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9. 04:50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새벽,
가늘었던 빗줄기가 금세 주룩비로 변해 주룩주룩 내리며 우산을 때린다.
망월천 개여울엔 늘 그랬듯이 왜가리, 쇠백로, 흰뺨검둥오리가 물속에서
서성인다.
아무도 없는 산길,
청설모는 어디론가 숨었고, 가끔 얼굴을 보여주던 작은 고양이도 사라졌다.
숲 속에 떨어지는 빗소리,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천천히 마음을
보듬는다.
이런 빗소리라면 온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겠다.
조상들은 가을에 오는 비를 '떡비'라 했다.
가을걷이 끝나고 비가 오면 여유롭게 쉬면서 떡을 해 먹는다 해서 붙여진
비의 이름인데, 지금은 곡식과 과일이 한창 익어갈 무렵이라 '떡비'로
부르기엔 조금 어색하다.
<낡아서 사라지는 것>
등산화 바닥의 감촉이 이상하다.
오른쪽 등산화의 앞쪽 접착부분이 떨어져 입이 벌어지며 걸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나는 거다.
그러고 보니 거의 10년을 신은 등산화 바닥이 반들반들하게 닳았다.
난 등산화 네 켤레, 트래킹화 두 켤레와 운동화 일곱 켤레를 신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등산화 바닥이 드디어 떨어졌다.
접착제로 여러 번 자가 수선을 하여 신었으니 이제는 보내줄 때가 된 모양이다.
다른 물건을 버릴 때와 달리 나와 같이 산야(山野)를 누비던 등산화를 버릴 때는
정이 많이 들었기에 기분이 짠하고 신발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늙어가며 사라지는 것>
인생을 살다보면 곁에서 사라지는 게 많다.
낡아서 사라지는 물건이 있다면 늙어가며 사라지는 총기(聰氣)가 있다.
바로 하루 전 일이다.
갈증이 날까봐 새벽 운동도 하지 않고 금식 후 성심병원 채혈실에 갔다.
팔을 내밀자 채혈실 직원이 채혈 처방이 없다고 한다.
이럴 리가~ 메모창에는 분명히 넉달 전 기록한 메모가 있는데 어쩐다?
안과와 심장내과에 들려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채혈 처방이 없었다는
직원의 말을 들으며 식은땀이 난다.
휴대폰의 메모창에는 심혈관내과와 채혈로 분명히 기록되었다.
본시 기억력에 자신이 있어도 나이가 들면서 혹시나 실수를 할까 더 철저히
메모를 했는데 에러(error)가 났다니 난감하다.
현역 시절에도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하였고, 심지어는 꿈속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퍼뜩 일어나서 메모를 할 정도로 메모광인데 말이다.
작은 수첩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메모를 하던 습성은 휴대폰 노트창으로
이어져 빼곡히 메모를 한다.
그만큼 기억력과 철저한 메모로 나는 실수를 할 일이 별로 없다고 자부를
하였지만, 나의 오만(傲慢)으로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자 당황하며 등판이
땀으로 젖어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다음 진료 예약을 하며 즉시 메모를 했는데 내가 잘못 듣고 메모를 했던 걸까.
건망증인가 아님 종심(從心)이 되었으니 치매가 시작되었나,
온갖 상념 속에 머릿속이 하얘지며 잠시 혼란을 겪는다.
건망증이란 당시는 기억을 못 해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생각나거나 힌트를
주면 금방 떠오르고,
치매는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는 특징이 있다는데,
이번 경우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고 사전 전화 확인도 하지 않았으니 나는
어디에 해당할까.
<자연에서 사라진 것>
요즘 산이나 들에서 '잠자리'를 보지 못했다.
잠자리는 늦여름부터 가을이 되면 수십수백 마리가 유영(遊泳)을 하며 하늘가를
수놓다가 코스모스나 가을꽃에 앉아 쉬기도 한다.
금년 여름과 가을은 수상한 면이 많다.
매미도 극성을 피지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잠자리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풀숲에서 뛰어노는 '방아깨비' '메뚜기'는 물론 일명 사마귀로 불리는 '버마재비'도
보지 못했다.
산과 개울가는 물론이고 어지러울 정도로 하늘을 뒤덮던 잠자리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태풍이 많지 않았고,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는 과정에서 자연이 반발하는 걸까.
동남아 등지에서 태풍을 타고 한국에 와 한철을 지내고 가는 수천억 마리
'된장잠자리'의 개체수가 적어 내가 착시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토종인 고추잠자리와 왕잠자리 밀잠자리는 어디로 간 걸까,
많은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쩌면 잠자리의 애벌레인 '학배기'가 아직도 물속에서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학배기가 물속의 올챙이나 송사리를 제대로 잡아먹지 못해 아직 어른 잠자리로
변하지 못했으면 어떻게 될까.
잠자리가 사라진 덕분에 잠자리 먹이인 나비, 등에, 파리, 모기가 살판이 났다.
< 쥐똥나무 열매 >
또 사라진 게 무엇일까,
<사람다운 사람이 사라졌다.>
사람다운 사람은 다 사라지고 허접쓰레기만도 못한 사람들이 설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놈 저놈 다 대통령 하겠다고 나와서 주접을 떨며 '가붕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국민들을 열 받게 하는데,
이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을 찾고자 예의 주시해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인지용(仁知勇)을 갖춘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걸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덕(德)을 가진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말과 행동이 다르고
'큰소리, 헛소리, 딴소리'를 마구 해대며 대통령을 지망하는 정치인을 보면
욕부터 나온다.
나는 '다움, 답게'라는 말이 좋아 잘 쓰는 편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지도자는 지도자답게 처신을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도자가 덕(德)이 없는데도 자리는 쓸데없이 높고,
임금이 지혜가 없는데 도모함은 크고,
권력을 가진 자가 역량은 모자란데 맡은 바가 크면 인간세상에 재앙이 오는
법이다.
무덕(無德), 무지(無知), 무용(無勇), 부덕(不德)한 사람들이 욕심은 가득하고
그중에서도 권력욕이 하늘에 닿으려 하니 이 일을 어찌할꼬.
이들이 욕심을 버려야 패가망신을 하지 않고 백성들도 편하게 살 텐데 말이다.
< 방동사니 >
이밖에 사라진 게 또 무엇일까.
저출산으로 인해 아기의 '웃음소리'가 사라졌고,
장기간 코로나에 시달린 국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또한 여당 대통령 후보가 관련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화천대유 천화동인'이라는
해괴한 회사가 번 일확천금에 국민들의 오장육부(五腸六腑)도 녹아
사라졌다.
2021. 9. 29.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오늘은 곤충 지식 배웠다. 고맙다
ㅋㅡ머리 지진 날껄