 못했다. 막연한 짐작뿐이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수난과 저승에 내려가심과 하늘로 올라가심을 향해 가고 계셨다. 율법학자나 베드로나 같은 모습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요한 13,36)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하녀의 물음 하나에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낮은 신분으로 겸손하게 사셨다. 그분께는 정해진 집이 없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20절) 고 하셨다. 그분은 차림새도 수수했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 나라에 대해 알고 계셨지만, 임금이 되기를 마다하셨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21절) 이 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려면,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카인처럼 둘째가는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이들을 위하여“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가족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22절) 이 말씀은 죽은 것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콜로 3,5) 이런 것들은 죽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던져버려야 한다. 몸 전체에 병이 옮지 않도록 베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신 분이다. 당신이 하느님이심까지도 모두 버리시고 당신을 낮추신 분이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거기에 즉 아버지의 뜻 안에 당신의 거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도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 철저히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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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열 명도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열 명만 있었다면 그곳은 비록 죄악이 가득했지만 구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 명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상대로 흥정합니다. 의인 쉰 명에서 시작해서 깎고 깎은 끝에 의인 열 명으로 하느님과 합의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소돔은 말 그대로 파멸됩니다. 의인 단 열 명이 소돔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 수가 제법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 성경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노아, 다니엘, 그리고 욥, 단 세 사람뿐입니다. 놀랍지 않은가요? 구약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 단 세 명만이 그 이름이 언급되면서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죄악이 가득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은 적은 수였을까요? 아니면 많은 수였을까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드라마인 구약 성경 전체에서 단 세 명만이 의인이라고 불렸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죄악이 가득한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은 매우 많은 수였습니다. 어쩌면 그곳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죄로 가득한 도성에도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의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에 의인은 얼마나 될까요? 열 명의 수가 많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부터 의로움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내딛어 보면 어떨까요? 그 발걸음은 나와 우리 공동체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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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때에 한 율법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19-20)”
여기서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되고 싶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받아주셔야 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라는 말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라는 뜻입니다.
이 말만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게 될 온갖 어려움들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말로 보이지만, 뒤의 예수님 답변을 보면, 입으로만 그렇게
말했을 뿐이고, 진심으로 각오를 한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잠깐 앉아서 쉴 수 있는 최소한의 안식처도 없다는 뜻이고,
당신의 생활은 온갖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뎌야 하는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려면
그 고난과 시련들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생활은 자연계의 미물들의 생활보다 못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면 ‘몸의 편안함’도 포기해야 하고,
세속의 부귀영화도 포기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1)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은, ‘단련과 정화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에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 우리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2)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보다 더 쉽고 편한 길도 없고,
반대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보다 더 어렵고 힘든 길도 없습니다.
바로 그 길 하나뿐입니다.
<그 율법학자가 예수님 말씀대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는지, 아니면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그 율법학자에 관해서 더 이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냥 돌아갔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19장에 나오는 어떤 부자도, 예수님께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라고 말씀하시자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2).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따르고 싶다는 소망만으로는 실행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하고, 어떤 어려움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하고,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겠다는 강한 의지도 있어야 합니다.
성소에 응답하는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8,21-22).”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는 그의 요청은,
겉으로만 보면,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잠깐 집에 갔다가
돌아오겠다는 말로 보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장례 자체는 특별한 일이지만,
장례 때문에 집에 갔다 오겠다는 요청은 특별할 것이 없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 대화는 제자의 요청이 아니라,
예수님의 답변에 초점을 맞춰서 해석해야 할 대화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라는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그 제자의 요청은 잠깐 집에 갔다가 돌아오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 제자는 ‘먼저 집에 가서’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만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집에 가는 일을 ‘먼저’ 하겠다는 뜻인데, 예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그 제자는 ‘나중으로’ 미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중단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제자는 아마도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큰 슬픔에 빠졌거나,
머릿속과 마음속이 많이 복잡해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거나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집에 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 때문에 생긴 그의 번민과 번뇌는
생명력 없는(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헛된 것임을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을 보면,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루카 10,4).
이 말씀은 실제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속세의 인연에 연연하지 말고 시간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도
속세의 일에 연연하고 집착해서
영혼 구원을 위한 일을 소홀히 하거나 중단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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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 22)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은
가장 가치있는
새로운 삶이다.
새로운 삶이란
반성을 동반한
은총의 삶이다.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반복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이
가장 알맞은
때이다.
지금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온 마음을 대해
따라가야 할
마음의 길이다.
따라감의
시간 안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
따라가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깊이는
맡겨드림의
마음의
깊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이끄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당신의 뜨거운
피와 살로
이끄신다.
이끄심과
따라감
건져올림과
구원은 하나이다.
내어드려야 할
따름의 여정이다.
예수님을 진실로
섬기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사랑을 빚진
우리가
사랑을
따른다.
목숨이
사랑이다.
그 사랑은
언제나
뜨겁다.
뜨거운
가슴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이다.
내버려두고
예수님만을
따라가야 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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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맺는 관계성의 척도를 알려 주십니다.
"스승님,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마태 8,19)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씀드립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나름 감동을 받은 걸까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욕이 가득해 보이지요. 예수님의 율법 준수 여부를 날 세워 살피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좀 달라보이기도 하고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하지만 용기와 결기 충만한 그의 고백은 아직 말의 단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지요. 지식 위주로 살아오며 기득권이 몸에 밴 사람에게 당신을 따르는 일의 실상을 미리 알려 주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상과 감상으로 받아들인다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만, 주님을 따르는 일은 아무말 잔치가 아닌 치열한 투신이니까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좀 모호합니다. 먼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이에게 "따름의 순간은 지금!"이라고 강조하신다는 건 알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주체와 대상을 "죽은 이들"이라 규정하고 계시니까요.
그 제자의 아버지가 당장 세상을 떠나 장례가 시급한 상황일 수도 있고,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서 마지막 예를 치른 뒤 제자단에 합류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일이 그 모든 인간적 도리보다 우선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
이미 죽어 묻힌 이들, 그리고 육으로는 살아 있으나 죽을 운명을 지니고 사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살아 있을 때 미처 하느님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 무지에서건 고의건 영원한 생명을 거부한 이들이지요. "죽은 이들의 장사"는 구원의 길 바깥에 머무르길 고수하는 이들끼리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앞에서 주님께 간청하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려 줍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
주님은 당신에게까지 들려온 소돔과 고모라의 원성을 "알아보아야겠다"(창세 18,20-21)고 하셨을 뿐인데, 아브라함이 먼저 심판의 의도를 넘겨짚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마음을 읽은 걸까요? 아브라함은 겸손을 잃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주님을 만류합니다. 아브라함과 주님의 대화는 흡사 흥정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세 18,25)
의인 쉰 명의 존재를 가정해서 시작된 이 대화는 열 명이 될 때까지 핑퐁게임처럼 반복적으로 오갑니다. 감히 주님께 "공정"을 운운하는 아브라함의 용기도 놀랍거니와 주님의 인내와 겸손 또한 경이롭습니다. 주님이 '아브라함보다 더, 어떻게든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고 싶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징벌 앞에서 누가 말려주길 간절히 바라시는 마지막 사랑과 자비가 느껴집니다.
아브라함과 주님의 대화는 매우 상호적이고 인격적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심판자와 인간이 서로에게 자신의 뜻을 개방하고, 간청하고, 수락하며 영향을 주고 받으니까요. 심지어 말이 자꾸 바뀌어도 역정내시지 않지요. 우리의 전구 기도가 진솔하고 겸손하며,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 염려와 방향을 같이할 때, 이처럼 주님의 마음도 돌려세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단순한 말을 넘어 그분 마음과 상호적으로 통하고 교류할 때 그분과 우리의 관계성이 심화됩니다. 또 역으로 관계성이 깊어질 때 통교 또한 역동적이 되지요. 기도의 진정성은 누구보다 주님께서 가장 잘 아십니다.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진정 그분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입'이나 '소리' 이전에 '마음'과 '지향'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과 결심, 전구의 기도가 아무말 잔치가 아니라 진언의 통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마음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마음을 듣고 겸손과 용기를 다해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도 기꺼이 인내와 겸손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겁니다. 마음과 지향이 통하면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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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
오늘은 교회 초기 영지주의 이단과 맞서 싸우면서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데 많은 힘을 쏟으신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가 17년 전에 사제서품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서품 성구(루카6,36)처럼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제'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길 청합니다.
'예수님 복음 선포의 삶'은, 예수님 말씀처럼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삶,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가 없는, 그야말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삶을 잘 따랐던 성인들 중에 한 분이 바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처럼 복음 선포를 위한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예수님을 붙드는 이들에게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43)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않으시고,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는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드러남'입니다.
오늘 독서인 창세기의 말씀(18,16-33)도,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재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는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 안에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 '의인 한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의인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내가 의인 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 다짐을 해 보게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자비를 따라가고,
의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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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가난과 고단함을 감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가족과 사람들의 애정을 다 포기해도 되겠냐고 묻는 것입니다.
가난해지고 고단해지고 관계가 단절되고 멸시받고 미움받는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이 세상에서 잃는 행복보다 더 행복하지 못하다면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 김광석의 노래 제목 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기로 한 사랑은 그 사랑 때문에 잃어야 하는 고통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잃는 아픔이 더는 아픔이 아닌 사랑을 해야 합니다.
폭풍의 언덕은 영국의 에밀리 브론테가 1847년 발표한 소설입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wuthering heights)이라는 곳에 언쇼가와 린튼가가 언덕 위와 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언쇼가의 주인 언쇼가 어느 날 고아인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우면서 시작됩니다. 고아로 들어온 히스클리프와 언쇼의 딸 캐서린의 격정적인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전편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언쇼가에 들어온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히스꽃이 만발한 ‘워더링 하이츠’에서 서로 사랑하지만, 캐서린이 아래 동네에 있는 린튼가의 지주 아들인 에드거와 결혼하기로 하면서 사랑이 깨어집니다. 결국, 히스클리프는 가진 것이 없는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히스클리프는 주인인 언쇼가 죽고 캐서린이 결혼하자 폭풍의 언덕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 후 3년이 지나 돈을 벌게 된 히스클리프는 언쇼의 아들 힌들리를 도박에 빠지게 하여 힌들리의 전 재산을 빼앗습니다. 언쇼의 아들 힌들리는 고아가 자기 집에 들어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에 대해 내내 히스클리프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버리고 돈을 선택한 캐서린에게도 복수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캐서린의 남편 여동생인 이자벨라를 유혹하여 아들까지 낳습니다. 히스클리프의 아들을 낳은 뒤 이자벨라는 죽습니다. 이자벨라는 히스클리프가 결국은 자기가 아닌 캐서린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남편의 동생과 아이를 낳은 히스클리프를 보며 캐서린도 딸을 하나 낳고 죽습니다. 캐서린과 그의 남편 에드거가 모두 죽자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아들 린턴과 캐서린의 딸을 결혼시키며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성사시킵니다. 그리고 에드거의 재산까지 모두 빼앗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워했던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턴을 내쫓습니다. 이렇게 모든 복수를 한 다음 히스클리프는 첫사랑 캐서린의 환영을 쫓으며 죽어갑니다.
히스클리프는 이자벨라와 결혼했지만, 마음으로 캐서린을 여전히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벨라는 무엇이었을까요? 히스클리프가 복수하는 데 쓰인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렇듯 사랑을 위해 다른 애정을 끊을 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죽은 이의 장사은 죽은 이들이 치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자녀를 잃었다고, 부모를 잃었다고, 친한 친구를 잃었다고 그렇게 만드는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는 말은 이전에 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캐서린은 어떻습니까? 결국엔 사랑보다 돈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전에 히스클리프와 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돈과 혼인하기 위해 히스클리프는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만약 집이 망했다고, 거지가 되었다고,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그리스도를 원망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채워주실 세상 영화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를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꼬실 때, 이러저러하게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말로 꼬드깁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누군가를 꼬드겨서 결혼해봤자 그 결혼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사랑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관계 내에서 오는 행복이 그것을 위해 잃는 모든 아픔보다 항상 더 커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때 ‘신학교에서 잘리면 뭐 성 프란치스코처럼 거지로 살면 되지!’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어 많은 것을 갖게 된 지금은 사제라는 이름과 지금까지 쌓아놓고 가지게 된 것을 잃을까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 감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따르기 위해 이 세상 모든 것을 잃는 아픔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잃는 것이 너무 아프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사랑은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행복한 그런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된 노래 하나를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전인권 씨의 ‘사노라면’의 일부입니다. 세상 모든 고통을 초월하게 할 사랑을 합시다. 사랑이 곧 행복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행복 자체이십니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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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스승 요한 사도로부터 제가 물려받은 신앙을 애제자 이레네오에게 고스란히 전수했으므로, 아무런 미련이나 걱정이 없습니다!
1888년 1월 31일, 73세의 일기로 돈보스코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메스컴을 비롯한 교회 사회 전반의 걱정은 상당했습니다.
‘위대한 교육자이자 살레시오회 창립자, 수많은 청소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해왔던 돈보스코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누가 그 사업을 계승할 것인가? 수도회는 돈보스코의 제자들로 구성되었으니 마땅한 후임자도 찾기 힘들고, 사실상 살레시오회는 끝났다고 보는 게 정답이다.’
돈보스코가 총애하던 애제자 미카엘 루아 신부가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는 후계자가 되기에는 너무 젊고 병약하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돈보스코를 이어 2대 총장에 부임한 루아 신부는 조용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스승의 사업을 무리없이 지속시켜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비웃기나 하듯이 루아 신부는 자신의 총장 재임 기간 동안 살레시오 회원수들의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갔습니다. 수도회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돈보스코 제자들의 보살핌을 받는 청소년들의 숫자 역시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루아 신부의 성공 비결이 있었으니, 그는 입만 열면 스승 돈보스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돈보스코께서 말씀하시길...돈보스코라면 이렇게 결정하셨을 것입니다...돈보스코께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이레네오 주교님의 스토리 안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도 성 요한의 애제자 폴리카르포의 애제자였습니다.
기원후 156년 1월 폴리카르포는 스미르나에서 영광스런 순교를 당하는데, 활활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속에서 선 그는 기쁘고 환한 얼굴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스승 요한 사도로부터 제가 물려받은 신앙을 애제자 이레네오에게 고스란히 전수했으므로, 아무런 미련이나 걱정이 없습니다!”
한 사람의 올곧고 돈독한 신앙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의 신앙을 전수받습니다. 전수 받은 신앙은 다시 한 번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신앙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전수되고, 그들이 신앙은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내려가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깊은 신앙과 따뜻한 사랑은 애제자 폴리카르포를 통해 손자뻘 이레네오에게 훌륭히 계승된 것입니다. 노인이 된 폴리카르포는 청년 애제자 이레네오를 앉혀놓고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스승 요한 사도의 신앙과 삶의 모범을 실감나게 이야기했습니다.
프랑스 리옹으로 건너간 이레네오는 순교한 포디노 주교의 후임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목적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리옹 시민의 절반가량을 그리스도교 신자로 개종시켰습니다. 초세기 교회, 가톨릭 교리가 온전히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이단들이 출몰했었는데, 그중 하나가 영지주의였습니다.
이레네오는 풍부한 학식과 견고한 신앙을 바탕으로 이단에 현혹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수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교회를 지키려는 수많은 호교서를 저술했는데, 대부분 손실되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이단자를 거슬러’라는 책 한권뿐입니다.
이레네오 주교의 명저 ‘이단자를 거슬러’는 당시 각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 이단 척결의 교과서이자 무기였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 교도권에 대한 도전도 상당했는데, 이레네오는 단호하게 반박하며 교회를 철벽 방어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누구보다도 높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제단은 으뜸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에 의해 수호되고 또한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교회는 항상 로마 교회와의 일치를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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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 로미노 형제님.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창세18,16-3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3-26)
'다가서서'로 번역된 '와익가쉬'(waiggash)의 원형 '나가쉬'(nagash)의 기본 뜻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까이 가다'(창세27,27; 2사무1,15), '접근하다'(민수4,19; 사도20,21)이다.
당시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대면하여 서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더욱 하느님 앞으로 다가섰다는 사실은 그가 소돔 성을 향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을 가졌는지를 반영한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친밀함과 기도에 대한 확실한 응답을 얻기 위한 간절함이 들어있는 행동이다.
시편 73장 28절의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 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창세기 18장 23절의 '의인'에 해당하는 '차디크'(tsadiq; the righteous)는 '의로운'(창세20,4; 시편116,5), '옳은'(잠언25,26; 이사41,26)이란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의로움을 지닌 사람'(탈출9,27; 잠언18,17), '옳고 참된 것을 말하는 사람'(이사41,26), 특히 '의롭고 흠없는 사람', '하느님의 법도를 순종하는 사람'(창세6,9; 시편5,13)이란 의미로 쓰였다.
즉 의인의 기준은 성품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고 하느님의 율법을 준행하려는 경건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대로 '악인'에 해당하는 '라샤'(rasha; the wicked) 역시 일차적으로는 '사악함'(시편5,5), '불의'(잠언4,17), '죄악'(시편125,3; 에제7,11)을 뜻하는 말이나 하느님의 성품과 그의 뜻에 위배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쓸어버리시렵니까'에 해당하는 '싸파'(sapa)는 '밀다'(이사7,20), '잡아채다', '빼앗다'(이사40,15), '치다'(1사무26,10)라는 뜻으로서, 어떤 쌓여 있는 사물을 '휩쓸어 파괴시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가 하느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파괴시켜 버리다'(destroy), '쓸어 버리다'(sweep away)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차원에서 창세기 18장 23절은 하느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거나 쓸어 버려서는 안된다는 아브라함의 간절한 호소를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창세기 18장 24절에서 아브라함은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데, 먼저 의인 쉰명에서 시작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의인 열 명이라도 있으면, 동성 연애 때문에 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유보시켜 달라고 간구한다.
그가 이처럼 쉰 명에서 시작한 것은 소돔과 그 인근 성읍(고모라, 아드마, 츠보임, 초아르; 창세기 14장), 즉 다섯 성읍들에서 적어도 한 성읍에 의인 열 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당시 소돔 성의 인구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돔이 비옥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창세13,12) 전체 인구는 많았고, 그 가운데 쉰 명은 지극히 적은 수였기에 이 정도의 의인은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송봉모 신부님의 아브라함에 관한 글에서는 그 당시 소돔 성읍의 인구를 만 명 정도로 본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이렇게 적은 수를 내세워 소돔성의 구원을 호소한 것은 의인 쉰 명이라도 크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혹시 ~있다면'으로 번역된 '울라이 예쉬'(ullai yesh)에서 '울라쉬'는 '아마도' 라는 뜻이며, '예쉬'는 '~이 있다'(there is)란 뜻이다. 직역하면, '아마도'(쉰 명은)있을 것입니다'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심섞인 추측을 반영하는 말이다.
즉 그많은 소돔성의 인구 중에 설마 쉰 명이 없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6)
'용서하다'에 해당하는 '나사'(nasa)의 기본적 의미는 '들어 올리다'(예레4,6; 에제3,14)이고, '(사람의 머리를)들다'(욥기10,15; 즈카2,4)라는 뜻도 있다.
이것은 죄인의 머리를 들게 해주는 것이나 죄벌의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서 들어 올려서 다시 높여 주는 행위가 모두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관련이 있기에, '용납하다', '사유하다', '용서하다'(창세13,6.7; 미카7,18; 탈출10,37참조)란 뜻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곳 전체'에 해당하는 '레콜 함마콤(lekol hammaqom; all the place; the whole place)은 '콜'(kol)이 '모두', '다', '전체'(창세2,2), '모두', '전부'(신명1,22)라는 뜻이 있으므로, 이것은 '의인 뿐만 아니라 악인도 거주하는 모든 성읍(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창세기 18장 26절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제시한 조건(창세18,24)을 기꺼이 수락하고 풍성한 자비를 약속해 주셨음을 보여 준다.
이 약속은 죄인을 징벌하시는 하느님의 공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자비)에 근거한 것이다.
하느님도 아브라함도 여섯 번의 흥정을 통해 이토록 서로 자비에 호소하고 자비를 표출하지만, 기어이 자비를 받아 입을 만한 의인들이 없어 불과 유황의 징벌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원리를 볼 수 있다.
즉 의인으로 말미암아 악인도 구원에 동참하는 길이 열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원리는 단 한 사람 뿐이었던 의인 예수님, 무죄하신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죄인들이 구원받는 십자가 사건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로마5,18; 에페2,8.9).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루카9,57-62) *병행복음 묵상글을 올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실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곧 죄인들의 죗값으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확실한 진리의 길이다,
그러나 오를 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길을 모르고 따르겠단다. 그저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을 따르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라 생각한 것이다. 신앙의 목적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의 진리임을 모르는 신앙생활을 한다.
(1베드1,9)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내 십자가임을 모르면서 성당에 다닌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받는 용서를 모르고 그 십자가의 의로움으로 구원, 하늘의 생명을 받는 것을 모르고, 그러니 자기 열심, 자기 의로움으로 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부린다.
58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 가난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 그 예수님을 우리의 머리로 구원의 진리로 믿는이가 없다는 것이다.
(콜로1,18)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코린6,15)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탕녀의 지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신앙의 올바른 목적지부터 ‘찾으라’ 하신다. 헛된 신앙생활를 ‘버리라’ 하시는 것이다.
과녁을 벗어나다- 하마트리아-죄(罪)
59ㄱ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 앞절, 그 신앙의 목적지, 과녁을 벗어난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59ㄴ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 아버지의 장사(葬事)를 외면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죽은 이를 위한 신앙생활이 아닌 그 죽은 이, 곧 죄인을 살리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신앙을 살라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의 생명(진리)을 갖지 못한 사람을 어둠(죄)으로 죽었다고 한다.(갈라3,22참조) 그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이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 복음이다.
(마태4,23)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 모두 용서로 살려 주셨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복음,
(이사53,4-5) 4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루가4,18-19.21)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61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쟁기에 손을 댄 사람~
(집회38,25) 25 쟁기를 다루면서 막대기 휘두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황소를 몰면서 *자기 일에 몰두하며 송아지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겠느냐?
= 자기일,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는 사람, 곧 제사밖에 할 줄 모르는 자가(황소, 송아지는 제물) 하늘의 구원의 지혜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제사는 십자가에서 단 한번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돌아보는 자,
(창세19,17.26) 17 그들(천사)은 (화려한 삶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가족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26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자기의 뜻을 이루려는 신앙을~ *그 헛된 죽음의 신앙을~ 그리고 *세상이 주는 편안의 삶을 돌아보면 재앙이다. 곧 하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의 길, 그 생명의 말씀(물) 신앙에서, 제사 그 피의 신앙으로 돌아가면 재앙이다. 그것이 물이 피로 변한 곧, 생명이 죽음이 된 이집트의 첫째 재앙이다.(탈출7,14~)
(갈라3,3)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생명)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죽음)으로 마칠 셈입니까?
= 그 죽음의 문화, 죽음의 신앙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돌아보면 인된다.
(갈라5,1)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죽으셨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아멘.!!!
♣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 하는 투신의 삶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8,21) 따르겠다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8,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은 한 인간의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중요하고 급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삶의 우선순위와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가장 기본적인 중심과 순위가 뒤바뀌는 순간 인생은 하느님과 무관한 죽음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행하는 것을 인간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할 때 우리는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에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하느님을 품고 행하고 만나야 하며, 무엇이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왜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였던 장례 의무까지도 무시하시며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까닭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유일무이한 시간에로 초대받았으며 그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워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또한 예수님에게나 제자들 모두에게 급박한 까닭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씀은 무덤을 파주는 사람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 생명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말로써 험담과 거짓과 중상모략을 하고, 죽음의 문화에 동참하는 행동을 하며,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 온갖 탐욕적인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생명을 지니면서 역설적으로 반생명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면 죽은 이들의 장사를 지내는 죽은 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과거에 집착하거나 과거 지향적 삶에서 벗어나 과거를 현재화(아남네시스)하고 미래를 현재화(프로렙시스) 하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묶여 사는 사람은 바리사이나 루카복음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사사건건 ‘왜?’라는 물음을 자주 던지고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과거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미래에 나를 통하여 이루실 일을 내 삶의 현재 안으로 가져오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엠마오의 제자들이나 베드로처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은총과 뜻을 헤아리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안일함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 안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해야겠습니다. 이 절박한 은총의 때를 뒤로 제쳐두고 나를 위한 현세적이고 육적인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오늘도 과거의 추억이나 상처에 파묻히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사’를 치르는 ‘죽은 이’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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